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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를 내면서
“하늘의 모든 것이 완전한 질서 속에 있음”이 알려진 1850년의 엘렌 G. 화잇의 계시와 안식일 준수 재림교인들의 조직의 필요, 1860년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명칭 채택, 1861년의 지방 교회와 합회의 조직, 1863년의 대총회 조직 등으로 본 교단의 세계 사업은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사람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살전 5:23)되게 하는 하나님 사업에는 계시의 영감에 따라 필수적으로 목회, 교육, 건강, 출판 사업 등이 병행하게 되었고, 사업의 확장과 분화(分化)는 각 분야의 전문인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업 초기의 인사 배치와, 특정 사업의 실재와 그 사업의 목적과 교단 이념과의 부조화에서 큰 난제가 생기기도 했다. 여기서 주로 문제가 된 것은 세상의 표준에서 자격을 갖춘 인재들이 하나님의 계시로 지시된 바와 일치된 사업 노선을 취하지 않은 점이었다. 필연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책임 맡은 분야의 사업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와 일치되지 않는 역순환이 거듭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업 기관들이 재난을 당하게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서까지 인지되는 수모로 남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의 정립 과정에서도 일부 지도자들의 이해 부족과 완미(頑迷)로 상당한 고충이 거듭되었다.
본서 “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은 하나님의 사업을 맡은 목사와 교역자들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데 필요한 방법을 제시하는 내용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 교역자”와는 그 내용이 판이하다. 본서에 수록된 내용의 상당 부분은 증언이 주어진 당시의 개인과 특정 기관에 대한 기별이다. 곧 개인적이요 지방적인 성격의 내용이다. 그것은 그 당시 지도자들에게, 그릇된 길에 빠지지 않게,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게 경고하고 견책하는 글들이다.
그러나 보편적·객관적 교훈은 언제나 이런 개성적인 기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는 언제나 하나의 전감(前鑑)으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급변하는 시대상은 사업 초기의 지도자들이 겪었던 것보다 못하지 않은 큰 시험을 교회 지도자들에게 안겨 주고 있다. “이기심”과 “세상과의 타협”은 인간 역사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 백성들을 사로잡는 올무로 사용되어 왔다. 여기에서 취할 구제의 길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자신을 비우는 겸손 뿐이다.
이 책의 영감에 나타난 시대 초월의 기별이 하나님 교회를 이끄는 모든 지도자들에게 수긍되고, 그 기별의 힘에 굴복될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엡 5:27)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을 확신한다.
1993년 1월
제3판의 머리말
한때 구입이 가능했지만 화잇 여사가 서거한 1915년 당시에는 절판된 서적들 가운데 “목사와 교역자에게 보내는 특별 증언”이라는 제목이 붙은, 1890년대 출판된 시리즈를 포함하는 다수의 특별 증언 팜플렛이 있다. 이 11개로 이루어진 시리즈는 자주 특별 증언 시리즈 A로 언급되고 있다. 이 특별증언들에 담긴 교훈들을 다시 출판하라는 요청에 부응하여 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이 1923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엘렌 G. 화잇의 사후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 제일 먼저 나온 것 중 하나이다.
목사에게 보내는 증언은 증언 두께의 책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1944년에 좀더 큰 활자체와 큰 판으로 제2판이 발행되었다. 40년간 초판과 2판이 모두 여러 판씩 증판되어 일터에 공급되었다. 취급과 참조를 보다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 본 제3판은 편리한 증언 크기의 페이지로 발간되었지만 페이지 내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된 1888년 대총회 회기에 뒤이은 10년동안 주의 사자로부터 매우 중요한 기별들이 배틀크릭의 본부교회에, 대총회 위원회에, 그리고 사업의 심장부에서 다른 중책을 맡은 이들에게 주어졌다. 이 기별들은 중생과 생애의 개혁을 촉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원칙들을 생활에 실천하고, 우리 주시요 구주이신 예수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경험하도록 격려하였다.
그 기별들이 배틀크릭에서 받아들여지고 읽혀진 후에 이 기별들 중 다수가 배틀크릭 교회에 보내는 특별 증언과 목사와 교역자에게 보내는 특별 증언의 제목으로 소책자 형태로 출간되었다. 일터에 산재해 있는 주요 목사들과 교역자들에게 대총회 위원회가 이 책들을 제공해 주었다. 이 기별들은 마음을 면밀히 살피고, 영혼을 분기 시키고 악에 대해 충실히 경고 하지만, 끊임없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신 그리스도의 능력의 충만함을 가리킴으로써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팜플렛 형태의 증언들로부터 발췌한, 본서에 실린 자료들을 선별하는 데 대하여 1923년 발간된 초판에 실린 발행자의 서문은 이렇게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이 일을 담당한 위원회는 결정된 그 책의 크기에 제한을 받았으며, 보급된 부수가 적은, 수많은 이들 소책자들에 의해 제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11개의 특별 증언들에 실린 모든 것들이 본서에 모두 실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1) 어떤 부분들은 특별 증언들이 발행된 이래로 책들이 재인쇄 되었으며, (2) 다른 부분들은 순전히 국지적 내지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문제들에 관계된 것들이었으며, (3) 그리고 다른 것들은 본서에 재인쇄된 다른 문서들에 더 충분히 그리고 강력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매 기사의 출처는 각주란에 첫 발행일자와 함께 표시되어 있다. (여백을 메우는) 몇 개의 “단편 기사”의 경우는 끝부분에 표시되어 있다. 본 제3판 에는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참고할 서적들”의 항목 일람표가 다소가 확장되어 1923년 이후에 발행된 엘렌 G. 화잇 편찬물들에 등장하는 관계 자료들에 대한 인용문도 포괄하고 있다.
엘렌 G. 화잇의 펜에서 나온 어떤 권면들과 책망들은 독자가 그 기별이 쓰여졌을 당시의 일반적인 상황들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증언 팜플렛과 본서 초판의 독자들이 훤히 알고 있었던 교단 역사에 대한 어떤 세부 사항들은 대부분의 현대 독자들이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1890년대에 이르는 배경을 제공하는 교단 발전의 중대한 시점들을 제시하기 위해 본 제3판에 역사적 서언이 부가되었는데 본 머리말 바로 뒤에 실려 있다. 그 시기에 관계된 역사적 사건들이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다. 부록 주해 또한 제공되었는데, 특정 장소, 상황, 혹은 사건들에 대한 언급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 주해들은 여기에 제시된 기별들 가운데서 저자의 의도를 올바로 확인하는 데 독자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본서를 구성하고 있는 자료들을 개괄해 보면 주로 주어진 장(章)의 내용은 한 팜플렛에서 전재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이 팜플렛 자료들과 함께 리뷰 앤드 헤랄드 기사들과 일반적 성격의 다른 엘렌 G. 화잇 자료들에서 끌어낸 서너개의 관계 항목들이 실려 있다. 특별 증언 시리즈 B에서 전재한 두 기사가 실려 있다.
특별 증언 시리즈 B는 1903년에서 1913년 사이에 화잇 여사나 교단 기구 들이 발간한 19개의 팜플렛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제들은 다양하며, 그 대부분은 국지적으로 적용되는 그런 성격의 것이었다. 이 사실은 그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1. 의사들과 목사들에게 보낸 서신들 (1903)
2. 의사들과 목사들에게 보낸 서신들 (1904 후기 혹은 1905)
3. 남 캘리포니아의 위생병원 교역자들에게 보낸 서신들 (1905)
4. 화합의 정신
5. 콜로라도 보울더 위생병원을 위한 열렬한 호소 (1905)
6. 교육을 받기 위하여 배틀크릭으로 가는 청년들 (1905)
7. 의료 선교 사업과 관련된 위험들에 관하여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에 보내는 경고와 교훈의 기별들 (1906)
8. 우리 기관들과 훈련 센터들의 강화와 의료 선교 복음 전도자를 위한 호소 (1907)
9. 개인적인 책임과 그리스도인 화합 (1907)
10.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다 (1908)
11. 매이슨 학교 (1908)
12. 오크우드 노작 훈련 학교 (1908년경)
12X. 헌츠빌 학교 (1908년경)
13. 뉴 잉글랜드 위생병원 (1908)
14. 파라다이스 밸리 위생병원 (1909)
15. 위생병원 교역자들 (1911)
16. 우리 위생병원의 학생들과 교역자들을 위한 증언 선집 (1911)
17. 돈의 현명치 못한 사용과 투기의 정신 (1911)
18. 내쉬빌 위생병원 (1912)
19. 희생 정신 (1913)
이 일람표에 “시리즈 B”라는 표식을 달고 있지 않은 두 항목이 부가되기도 한다.
20. 화합을 위한 호소 (1912)
21. 휴양 (1913년경)
1890년대의 봉투 크기의 특별 증언 팜플렛들과는 아주 다른 목적으로, 그리고 보다 큰 판으로 나온 이 기사들은 시초부터 특별 증언 시리즈 B로 불리웠다. 1890년대 그 이전의 것들은 목사와 교역자들을 위한 기별들을 담고 있었는데, 출판 당시에는 그렇게 불리워지지 않았지만 “시리즈 A”로 알려지게 되었다.
“시리즈 B”기사들 가운데 처음 출판되었던 것 중 교회에 지속적인 유익을 줄 일반적인 문제들은 후에 교회증언 8권과 9권, 그리고 건강에 관한 권면, 청지기에게 보내는 권면, 의료 봉사, 그리고 가려뽑은 기별에 수록되었다. “시리즈”B 모음집에서 전재한 두 기사가 본서에 실려 있다. 그것들은,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다”(471-478쪽)와 “개인적 책임과 그리스도인의 연합”(478-497)이다.
다년간의 기간에 걸쳐 일한 화잇 여사는 어떤 방면의 권면들은 자주 되풀이 하였다. 보다 이전의 팜플렛들과 저술들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다시 인쇄하는 것은 주제들의 반복과 지금은 전체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못 한 국지적, 혹은 개인적 문제들에 대한 상술로 독자들에게 짐을 지우게 될 것이다. 본서에 싣기 위해 선별한 자료들에 관해서 초판의 서문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위원회는 적당한 부피의 한 권의 책에 소책자에 인쇄된 문제들 중 최고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것들을 제시하고자 열렬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력하였으며, 생략된 부분들은 제한적으로 배포된 다른 소책자들에서 모은 것들로 능히 포괄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목사에게 보내는 증언 제3판의 출판 책임자들은 1923년에 발행자들과 함께, 이 편리한 책이 그 책을 읽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것 에 대한 교훈의 원천이 되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의 희망과 원기를 북돋우도록, 필요되는 곳에는 생애의 개혁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고, 우리 모두들 가운데서 세상에 그리스도를 드러내 줄 그리스도인 은혜를 가져다 주는 데 도움을 주도록, 그리고 우리의 복된 주님의 마음에 우리 모두를 좀 더 가까이 가게 함으로써 서로간에 우리 모두를 가까워지게 하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펴낸다고 말한다.
엘렌 G. 화잇
유산 관리 위원회
워싱턴, D. C.
1962. 5. 10.
역사적 서언
제3판인 본서의 머리말에 언급한 바와 같이 본서는 리뷰 앤드 헤랄드에 게재된 엘렌 G. 화잇의 글, 배틀크릭 교회와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증언들이라는 이름이 붙은 소책자들로부터 가려뽑은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본서의 상당 부분은 1890-1898년에 기록되었으며, 어떤 분야의 경우에는 좀더 효과적인 조언을 제공하기 위해 그 이전, 혹은 이후 시기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제1장,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관심을 갖고 당신의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것에 대해 확신을 줄 것이며, 교회의 승리에 대한 분명한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후에 목사와 행정가들에게 보내는 경고와 조언의 기별들이 이어진다.
1890년대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체험에 있어서 흥미롭기는 하나 어떤 면에서는 곤란스러웠던 때였다. 십년이라는 기간에 교회는 성장하여 교인 수효가 두 배로 늘었다. 교역자들은 신속하게 새로운 나라로 들어갔다. 미국 본토는 물론 해외에도 기관들이 세워졌다. 1863년, 제1회 대총회 회기 때에 마련된 기관을 위한 원래의 지침은 해묵은 것이 되고 말았다. 오래전에 세워진 기관들은 팽창하고 있었으며,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교인들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성장은 수많은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유주의가 넘보고 있었으며, 다른 편으로는 통합주의와 중앙 집권주의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또한 어떤 교리 문제에 대해 상세하고도 열띤 논쟁이 있었던 1888년 미네소타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의 여파가 이 기간에 내내 남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쪽 진영 혹은 저쪽 진영으로 갈라졌으며, 그들의 결정은 교리 문제를 제시하는 일에 있어서 뿐 아니라 예언의 신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태도들 중에는 불건전한 것들도 있었다. 이 기간에 엘렌 G. 화잇은 복음의 신개척지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사업을 일으켜 세우고 대학과 요양원을 세우는 일을 지도하였다.
본서는 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본서는 복음 교역자처럼 목사가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교훈하는 일에 치중하고 있지 않다. 본서는 교회 목사들에게 격려하고 경고하며, 견책하고 조언한 기별들을 수록하고 있으며, 책임을 지고 있는 인물들이 특별히 당하기 쉬운 위기에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견책 중에는 가혹한 것도 있지만, 징벌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고치기 위해서 상하게 하신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44.)는 약속이 이 속에 있다.
목사들과 특히 행정자들에게 주신 견책과 권면들은 맨 처음에 엘렌 G. 화잇에 의해 출판되지 않고 대총회장에 의해서, 후기에는 대총회 위원회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원래 대부분의 기별은 올슨(O. A. Olson) 대총회장과 그 동료 행정자들, 특히 배틀크릭에서 활동하던 이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동료 목사들과 행정자들의 잘못을 지적한 견책, 그에 관련된 조언과 격려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 기별들을 인쇄하였다.
주요 역사에 대한 회고
1890년대에 주신 기별들의 배경을 이루는 본교회사의 특정 상황들을 회고하게 될 때 우리는 이 기별들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을 발굴할 수 있다. 이제 역사의 페이지를 뒤로 넘겨서 몇 가지 중요한 발전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최초의 안식일 준수 재림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분의 길로 행하고자 하는 열성이 그 특징이었다. 1840년대 중반의 재림 운동 체험을 통해서 그들은 기성 개신교가 그 신조의 말뚝을 든든히 박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교훈된 위대한 진리들로부터 돌아서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이들 재림교인 상당수는 성경으로부터 솟아나온 소망인 재림의 소망 때문에 그러한 교회들로부터 내쫓김을 당했다. 그들은 이전의 형제들이 성경 진리를 붙잡고 설명하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보아 왔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교회를 형성하고 조직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셋째 천사의 기별이 전파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조직의 필요성은 진전되기 시작했고, 1850년 1월에 엘렌 G. 화잇은 안식일 준수 재림교인들이 그들의 사업을 질서 있게 운영해야 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것은 완전한 질서 속에 있기 때문이다”(MS 11, 1850).
교회를 조직하려는 열렬한 노력이 1850년대에 널리 퍼졌다. 그것은 1860년에 이루어진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라는 이름의 선택, 1861년에 이루어진 지역 교회와 지방 합회를 조직하려는 계획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고 1863년, 지방 합회들은 함께 결속하여 대총회를 이루게 되었다. 어떤 신조를 형성하는 길로 첫 발걸음을 내딛지 않도록 지극히 유의하였는데, 이는 교회가 신조의 말뚝을 든든히 박아 놓고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 연구와 예언의 신의 계시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섭리를 따르기가 쉽지 않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교회 질서 확립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를 회고하는 탁월한 진술이 46-52쪽에 나타나 있다.
1863년에 대총회를 조직할 때, 세 사람으로 구성된 대총회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교회의 주요 관심사는 여러 개의 지방 합회들과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 위치한 출판소였다. 전도 분야에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목사들이 점점 더 성공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업은 주로 복음 기별의 독특한 진리들을 설교하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 안식일, 죽은 자의 상태, 재림, 성소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기타 주요 성경 진리들을 두고 토의와 토론을 벌이는 일에 빠져들었다. 그러한 토론에 빠진 많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기를 신뢰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마음속에는 안전과 자립과 논쟁의 정신이 자리잡게 되었다. 곧 이러한 정신은 불건전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기관의 발전
대총회 조직에 이어 제도상의 발전이 신속히 이루어졌다. 1865년 12월, 엘렌 G. 화잇에게 주어진 계시 속에서 의료 기관의 필요성이 보여졌고, 이에 응하여 지도자들은 1866년 9월, 배틀크릭에 소규모의 건강 기관을 설립하였다. 그 후로 십년이 지나지 않아 엘렌 G. 화잇의 펜으로부터는 학교가 필요하다는 기별이 흘러나왔다. 1874년에 배틀크릭 대학이 세워졌다. 이렇게 해서 배틀크릭에서 세 가지 주요 기관이 신속히 발전하게 되었으며,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급성장하고 있는 교단의 중심지로 점점 더 많이 몰려들게 되었다. 사업에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 기관의 사업을 돌보기 위해 초빙되었다. 사업적 관심이 팽창되고 발전되며, 사업이 번영함에 따라 이러한 인물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도의 기별보다는 자신의 사업적 수완을 더욱 신뢰하기에 이르렀다.
십년도 되지 않아서 교단은 예언의 신의 원칙 위에 세워진 교육 프로그램과 세속적인 정책과 방법에 물든 인물들이 지도하는 세상의 교육 프로그램 사이의 이해 관계를 놓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은 주로 자수 성가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헌신적이고, 재능과 기술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책을 읽어보면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학문적 배경의 제한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겸손한 편이었다. 1880년 초에 학위를 가진 어떤 교육가가 그들 속에 들어왔을 때, 그를 교육 사업의 지도적 위치로 떠받들어 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교리와 역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면서도 크게 신임 받는 위치로 급격히 부상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지워 준 책임을 위해 준비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
문제는 지극히 심각해져서 배틀크릭의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편이 갈라졌다. 어떤 이들은 학위를 가진 그 교육가의 지도력에 휩쓸리고 말았으며, 반면에 어떤 이들은 예언의 신의 권면 속에 제시된 것들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로 대학과 그 일에 관여한 이들은 불행한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배틀크릭 대학은 1년간 문을 닫았다. 그들의 발언과 취한 입장은 적지 않은 지도자들과 교인들에게 그 흔적을 남겼다.
바로 이 기간에 교회증언 5권, 20-105쪽의 기별이 출판되었다. 처음에 그것은 배틀크릭 교회를 위한 증언이란 이름으로 된 소책자였다. 이 소책자는 후에 제5권 속에 재발행된 내용뿐 아니라 배틀크릭의 인물들과 상황들에 관한 좀더 개인적인 언급들을 담고 있었다. 그 당시의 분위기를 알려면 표제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두번째 장, “우리 대학”은 “교과서로서의 성경”, “대학의 목적”과 “대학의 교사들”이라는 소제목을 갖고 있다. 그 다음 장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부모로서의 훈련”, “중요한 증언”, “무시된 증언들”, “우리 대학의 교역자들”, “정죄받는 시기심과 헐뜯음”.
당시는 어려운 때였으며, 엘렌 G. 화잇은 다음해에 배틀크릭에서 열린 1883년 대총회 회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일련의 아침 예배를 통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목사들에게 실제적인 노선에 관해 충고하였다. 의미 심장하게도 그 중 하나가 “그리스도 우리의 의”였다[가려뽑은 기별 1권, 350-354쪽(영문) 참조]. 이러한 역사적 환경이 본서에서 발견되는 엘렌 G. 화잇 권면들의 배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괄목할 만한 발전기였던 1880년대
1874년에 교회는 대학을 건축하고 있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앤드루스(J. N. Andrews)를 유럽으로 파송했지만,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괄목할 만한 선교 발전과 기관 발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882년에 새로 두 개의 학교를 시작했는데, 하나는 캘리포니아 주의 힐즈버그(Healdsburg, California) 에서, 또 하나는 매사추세츠 주의 사우드 랭카스터(South Lancaster, Massachusetts)에서였다. 1885년, 스위스의 바젤(Basel, Switzerland)에 신축된 중앙출판소(Central Publishing House)에서 출판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 해에 교역자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파송되어 멜버른(Melbourne)에 에코 출판소 (Echo Publishing Company)가 곧 세워졌다. 1885-1887년에 엘렌 G. 화잇은 유럽에 머무르면서 국가들을 방문하며 그 곳의 사업을 굳건히 하고 격려하였다.
우리는 교단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어떤 면들을 회고해 볼 때, 의의 세력과 악의 세력 사이에 쟁투가 벌어졌었다는 사실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된다. 등장한 교회는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진리를 지닌 예언상의 남은 교회였다. 대적은 사업을 무산시키기 위해 자기 세력 안에서 모든 힘을 기울였다.
1888년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의 배경
원수의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는 좋은 사람들을 이끌어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사랑하는 사업을 방해하는 입장을 취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모습은 토의와 토론에 참석한 이들의 심령 속에 계발된 정신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사업과 관련된 이들의 체험 속에서도 이런 모습은 나타났다. 새로운 나라로 나간 선교사들의 체험 속에도 이것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사업에 대한 좁은 안목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노선 속으로 전진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광범위한 선교 사업의 사소한 일까지도 배틀크릭 지도자들의 지도를 받으려는 어떤 이들의 경향 속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었다. 막중한 기관 사업을 지고도 자신이 거의 알지 못하는 원방의 사업을 위해 상세한 지시를 내리려고 한 배틀크릭 지도자들의 모습이 이러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1887년 말로 접어들면서 전세계 신자수 25,841명, 북미에 26개 합회와 1개 대회, 해외에 6개 대회를 갖게 되었다. 대총회 위원회는 7인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위원회는 1882년에 3인에서 5인으로, 1886년에 5인에서 7인으로 조심스럽게 확대되었다. 사업상의 법적 문제를 돌보기 위해 5인의 이사회를 갖춘 대총회 협회(the General Conference Association)가 조직되었다. 다양한 사업 분야 때문에 “국제 안식일학교협회”, “건강과 절제협회”, “국제 소책자와 선교협회” 등 어느 정도 자율적인 기구들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1885년 중반기부터 1887년까지 엘렌 G. 화잇은 유럽에 가 있었다. 이제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 주의 힐즈버그에 있는 자기 집에 거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미시간 주 배틀크릭의 리뷰 앤드 헤랄드(the Review and Herald) 와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의 패시픽 프레스(the Pacific Press) 등 두 개의 출판소가 가동중이었다. 두 출판소 모두 상당량의 상업적인 일을 했는데 그것은 설비와 인원을 제대로 갖추어 교단의 인쇄물을 공급하는 데 필요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두 곳 모두 주요 정기 간행물을 발행했는데, 배틀크릭에서는 리뷰 앤드 헤랄드가, 오클랜드에서는 사인즈 오브 더 타임즈(Signs of the Times)가 나왔다.
이전의 1, 2년 동안 두 간행물은 갈라디아서의 율법에 관해 서로 다른 의견을 발표하였다. 두 간행물 편집인들은 상반되는 입장을 옹호하였다. 당시에 스위스에 주재하고 있던 엘렌 G. 화잇은 사인즈 오브 더 타임즈 편집인들에게 쟁점이 되는 기사들을 게재하지 말도록 권면하였다. 이 기별은 저술가와 편집인에게 보내는 권면(Counsels to Writers and Editors), 75-82 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88년의 대총회
1888년의 대총회 총회는 10월 17일부터 11월 4일까지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되었다. 대총회가 열리기 전의 1 주일간 성경 연구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훈족 혹은 알레마니가 다니엘 2장과 7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13장의 열 나라 중에 포함되는가에 관해 토의하였다. 리뷰 앤드 헤랄드의 편집인 우라이아 스미스(Uriah Smith)와 사인즈 오브 더 타임즈의 편집인 존스(A. T. Jones)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패시픽 프레스의 와그너(E. J. Waggoner)는 속죄론과 하나님의 율법에 관해서, 존스 목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해서 성경 연구회를 인도하였다. 이상의 연구회는 대총회 회기 중에도 계속되었으며, 때때로 심각한 토론이 벌어졌다. 어떤 목사들은 진리를 연구하기보다는 특별한 문제들을 토론하기 위해 대총회에 참석했다. 엘렌 G. 화잇은 그 곳에 참석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심령과 마음을 열고 이상의 연구에 참여하라고 호소했다. 그는 기도하면서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들을 연구하라고 말했다.
여하튼 문제들은 특정인과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들의 심령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에 큰 감동을 받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생애를 개인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배틀크릭 지도자들의 편에 가담하여 제시된 어떤 교훈들을 위험스럽게 여겼다. 대총회가 마쳤을 때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축복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연설을 인쇄하는 관습이 없었기 때문에 엘렌 G. 화잇 외의 다른 사람들이 한 설교는 전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대총회 회보가 간행되었지만 그것은 대총회 행사 소식과 사업 보고를 담은 간단한 용지에 불과 하였다. 토의된 성경상의 문제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그 총회에서 올슨(O. A. Olsen)이 대총회장으로 피택되었지만, 그는 대총회중에 유럽에 있었다. 1888년 11월 27일, 대총회 위원회의 위원인 윌리암 C. 화잇(William C. White)이 올슨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총회가 끝날 때 대표자들은 매우 다른 인상을 갖고 헤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참석했던 것 중 가장 유익한 집회 중 하나였다고 느꼈고,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열린 것 중 최악의 총회였다고 느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상이한 태도들
엘렌 G. 화잇은 다음 2 년간 교회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교회와 합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중요한 기별을 좀더 깊고 충분하게 이해하도록 노력했다. 그는 이 성경 진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진리”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체계 가운데 있는 옛 진리”라고 말했다〔엘렌 G. 화잇, 리뷰 앤드 헤랄드, 1889. 7. 23., 가려뽑은 기별 1권, 355쪽(영문)에 재인쇄됨〕.
그는 1889년 10월 18일부터 11월 5일까지 배틀크릭에서 개최된 그 다음의 대총회 회기중에 다음과 같이 보고할 수 있었다. “이번 집회에서는 미네아폴리스 집회에서 볼 수 있었던 그러한 정신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원만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많은 수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새벽 5시에 열리는 집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으며 집회의 성과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내가 들은 바 모든 간증들은 고상한 성격의 것이었다. 저들은 지난 일년 동안의 생애가 저희 평생에 가장 아름다운 해였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쳐 준 빛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라는 진리의 빛이 뚜렷하고 분명한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가진 바 모든 체험들은 매우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두 날만을 제외하고는 나는 모든 아침 집회에 참석하였다. 8시에 존스 형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설교하였으며 깊은 관심이 표명되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크게 증가한 것을 볼 수 있었다”[원고 10, 1889., 가려뽑은 기별 1권, 361쪽(영문)].
불행스럽게도 대총회와 배틀크릭에 있는 우리 기관들의 지도자 중 여러 명이 그 반대편에 서서 교회의 심장부에 강력한 저항선을 구축하였다. 수년 이내에 이 진영에 섰던 많은 이들은 자신의 과오를 인식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하였다. 그러나 완고하게 저항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교회와 우리 기관의 사업상 요직에 있으면서 1890년대 내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895년, 이런 인물들에 관해 엘렌 G. 화잇은 본서 363쪽에 기록된 것과 같은 말을 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는 어떤 이들에게 무시당해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정신과 전 생애의 체험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본서 76쪽 이후로 미네아폴리스와 그 여파, 그리고 관련된 인물들의 경험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할 것이다.
1888년 회기 때에 대총회 위원회는 현저하게 탈바꿈했다. O. A. 올슨은 조지 I. 버틀러(George I. Butler)를 이어 대총회장직에 취임하기 위해 유럽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버틀러 목사는 질병에 걸렸으며, 미네아폴리스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논의 중인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편에 서 있었다. 그는 휴직하여 병든 아내를 십년 이상 돌본 후에 다시 복직하여 교단 안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올슨 목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찬성하고 예언의 신의 권면을 언제나 충실하게 따르는 인물인데, 그는 배틀크릭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급속한 기관의 발전, 그리고 다른 곳의 사업을 희생하고 배틀크릭 사업을 확장함으로 야기되는 문제들이 특히 어려웠다.
통합과 그에 따른 문제들
1889년 대총회 때, 2대 출판소-곧 배틀크릭의 것과 태평양 연안의 것 운영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을 고려하였다. 교단의 출판소 사업 통합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도록 21인 위원회가 위촉을 받았다. 동일한 조치를 유사한 기관에 대해서도 고려하였다. “우리의 모든 교육 사업을 통제하고 자산을 소유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한 곳에서 경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건강 기관들도 그렇게 통제해야 한다”(대총회 회보, 1889. 11. 6., 149쪽). 이 위원회는 1891년 회기에 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제시된 계획안에 따르면 대총회는 교회의 법적 권익을 위해 조직된 법인체이므로 대총회가 모든 출판 사업을 인수하고 한 곳의 본부로부터 출판소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협회가 더욱 크게 사업을 관장하게 되기 때문에 위원 수도 21인으로 증강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대총회는 이 계획안을 받아들였다.
그 이후의 기록들을 보게 되면 여러 다른 위원회가 경영했던 교회의 전 세계적 사업을 통합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져서 21인 위원회를 두고 있는 대총회 협회의 지휘 아래로 들어오게 되었다.
대총회 위원회를 이끄는 이들이 마찬가지로 대총회 협회를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두 곳의 위원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사무는 배틀크릭의 소수가 주로 관장했는데, 이들 중에는 그 곳에 있는 기관의 사업적 이익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통합을 위해 고려된 모든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았지만 통합을 향한 일련의 움직임은 시작되어 대총회 협회가 전세계의 출판소, 소책자협회, 교육 기관, 위생병원 등의 재정적 의무를 짊어지는 일이 실현되기에는 충분했다. 위원회 위원 전원의 참석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전세계 사업의 유익에 영향을 끼치는 일상적 결정이 배틀크릭에 있는 4인, 5인, 혹은 6인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손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엘렌 G. 화잇은 자신의 서신들을 통해서 통합을 향한 움직임과 하나님의 시인을 받지 못한 기타의 움직임들에 대해 항의하였다(엘렌 G. 화잇 자서전, 319-330쪽의 “하나님의 사업에 세속적인 정책을 채용하는 일의 위험성”을 참조할 것).
배틀크릭에 있는 기관들과 대총회에 관련된 상황은 1895년에 기록된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지니라”는 기사에 잘 요약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본서 360-364쪽에 수록되어 있다. 독자들은 이것을 유의하여 정독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대총회와 대총회협회의 회장인 올슨 목사에게 보낸 엘렌 G. 화잇의 통 신문들은 전세계에 걸친 교단적 사업에 그토록 긴밀한 영향을 미치는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수많은 견책의 기별을 담고 있었다. 올슨 목사에게 보낸 이러한 많은 교훈들을 목사에게 보내는 증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그는 기별들을 인쇄하여 교훈과 경고의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보낼 수 있도록 했다.
광범위한 출판소 문제들
불행히도 우리의 출판 사업이 초기에 편법의 길을 택하여 상업적인 일에 손을 댐으로 그 기관들은 단순한 인쇄 업무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상업적인 인쇄물이 최대 70퍼센트, 교단 인쇄물이 30퍼센트에 이르기까지 했다. 출판소의 재정적 책임을 진 인물들은 그들이 관리하는 사업을 인쇄소 사업으로 상상하였으며, 그 결과 교회 출판소에서 결코 인쇄할 수 없는 성격의 원고들을 출판하게 되었다(교회증언 7권, 161-168쪽의 “상업적인 사업”과 가려뽑은 기별 2권, 350, 351쪽(영문)의 “최면술에 관한 서적 출판에 대한 권면”을 참조할 것).
동시에 출판 사업의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여러 인물들은 우리 기관을 다스려 온 보수에 관한 중대한 기본 원칙으로부터 돌아섰다. 그들은 사업이 번영 상태에 있게 된 것은 경영 전선에서 봉사하는 이들의 특별한 수완과 재능 덕분이라고 생각하여 경영자의 지위에 맞게 특별 보수를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주요 직위의 어떤 인물들은 노련한 작업실 교역자보다도 두 배의 보수를 받았다.
이와 동일한 정신 때문에 배틀크릭에 있는 출판소 경영진은 출판소가 취급하는 서적들을 통제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했고, 그 결과로 그 곳에서 간행하는 서적의 저작자들에게 지불해야 할 정당한 인세를 삭감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식으로 출판소의 수입은 증가되었다. 출판소 경영진은 개인 저작자들보다도 사업에 필요되는 것들을 더 잘 이해할 뿐 아니라 서적에서 나오는 이익금을 사용하는 법에 대해서도 더 잘 아는 직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저작자들이 자신의 수입에 대해 올바른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느꼈다. 경영의 책임을 맡은 이들에게 보내는 여러 서신 속에서 엘렌 G. 화잇은 이기심 때문에 그러한 계획들이 추진되었다고 지적했다. 이 방면의 권면은 교회증언 7권, 176-180쪽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총회장이 증언들을 발간하다
움켜쥐려는 이기적인 수단들의 영향과 엘렌 G. 화잇이 그것을 가리켜 일컬은 바 “왕 같은 권력”의 행사는 전염성이 있었다. 대총회장 올슨 목사는 그러한 악한 영향력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으로 이 심각한 때에 자신과 배틀크릭의 다른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많은 권면의 기별들을 교회 목회자들이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소책자 형태로 발간된 이 기별들은 목사들과 교역자들에게 대한 특별 지시로 발송되었다. 이것들은 때때로 대총회장이나 위원회의 서명을 담은 간절한 글을 서두에 싣고 있었다. 이 소책자들은 호수가 기재되었는데, 그 중 1892년경에 기록된 제2호의 서문에서 올슨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엘렌 G. 화잇 자매의 최근 기록 중에 미발간 내용 몇 가지를 그대에게 보내 주고, 이미 발간된 저술들 중에서 몇 가지 중요한 것을 발췌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진리들이 그대 심령 속에서 새롭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심사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
지난 3년간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목사들과 백성들에게 강력히 역사하셔서 자기 의의 옷을 벗어 버리며,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이르러 오는 의를 추구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꾸물대며 주저했던가. …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증언과 열렬한 호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응답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보내신 증언과 경고의 말씀을 거리낌없이 비평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걱정스럽기 짝이 없는 냉랭한 마음과 메마른 심령이다.
지금이야말로 경고의 음성을 드높여야 할 때가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각 사람이 이것들을 깊이 생각하여 ‘내가 이런 인물이 아닌가?’ 라고 질문해야 할 때가 아닌가? …
다음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의 위험들이 결코 오해할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지적되고 있다. 하나님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 전심으로 그분을 찾을 것인가, 혹은 이 경고들을 우리가 과거에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등한시하고 무시할 것인가, 이것이 남아 있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고 계시므로 우리는 지체하지 말고 응답해야 한다.”
1896년 11월 22일에 간행된 이 소책자 제6호에서 올슨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서언을 썼다.
“지난 수개월 동안 나는 엘렌 G. 화잇 자매에게서 나와 우리 모든 교역자들에게 매우 가치 있는 서신들을 많이 받았다. 현대 진리의 사업과 관련된 모든 교역자들이 그 교훈들을 받음으로 개인적 유익과 임무 수행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을 확신함으로 나는 그것들을 수집하여 그들의 유익을 위해 이 소책자에 담았다. 본서를 기도하며 주의 깊게 연구하라는 부탁의 말이 불필요할 것 같다. 내가 알기로는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엘렌 G. 화잇이 그렇게 각성시키는 책망과 견책의 기별을 기록하는 일이나, 수신자가 그것을 개인 체험에 적용시켜 제시된 대로 바로잡는 것은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기별들은 모든 목회자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대총회장과 대총회위원회에 의해 1890년대에 소책자로 발간되었다. 그 후 이것은 1923년판 목사에게 보내는 증언으로 재출판되어 하나님 사업의 이익을 심각하게 거스리는 위험들에 대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목사와 행정자들을 일깨웠다.
엘렌 G. 화잇은 모든 목사와 행정자들이 견책의 기별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겸비한 마음으로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인해 내 마음은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그들은 학식이나 웅변보다는 훨씬 뛰어나게 가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171쪽). 본서 곳곳에서 그는 그릇된 노선을 취한 “어떤 이들”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기별에 응답하지 않는 “어떤 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왕적 권세”와 권위를 행사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인간은 사업의 모든 세밀한 데까지 동료 인간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권면은 정신과 행동의 독립에 관한 권면들과 조심스럽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318-320쪽 참조). 합회장을 신뢰하고 지지해야 할 것이 강조되고 있다(330, 331쪽 참조).
이상 우리는 1890년대와 목사에게 보내는 증언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세기말에 계속적으로 전도적·기관적·선교적 프로그램을 확장하기 위해 뻗어 나갈 때 상황은 매달, 매해마다 악화되어 갔던 것이다.
1901년의 대총회
엘렌 G. 화잇은 9년간의 오스트레일리아 봉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배틀크릭에서 열린 1901년 대총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십년 기간에 이것이 그가 참석한 첫 회의였다. 대총회장 어윈(G. A. Irwin)이 개회사를 한 후, 엘렌 G. 화잇은 말하기를 원하여 회중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배틀크릭의 소수 인사가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수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이 제한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열렬하게 연설했다. 그는 모든 사업 국면에서 자기들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다른 이들에게 억지를 부림으로 그들 자신뿐 아니라 사업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증거했다. 그는 사업 수행에 필수적인 헌신하는 정신이 책임진 자리에 있는 어떤 이들에게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회의에서 그는 외쳤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재조직이다. 우리는 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다른 원칙을 세우기를 원한다”(대총회 회보, 1901. 4. 3.).
그 후 3주일간에 벌어진 일은 놀라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기별에 유의하였다. 조심스럽게 형제들은 사업을 추진하였다. 지역 합회들을 작은 단위로 묶어 연합회가 형성되었으며, 일선 인사들이 책임을 수행했다. 안식일학교 사업과 가정 선교 사업처럼 전체 교회 활동의 분야를 대표하던 여러 협회들이 차례로 대총회 부서가 되었다. 13인으로 구성되었던 대총회위원회는 25인으로 확대되었다. 1903년 위원회는 더욱 크게 확장되어 대총회의 새로 조직된 부서의 임원이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1901년 대총회 전에 소수 인원들이 수행했던 책임들을 500명이 수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재조직을 통해 지역 일선에 있는 이들이 책임진 사업과 관련해서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매우 든든하게 기초가 놓여졌기 때문에 계속적인 성장을 이룩함에 따라 교단은 별 문제 없이 대총회의 지회들을 갖게 되었다. 이 계획 속에서 광대한 세계 지역이 하나로 묶여졌으며, 연합회는 지회를 이루는 구성 단위가 되었다.
배틀크릭의 기관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
불행하게도 엘렌 G. 화잇이 1901년 대총회에서 외친 모든 권면을 사람들이 따랐던 것은 아니다. 배틀크릭의 2대 기관은 마땅히 이뤄져야 할 변혁을 거부하였다. 채 1년도 지나가기 전인 1902년 2월 18일 밤에 위생병원이 불에 탔다. 1902년이 지나가기 전에 출판소도 역시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교단이 겪은 이 엄청난 재산 손실은 주신 기별에 주의를 기울이고 따라가기를 거부함으로 자초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식되었다. 경고의 말씀이 울려 퍼졌지만, 그것은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 누구도 오해할 수 없도록 말씀하셨던 것이다.
교회 본부는 문제성이 있는 배틀크릭으로부터 이전하여 하나님의 섭리 속에 워싱턴 D. C.에 자리잡게 되었다. 출판소가 국가의 수도에 다시 세워졌고, 지도자들은 교회 기별을 출판하는 일에만 시간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다. 위생병원은 배틀크릭에 재건되었으나 불행하게도 그 엄청난 자산은 곧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세계 본부들이 타코마 파크(Takoma Park)로 이전됨에 따라 배틀크릭은 교단의 중심지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가 잊지 않는 한”
본서의 마지막 부분은 1907년과 1914년에 기록된 서신들을 주로 수록하고 있다. 엘렌 G. 화잇은 “관계에 있어서 필수적인 원칙들”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특히 “우리의 왕이신 여호와” 기사에서 그렇게 했다. 이 기별은 1907년 8월에 열린 남 캘리포니아 야영회에서 그가 읽은 것이다. 또한 1907년 1월에 열린 캘리포니아 합회 회기 동안에 그가 읽은 “개인적 책임과 교회의 연합”이란 기사도 있다. 이 기사들은 본서의 주요 주제를 망라하는 요점들을 요약하고 있다. 이 권면의 말씀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원칙들을 시야에서 상실할 경우에 교회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으며, 인류는 망각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배틀크릭에서 범한 과오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열렬한 노력이 있었다. 화잇 부인은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오신 길을 망각하지 않는 한 미래에 대해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기록했다(51쪽). 교회의 행정자들과 목회 교역자들은 이전에 범한 과오들을 회피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러한 경고와 권고의 기별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좀더 구체적인 경고와 관련하여 일반적인 경고의 기별이 주어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목사 직무가 지닌 탁월한 도덕적·영적 수준에 관계된 것들이다.
목양자와 행정가들의 심령을 상세히 취급하고 있는 본서의 기별들은 기록된 것과 같은 상황이 또다시 존재한다면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견책의 말씀을 어느 때든지 모든 목사에게 적용시키려고 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된다. 또한 여러 해 동안의 문제와 위기에 대해 잘 알게 됨으로 하나님의 사업이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둘 것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흐려져서도 안 된다.
인간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비밀과 인류가 지닌 약점과 결점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엘렌 G. 화잇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교역자들에 대해 신뢰심을 잃지 않았다. 그는 과오를 범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견책의 기별을 보내신 사실을 그들을 버리시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으로서 생각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악의 세력과 의의 세력 사이의 전투에서 사업이 뒤로 후퇴한 것과 관련해서도 그는 낙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에 기초를 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항상 승리하는 터전 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가려뽑은 기별 2권, 397 (영문).],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분의 백성을 지도하시며, 끝날까지 그들과 계속해서 함께 계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엘렌 G. 화잇 자서전, 394).
본 서론부는 독자들에게 본서 내용의 역사적 배경을 알려 주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사건 당시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본서에 나오는 특정 체험과 움직임, 기관에 대한 수많은 언급이 좀 모호한 듯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한 언급들에 대해서는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부록에 설명을 수록했다.
이미 주어진 권면들의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엘렌 G. 화잇 저서관리위원의 사업이 아니다. 독자들이 저서들을 좀더 잘 이해하여 제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특정 상황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제시하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다른 권면들을 제시하는 것은 그들의 특권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이런 일이 성취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들 아래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고귀한 사업을 마치기 위해 승리를 향해 전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엘렌 G. 화잇 저서
관리위원회
워싱턴 D. C.
1962년 5월 10일”(목사, xxx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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