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들타운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의 괴로운 의무가 저절로 주어졌다. 영혼들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는 어린 헨리를 데리고 다니는 일을 희생함으로 사업에 아낌없이 전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건강이 좋지 못했으므로 그가 필연적으로 나의 시간의 상당한 부분을 빼앗았다. 그것은 괴로운 시련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가 나의 의무의 길을 방해하게끔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가 심한 병에 걸렸을 때 주님께서 그를 살려 주셨다는 것을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방해가 되도록 허용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내게서 옮겨 버리실 것이라고 믿었다. 주님 앞에서 홀로, 가장 괴로운 심정과 많은 눈물로, 나는 희생을 치렀다. 그리하여, 당시에 한 살에 불과한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다른 사람이 어머니의 감정을 그에게 나타내고 어머니의 몫을 하도록 주었다. 우리는 가장 신임하는 하우랜드 형제의 가정에 그를 떼어놓았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사업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하고자 기꺼이 그 짐을 지게 되었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돌보는 것보다 헨리를 더 잘 돌볼 수 있을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정된 가정을 갖고 훌륭한 양육을 받는 점에 있어서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내 아이를 두고 떠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를 떠날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난 슬픈 표정은 밤낮 내 앞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으로 나는 마음속에서 그를 쫓아내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활동하고자 노력했다. 하우랜드 형제의 가정에서 5년 동안 헨리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다.
제 12 장
출판과 여행
1849년 6월. 코네티컷 주 로키 힐에서 한동안 살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열렸다. 7월 28일에, 이 곳에서 우리의 둘째 아이 제임스 에드슨이 출생했다.우리가 이 곳에 살고 있는 동안에, 나의 남편은 현대 진리를 기록하여 출판하는 것이 그의 의무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하기로 작정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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