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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의료선교사들과 그들의 사업*

가르치는 일과 치료하는 일

그리스도께서 열 두 제자들을 최초의 선교여행에 내어 보내시면서 그분께서는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명령하셨다(마 10:7, 8).
그 후에 파견한 70인에게 그분께서는 “어느 동리에 들어가든지 …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0:8, 9).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므로 “70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고 하였다(17절).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동일한 사업이 계속되었다. 예수님 자신의 봉사사업의 장면이 되풀이되었다.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 5:16).그리고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셨다(막 16:20).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5-8).
제자들의 사업그의 이름으로 된 복음서의 기자, 누가는 의료 선교사였다. 그는 성경에서 “사랑을 받는 의원”(골 4:14)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의사로서의 그의 기술에 대한 소문을 듣고, 주심께서 그에게 특별한 사업을 맡겨 주신 사람으로 알고 그를 찾았다. 그는 그의 협력을 얻게 되었으며, 얼마 동안 누가는 이곳 저곳으로 다니는 바울의
여행에 동행하였다. 얼마 후에 바울은 누가를 마게도니아에 있는 빌립보에 남겨두었다. 여기에서 그는 여러 해 동안 의사와 복음의 교사로서 계속해서 일하였다. 의사로서 일을 하면서, 그는 병자들에게 봉사하였고, 그 다음에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이 임하도록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복음 기별을 위한 길이 열렸다. 의사로서 누가가 거둔 성공은 이방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많은 기회를 그에게 주었다. 제자들이 일한 것처럼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육신적 치료는 복음 사명과 관련되어 있다. 복음사업에 있어서, 가르치는 일과 병고치는 일은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제자들의 사업은 복음의 지식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신 복된 소식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사업이 위탁되었다. 그들은 그 사업을 그 당시의 사람들을 위하여 성취하였다. 복음이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에 단 한 세대 동안에 전해 졌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위탁하신 사업이다. 복음은 세상의 죄와 불행을 제거해 주는 유일의 해독제(解毒劑)이다.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기별을 알려 주는 것이 그 치료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들의 첫째 과업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 기별을 주어서 제자들을 내보내실 당시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세상에서 거의 떠나갔다. 여호와의 지식을 가졌노라고 공언한 유대 백성들 사이에도 그분의 말씀은 유전과 인간적 이론 때문에 무시당하였다. 이기적 야망, 허영에 대한 사랑, 이득에 대한 탐욕 등이 사람들의 생각을 빼앗았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떠나가자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도 사라졌다. 이기심이 지배적 원칙이 되고, 사단이 인간의 불행과 타락에 그의 뜻을 행사했다.
사단의 대리자들이 인간을 사로잡았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도록 창조된 인간의 육체는 마귀의 소굴이 되었다. 사람의 감각과 신경과 기관들은 가장 타락한 정욕의 방종에 있어서 초자연적 능력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바로 마귀의 인이 인간의 얼굴에 찍혀졌다. 사람들의 얼굴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악의 군대의 표정을 반사하였다.*
오늘날의 세상에 있는 상태는 어떠한가? 성경을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 당시의 유전과 유대의 율법주의로 파괴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고등 비판과 인간적 이론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파괴되고 있지 않는가? 탐욕과 야망과 쾌락을 사랑하는 일은 그 당시와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강력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고 있지 않는가? 믿노라고 공헌하는 그리스도교계, 심지어 믿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까지도 그리스도인 원칙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가. 사업, 사교적 모임, 가정, 심지어 종교적 모임에서까지도 그리스도의 교훈을 일상생활의 법칙으로 삼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가.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 … 악을 떠나는 자가 약탈을 당하는도다”고 한 말이 사실이 아닌가?(사 59:14, 15).우리는 어디에서나 사려 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범죄의 전염병”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만연되고 있는 부패는 사람의 필력(筆力)으로 묘사할 수 없다. 매일 정치적 투쟁, 증회(贈賄), 사기 등이 새롭게 폭로되고 있다. 매일 폭력과 불법,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사람의 생명에 대한 잔인성과 극악한 파멸 등에 대한 가슴 아픈 기록이 전달된다. 매일 정신이상, 살인, 자살 등이 증가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 사단의 부하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하여 마음을 괴롭히고 부패케 하며, 육체를 더럽히고 파괴시키는 활동을 증가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그런데 세상이 이와 같은 악으로 충만해 있는 한편, 복음은 너무도 흔히 사람들의 양심과 생애에 별반 감동을 줄 수 없을 정도의 무관심한 방법으로 제시된다. 도처에서 그들이 소유하고 있지 않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죄를 정복하게 해 줄 능력, 그들을 악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 줄 능력, 건강과 생명과 평안을 가져다 줄 능력을 갈망한다. 한 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깨달았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생활해 왔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한다.
오늘날 세상은 1900년 전에 필요했던 그리스도의 계시가 요망된다. 위대한 개혁사업이 요구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육체적, 정신적, 영적 회복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사람들을 접촉할 때 참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소원하는 분으로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보여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시고,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후에 그분께서는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개인적 노력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해 갈 필요가 있다. 설교하는데 시간을 더욱 적게 쓰고, 개인적 봉사에 많은 시간을 썼을 것같으면, 더욱 큰 결과가 나타났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구제를 받고, 병든 사람들은 간호를 받고, 슬픔과 사별(死別)을 당한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무식한 사람들은 가르침을 받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권면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해야 한다.
설득력과 기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수반될 때, 이 사업은 결실이 없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없을 수도 없다.
우리는 의료선교사업의 목적이 죄로 병든 남녀들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갈바리의 사람을 가리켜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들은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병들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라고 권면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육신과 영혼의 질병으로 낙심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대한 의사, 그리스도를 언제나 제시해야 한다. 그들에게 육체적 질병과 영적 질병을 아울러 치료해 줄 분을 가르쳐 주라. 그들에게 그들의 연약함을 느끼시고 동정하시는 분을 이야기해 주라. 그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그들에게 영생이 되게 해 주신 분의 보호에 그들 자신을 맡기도록 권면하라.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분의 구원의 능력에 관하여 말하라.
이것이 의료 선교사의 고상한 의무이며 귀중한 특권이다. 그리고 개인적 봉사가 이따금 이 사업을 위한 길을 마련해 준다. 이따금 하나님께서는 육체적 고통을 제거해 주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접촉하신다.
의료선교사업은 복음의 개척 사업이다. 말씀을 전하는 활동과 의료선교사업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고 실천되어야 한다.거의 모든 지역사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거나 어떤 종교적 예배에 참석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만일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 지면 그 복음은 그들의 가정으로 틀림없이 전달된다. 때때로 그들의 육체적 필요를 해결해 주는 것이 그들과 접촉할 유일의 길이 된다. 병자들을 간호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는 선교 간호원들은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고 구주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정욕을 타락시킨 식욕을 지배할 힘을 소유하지 못한 속절 없는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은 실패하고 낙담한 사람들의 생애에 희망의 빛을 비춰줄 수 있다. 사심없는 친절한 행동 속에 나타난 그들의 이타적 사랑은 고통당하는 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쉽게 믿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신임마저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동정해 주고 도와 주는 행동에는 감사한다. 어떤 사람이 세속적 칭찬과 보수를 전혀 바라지 않고 집에 찾아 와서 병자들을 간호해 주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 주고, 벗은 자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분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인간 일꾼은 다만 그분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 사람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게 된다. 감사한 마음이 솟아나고, 믿음이 타오르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봐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의 말씀이 펼쳐질 때 그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이루게 된다.외방 선교사업이나 본국 선교사업이나 간에 남녀를 막론한 모든 선교사들이 병자들에게 봉사할 수만 있으면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욱 쉽게
접근하고, 그들 자신의 유용성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교의 지역에 선교사로 가는 여인들은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다른 문들이 닫혀 있을 때 이와 같이 함으로써 그 지역의 여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복음 사역자들은 고통을 없애 주고 질병을 제해 주는 간단한 치료법을 알아야 한다.
건강 원리를 가르침
복음 사역자들은 건강 생활의 원리에 관하여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곳에나 질병이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건강 법칙에 유의함으로 예방할 수 있는 질병이다. 사람들은 건강 원리가 이생과 내세의 생활을 막론하고 그들의 복리에 미치는 영향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인간의 육체를 그들의 창조주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곳으로 만들 책임이 있다는 것과, 그것으로써 그분께서는 그들을 충실한 청지기가 되게 하시고자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진리로써 감명을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여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수천 명의 사람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간단한 방법, 곧 독한 약을 사용하지 않고 치료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요구하며, 그 가르침을 기꺼이 받고자 한다. 식사의 개혁에 관한 가르침이 크게 필요하다. 그릇된 식사 습관과 불건전한 음식물의 사용은 세상을 비참하게 만드는 부절제와 범죄와 불행에 대하여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건강 원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개혁의 위대한 목적, 곧 그 목적이 몸과 마음과 영혼의 최고의 발달을 이루어 주는데 있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하라.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법칙이므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마련된 법칙이라는 것과 그 법칙에 순종할 때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 증진되고 내세를 위한 준비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라.
천연계의 활동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의 표현을 연구하도록 사람들을 지도하라. 놀라운 기관, 곧 인간의 육체와,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을 연구하도록 그들을 지도하라.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깨닫고 그분의 법칙의 지혜와 은혜에 대한 것과 순종의 결과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견해에서 그들의 의무와 책임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건강 법칙의 준수를 희생과 자제의 문제로 생각하는 대신에, 그들은 사실 그대로 그것을 헤아릴 수 없는 축복으로 간주할 것이다.
모든 복음 사역자는 건강 생활의 원리를 교육시키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사업의 일부임을 느껴야 한다. 이 사업은 크게 필요하며, 세상은 그 일을 위하여 문이 열려 있다.
어디에서나 단체의 사업이 개인의 노력을 대신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지혜가 통합하고, 한 곳으로 집중되고 큰 교회들과 기관들을 세우는 데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선사업을 기관과 조직체에 일임시킨다. 그들은 세상과 접촉하지 않은데 대하여 스스로를 변명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은 냉랭해져 간다. 그들은 자기 일에만 골몰한 나머지 무감각해 진다.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사랑은 심령 속에서 죽어간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개인 사업, 곧 대리인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사업을 맡겨 주신다.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위원회나 조직된 자선단체에 맡겨져서는 안된다. 개인적 의무, 개인적 노력, 직접적인 희생 등이 복음의 요구이다.“길과 산울 가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도와주고자 하는 자들과 교제하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라”고 말씀하신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눅 14:23, 사 58:7, 막 16:18). 직접적인 접촉을 통하여, 그리고 개인적 봉사를 통하여, 복음의 축복이 전달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빛을 주시면서 오로지 어떤 한 계급만을 통해서 일하지 않으셨다. 다니엘은 유대 나라의 왕족이었다. 이사야 역시 왕의 혈통에 속한 사람이었다. 다윗은 목동이었고, 아모스는 목자였다. 스가랴는 바벨론의 포로였고, 엘리사는 땅을 경작하는 농부였다. 주님께서는 선지자와 왕족들, 귀족과 천한 사람들을 당신의 대표자로 부르셔서 세상에 전해 줄 진리를 그들에게 알려 주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을 지정해 주신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신분과 위치에 서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해야 한다(사 6:8). 말씀을 전하는 목사와 간호원 선교사와 그리스도인 의사에게 그리고 상인, 농부, 전문직의 사람, 기술자 등을 막론한 그리스도인 개인들, 그 모든 사람들에게 그 책임이 지워져 있다. 사람들에게 그들을 구원하는 복음을 제시해 주는 것이 우리의 사업이다.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모든 사업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맡겨진 사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들도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의무를 잘 감당했다는 생각은 그들 자신의 심령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낙망 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실망을 잊어버리고, 약한 사람들은 강해지고, 무지한 사람들은 영리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부르신 분 안에게 실패가 없는 조력자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그리스도의 교회는 봉사를 위하여 조직되며, 그 표어 역시 봉사이다. 교인들은 그들의 구원의 대장이 지휘하는 바에 따라 싸움을 위하여 훈련받아야 할 군사들이다. 그리스도인 목사들과 의사들과 교사들은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것보다 더욱 넓은 범위의 사업을 맡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봉사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봉사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바른 원칙들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그 원칙들을 전해 주도록 청중들을 교훈시켜야 한다. 생활에 실천되지 않는 진리, 나누어 주지 않는 진리는 그 생명력과 치유력을 상실하게 된다. 진리의 축복은 오직 나누어 줄 때 보존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단조로운 봉사는 깨어져야 한다. 모든 교인은 주님을 위하여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봉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많은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우리의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질병과 고통의 물결을 물리치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일을 착수하는 법을 배웠을 것같으면 즐겨 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고 격려를 받을 필요가 있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인 일꾼들을 양성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교인들은 성경을 읽어주는 법과 안식일 학교의 반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법과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고 병든 사람들을 간호해 주는 최선의 방법과,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는 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거기에는 건강학교, 요리학교, 그리스도인 사업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분야를 가르치는 반들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경험 있는 교사들이 보여 주는 실제적 시범이 있어야 한다. 교사들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함으로써 방법을 지도해주어야 한다. 그리하면 그들과 연합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본을 따라 배우게 될 것이다. 한 가지의 모본은 많은 교훈보다 더욱 큰 가치가 있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최대한 계발시켜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곳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아볼로에게 이르러 그들을 영적으로 탁월한 사람이 되도록 구별지어 준 동일한 은혜가 오늘날도 헌신적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지능과 지식을 갖추어 분명하고 능력있게 당신의 영광을 이 세상에 나타내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 헌신한 교육받은 일꾼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분야에서 봉사하고 더욱 넓은 분야의 사업을 성취할 수 있다. 그들의 정신적 훈련은 그들을 유리한 위치에 놓아 준다. 그러나 큰 재능도 없고 광범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봉사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사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실 것이다. 사업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구적인 결과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가장 훌륭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늘에서 온 기별을 듣는 남녀들이 필요하다. 가장 유능한 일꾼들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는 초청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필요한 것은 동정심이 많은 선교사들이다. 하나님의 감동을 심령에 느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큰 열망으로 충만해진다. 그들의 상태가 그에게 비통한 느낌을 준다. 그는 생명을 내걸고, 하늘에서 파견된 영감의 사자로서 천사들이 협력할 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나가게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큰 지능의 선물을 위탁받은 사람들이 그 지능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그들은 한 동안의 시험 기간이 끝난 뒤 그 자신의 길을 따르도록 버려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큰 재능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자아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을 취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그들을 위하여 해 주실 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하는 봉사를 받아 주시되 부족한 것은 그분께서 친히 채워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따금 학교 교육을 충분히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당신의 동역자로 택하셨다. 그런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을 가장 근면하게 활용하였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에 대한 그들의 성실성과 근면과 지식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갈급성에 보상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눈물을 보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바벨론 궁전의 포로들에게 당신의 축복을 주셨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오늘날 당신의 일꾼들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신다.
학교 교육이 부족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때때로 그분을 위한 영혼 구원 사업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의 성공의 비결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들의 확신에 있었다. 그들은 놀라운 권고를 해 주며 능력이 많으신 분을 날마다 배웠다.
그런 일꾼들은 용기를 얻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더욱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 교제하게 하심으로 다른 사람들이 남겨놓은 공백을 메우게 하신다. 이루어져야 할 일을 깨닫는 그들의 민첩성, 어려운 중에 있는 사람들을 자진하여 도와 주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 그들의 친절한 말과 행동 등은 그렇지 않으면 닫혀 있을 뻔한 유익한 문들을 열어 준다. 그들은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접근해 간다. 그리고 그들의 설득력 있는 말에는 떨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능력이 있다. 그들의 사업은 수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만일 그들도 그렇게 하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보다 넓은 생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업에 종사하는 것만큼 자아 희생적 열성을 고취시켜 주고 품성을 넓혀 주고 강화시켜 주는 것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애쓸 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들은 교회의 친교와 목사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 그들은 크고 번영하는 교회의 교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조금만 일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가장 귀중한 축복을 스스로 빼앗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유쾌하고 안이(安易)한 교제를 희생함으로써 큰 유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정력을 그리스도인 사업에 사용하고 책임을 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갈 필요가 있다.
빽빽하게 밀식(密植)된 나무들은 건전하고 튼튼하게 성장하지 못한다. 정원사는 그 나무들에게 발육할 여유를 주기 위하여 그것을 이식(移植)한다. 그와 유사한 일이 큰 교회에 속한 많은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힘이 적극적인 그리스도인 활동에 쓰여질 수 있는 곳에 놓여질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아 희생적(自我犧牲的) 노력이 결핍하므로 영적 생명을 잃고, 성장이 저해되고 무능해져간다. 어떤 선교지역으로 옮겨지므로 그들은 튼튼하고 활발하게 자라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먼 지역으로 가라는 부름을 받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없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는 일을 착수할 수 있다. 봉사의 문은 어느 곳에나 열려 있다. 우리의 모든 주변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부, 고아, 병자, 죽어가는 사람, 마음 아픈 사람, 낙심한 자, 무식한 자, 소외된 자들은 도처에 있다.
우리는 이웃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우리의 특별한 의무임을 느껴야 한다. 그대는 종교적 사물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잘 도와 줄 수 있을 것인지 연구하라. 그대가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방문할 때, 그들의 세속적 복리에는 물론이요 그들의 영적 복리에도 흥미를 나타내라.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구주가 되심을 이야기해 주라. 이웃 사람들을 그대의 가정으로 초청하여 귀중한 성경과 성경의 진리를 해석해 주는 책들을 그들과 함께 읽어라. 그들에게 노래하고 기도하는 일에 그대와 연합하도록 요청하라. 이와 같은 작은 모임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친히 약속하신 그대로 직접 오실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마음은 그분의 은혜로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교인들은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들 스스로를 교육시켜야 한다. 이것은 외방 선교지에서 미개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과 꼭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먼 나라에 있는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한편, 국내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귀중한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꼭 같이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좁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후회한다. 만일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그들의 힘으로 그들의 생애를 넓고 영향력 있는 생애로 만들 수 있다. 마음과 뜻과 영혼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과 감화력을 활용할 수 있는 넓은 분야를 갖게 된다.*
작은 기회들
누구든지 보다 큰 일을 바라기 위하여 작은 기회들을 놓쳐 버려서는 안된다. 그대는 작은 일은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큰 일을 시도하면 완전히 실패하고 실망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여 그대의 힘으로 그 일을 함으로 보다 큰 일을 위한 적성을 계발시키게 될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결실없이 시들어 버리는 것은 매일의 기회들을 소홀히 하고, 바로 곁에 있는 작은 일들을 등한히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움을 의지하지 말라. 인간의 힘 대신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비애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고자 지정해 주신 분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대가 할 일을 발견할 때마다 그 일을 착수하여 확고한 믿음으로 추진해 나가라. 힘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믿는 믿음이다. 이타적 관심과 꾸준한 노력과 끈기 있는 힘으로 일하라.조건들이 너무 불리하고 절망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지역들에서 자아 희생적 일꾼들이 노력한 결과 놀라운 변화를
이루어 놓았다. 그들은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꾸준하고 인내성 있게 활동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써 그들을 지탱해 주셨다. 이와 같이 성취된 훌륭한 일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위대한 내세에서 그 복된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자급 전도자
많은 지역에서 자급 전도자들은 성공적으로 일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온 세계에 퍼뜨리기 위하여 활동한 것은 자급 전도자로서였다. 날마다 아시아와 유럽의 큰 도시들에서 복음을 전하는 한편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 동료들의 생계를 위하여 수공업(手工業)에 종사하였다.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남긴 그의 고별의 말은 그가 일한 방법을 알려 주고, 모든 복음의 역군들을 위한 귀중한 교훈을 남겨 준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18-35).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와 동일한 자아 희생의 정신으로 고무되었을 것같으면 유사한 방법으로 선한 사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전도 사업을 착수하도록 하라. 그들은 사람들을 방문하고, 노래하고, 가르치고, 성경을 해석하고, 병자들에게 봉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문서전도자로서 자양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사도처럼 어떤 기술이나 그 밖의 다른 분야의
활동을 통하여 일할 수 있다. 그들이 스스로의 무력함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앞으로 전진할 때, 그들은 복된 경험을 얻는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서 가시며, 그들은 부요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호의와 도움을 발견하게 된다.
외국에서 의료선교사업을 하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은 지체하지 말고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시작하고, 일을 하면서 언어를 배우도록 권장되어야 한다. 미구에 그들은 단순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다.세계의 전역에 자비의 사자들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흑암과 오류가 덮여 있는 지역사회로 들어가고, 외국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동료 인간들의 필요를 깨닫고,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일하도록 부름받고 있다. 만일 그런 가정들이 세상의 어두운 장소, 곧 영적 흑암이 덮여 있는 곳에 정착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그들을 통하여 비추게
되었을 것같으면 참으로 고귀한 사업이 성취되었을 것이다.
이 사업은 자아 희생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저들이 이룰 수 있었던 사업은 완성되지 못한 채 남아 있고, 많은 무리들은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죽어간다. 어떤 사람들은 상업상 혜택을 위하여, 혹은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하여 불안정한 지역으로 들어가 희생과 어려움을 기꺼이 견디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복음이 필요한 지역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즐거이 옮겨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적은가!
사람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그들의 위치와 상태가 어떠하든 간에 그들을 가르치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봉사이다. 그와 같은 노력을 통하여 그대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접근할 문을 열게 될 것이다.
그대의 모든 사업에 있어, 그대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위대한 구속의 경륜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치료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랑, 곧 생명을 주는 물결이 그대의 생애를 통하여 흘러나야 한다.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그분의 사랑의 영역 안으로 이끌고자 노력할 때, 그대의 순결한 언어와 그대의 이기심 없는 봉사와 그대의 기쁨에 넘치는 태도가 그분의 은혜의 능력을 증거하게 하자. 그분을 순결하고 의롭게 세상에 나타내므로 사람들이 그분을 매력 있게 바라보게 하라.우리가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공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개혁하고자 시도하는 일은 별반 소용이 없다. 그런 노력은 유익보다는 흔히 더 큰 손해를 가져 온다.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는 중에 그리스도께서는 야곱의 우물을 멸시하는 대신에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제시하셨다. 그분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 4:10). 그분께서는 당신이 주시고자 한 보화로 화제를 돌려 그 여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곧 복음의 기쁨과 소망이 되는 생수까지 제시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일할 방법을 알려 주는 하나의 예시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 모든 지각에 뛰어난 그리스도의 평강까지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시는 소원의 표현이 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말해 주어야 한다. 영원한 하늘의 영광이 덧없는 세상의 기쁨과 쾌락에 비하여 어느 정도로 초월한 것인지 그들에게 보여 주라. 구주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와 안식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라. 그분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4:14).
예수님을 높이 들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부르짖으라(요 1:29). 오직 그분만이 마음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고 심령에 평안을 주실 수 있다.
개혁자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이타적이고, 가장 친절하고, 가장 예의가 발라야 한다. 그들의 생애에서 이타적 행위의 미덕이 나타나야 한다. 예의의 부족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들의 무지와 고집에 대하여 참을성 없는 태도를 보여 주고, 빨리 말을 하거나 생각없이 행동하는 일꾼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므로 그들과 결코 접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을 오류에서 돌이키고자 할 때는 이슬과 조용한 비가 시들어가는 식물 위에 내리는 것처럼 말이 부드럽게 흘러 나와야 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생애의 개혁을 위하여 그 진리에 능력을 주실 분을 신뢰하여야 한다. 성령께서는 사랑으로 하는 말을 심령에 적응시켜 주실 것이다.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아 중심적이며 고집을 세우게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교훈을 배우게 되면, 우리는 그분의 품성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므로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공명하신 그리스도의 훌륭한 모본, 곧 측량할 수 없는 친절은 그분을 진정으로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품성에 깊은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들은 친절한 말과 행동으로 피곤한 발길을 편안하게 해 줄 길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게 될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사 50:4).
우리의 주변에는 고통받는 영혼들이 있다. 우리는 이곳 저곳 어디에서나 그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처럼 고통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시기에 적절한 말을 해 주도록 하자. 우리는 언제나 신선한 동정의 물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교제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는 인간의 눈에 가리워진 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억의 페이지에는 호기심 있는 사람들의 눈에 신비하게 가리워져 있는 슬픈 역사들이 있다. 거기에는 어려운 환경에서 치루는 지루하고 고된 싸움, 아마도 날마다 용기와 확신과 믿음을 약화시키는 가정생활의 어려움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커다란 장애물을 놓고 생애의 싸움을 거듭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만 친절한 노력만으로 보여 주는 작은 주의력으로 힘을 얻고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진실한 친구가 내미는 강하고 유용한 손이 금이나 은보다 더 가치가 있다. 친절한 말은 천사들의 미소와 마찬가지로 반가운 것이다.
적은 임금을 위하여 힘겹게 일할 수 밖에 없는, 빈곤과 싸우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겨우 연명할 정도의 필수품 밖에 얻을 수 없다. 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없이 당하는 수고와 손실은 그들의 짐을 매우 무겁게 해준다. 고통과 질병이 첨가되면 그 짐은 거의 질 수 없게 된다. 근심에 시달리고 억압된 나머지 그들은 헤어날 길을 어디에서 찾을지 알지 못한다. 그들의 시련과 마음의 고통과 실망을 동정해 주라. 그렇게 할 때 그대에게는 그들을 도와 줄 길이 열려질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해 주고, 그들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넣어 주라.
심령이 병들고 용기의 맥박이 떨어질 때 들려주는 격려와 권면의 말, 구주께서는 그것을 마치 자신에게 한 말처럼 간주하신다. 사람들의 마음이 용기를 얻게 될 때, 하늘의 천사들은 만족스럽게 바라본다.
각 시대를 통하여 주께서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 신성한 형제의 의식을 넣어 주고자 노력하고 계신다. 그분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 되라. 불신과 분열이 세상에 편만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늘을 지배하는 그 정신을 나타내야 한다.
그분께서 말씀하실 그런 말을 하고, 그분께서 행동하실 그런 행동을 하라. 그분의 품성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보여 주라. 그분의 모든 교훈과 그분께서 사람을 취급하시는 모든 행동의 저변에 있는 사랑의 풍성함을 드러내 주라. 가장 비천한 일꾼들도 그리스도와 협력함으로써 그 진동이 땅 끝까지 울려 퍼지고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화음을 이루게 될 심금(心琴)을 울릴 수 있다.
하늘의 지성적 존재들은 인간 기구들과 협력하고자 기다리고 있으며 그들은 인간이 어떻게 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협력함으로 멸망해 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는지 세상에 보여 주기를 바라고 있다. 자아를 버리고, 마음 속에 성령께서 역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는 생애를 하는 사람의 유용성에는 제한이 없다. 몸과 영혼과 정신을 하나님의 사업에 바치는 모든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새 능력을 끊임없이 받게 될 것이다. 무한한 하늘의 자원이 그들의 마음대로 쓰여진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소유하신 성령의 능력과 당신 자신의 생명을 그들에게 주신다. 성령께서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 속에서 역사하기 위하여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신다. 우리 자신의 그릇된 이견과 선입견, 품성의 결함, 믿음의 부족 등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것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통하여 극복할 수 있다.
아무것도 보류해 두지 않고 봉사를 위하여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모든 사람에게는 측량할 수 없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큰 일을 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므로 이 세상에도 그들의 생애에서 장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위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무서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과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띄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사야 35장 1-10절
시험받는 자들을 도와 줌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며 돌아가셨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죄값을 따라 우리를 취급하지 않으신다. 비록 우리의 죄는 정죄받기에 합당하지마는, 그분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 우리의 냉담과 고집을 여러 해 동안 참으셨다. 우리가 방황하고, 심령이 완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있을지라도 그분의 팔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뻗쳐 있다.
은혜는 은혜받기에 합당치 못한 인간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태도이다. 우리가 은혜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은혜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고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유일의 이유는 우리에게 그 자비가 크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많고 타락한 사람들을 초청하시고자 온 종일 당신의 손을 뻗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영접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신다. 죄인들의 괴수를 용서해 주는 것이 그분의 영광이다. 그분께서는 사로잡힌 자를 강한 자에게서 빼앗으시고, 포로된 자를 건져내시고, 나무토막을 붙는 불에서 꺼내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가장 깊은 인간의 불행의 심연(深淵)까지 당신의 자비의 황금 사슬을 내려서 죄로 병든 타락한 영혼을 끌어올리실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데려가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신 그분에게 부드러운 관심의 대상이 된다. 죄 많고 속절없는 영혼들, 사단의 간계와 사슬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영혼들이 마치 목자가 양떼를 돌보는 것과 같은 보호를 받는다.
구주의 모본은 시험당하는 자와 실수한 자들을 위하여 나타내는 우리의 봉사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과 꼭 같은 흥미와 친절과 인내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야 한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요 13:34).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이기심 없는 사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동정과 도움이 필요되는 남녀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도움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고 묻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가”고 자문해야 할 것이다.부요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자유인과 종들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다. 인류를 구속(救贖)하기 위하여 생명을 주신 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유한한 인간이 평가할 수 없는 가치를 보신다. 십자가의 오묘한 영광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께서 영혼의
가치를 평가하시는 바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사람이 비록 아무리 타락하였을지라도 냉대와 모멸로 취급되어서는 안되리만큼 큰 값이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 인간들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높임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일하는 중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구주의 비유에 나오는 잃어버린 은전은 비록 먼지와 쓰레기 속에 묻혀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의 은이었다. 그것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은전의 주인은 그것을 찾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각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아무리 타락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가치 있게 여겨진다. 은전이 통치자의 상(像)과 명각(銘刻)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창조 시에 하나님의 형상과 명각을 간직하게 되었다. 비록 죄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은 훼손되고 희미해졌을지라도 각 영혼에는 그 명각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의와 성결로써 그 위에 당신의 형상을 다시 새기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가장 강한 연합의 띠가 되는 동정심, 곧 타락하고, 죄 많고, 고통당하고,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들에 대한 동정심을 그분과 같이 간직하는 일이 얼마나 적은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몰인정이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죄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그분의 위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엄격하고 가혹하게 취급당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유혹의 압박을 받는다. 사단은 그와 같은 영혼들로 더불어 싸우고 있다. 그러므로 거칠고 냉랭한 말은 그들을 낙담케 하고, 그들을 유혹자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한다.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것은 미묘한 일이다. 오직 마음을 아시는 분만이 사람들을 어떻게 회개하도록 인도할 것인지 아신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만이 잃어버린 사람들을 접촉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성공을 거두게 하실 수 있다. 그대는 엄격하게 혼자 서서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의 이론이 아무리 정확하고 그대의 말이 아무리 진실할지라도 그와 같은 자세는 사람들의 마음과 결코 접촉될 수 없다.
교훈과 논쟁의 반복이 아무런 일을 성취하지 못할 때, 말과 행동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혼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와 같은 동정심이 더욱 필요하다. 그와 같은 동정심은 단순히 우리에게 결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때때로 결점에 사로잡혀 있고, 죄를 짓고 통회하며, 시험을 받아 낙심 중에 있는 가난한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 갈등속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비로운 대제사장처럼 우리의 동료 인간들의 약점들을 느끼면서 그들에게 가서 그들과 접촉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셔서 당신의 부드러운 친절로 당신께 오도록 강권하신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들, 곧 세리들과 죄인들이었다. 그분께서 결코 호의를 보이실 수 없었던 한 계급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존심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는 가까이 있는 이방인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야한다. “세리들과 창기들”도 그리스도의 초청을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들의 친절과 인내를 통하여 그 초청은 가장 깊은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 주는 강권하는 힘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동기는 사단이 멸망시키고자 애쓰는 영혼들을 위하여 확고한 목적과 끊임없는 관심과 불굴의 인내로 일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어떠한 것도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간절하고 열렬한 활력을 냉각시켜서는 안된다.전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남녀들을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호소하고 강권하는 정신이 나타나 있음을 주목해 보라. 우리는 사람들을 구주께 이끌기 위하여 공사(公私)간의 온갖 기회를 포착하여 모든 이론을 전개하고, 모든 동기를 한량없이 일으키도록 격려해야 한다. 우리는 온갖 능력을 기울여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극기와 희생의 생애를 받아들이도록 강권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그분께서 주신 모든 재능을 다 활용함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소망으로 구원을 받음“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롬 8:24). 타락한 사람들은 그들이 사람답게 되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지도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확신을 가지고 인류를 영화롭게 하셨으므로 인류의 명예를 스스로 간직하게 하셨다. 가장 깊이 타락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분께서는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적의(敵意)와 부패와 불순을 접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분에게 끊임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감정에 충격을 받았다거나 당신의 고상한 취미가 훼손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을 결코 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악습과 강한 편견과 거만한 감정이 어떠하든 간에, 그분께서는 그 모든 것을 동정 깊은 친절로 대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을 받게 되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유사한 시험과 시련을 당하는 형제들로, 또한 이따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고자 애쓰며, 낙담과 어려움에 부딪혀 싸우고, 동정과 도움을 갈망하고 있는 형제들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들을 낙심시키거나 쫓아 버리기 위하여 만나지 않고 그들의 마음 속에 소망을 일으켜 주기 위하여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용기를 얻게 되면
그들은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미 7:8, 9).
하나님께서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시편 33편 14, 15절)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받아 실수하는 사람들을 취급할 때 “네 자신을 돌아 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갈 6:1)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하므로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없신여기느뇨.”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전 4:7, 마 23:8, 롬 14:10, 13).
사람이 잘못을 지적당하는 것은 언제나 굴욕적인 일이다. 어떤 사람도 쓸데없는 비난으로 그 경험을 더욱 쓰라리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도 지금껏 비난으로 개선된 일이 없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비난으로 반감을 갖게 되고,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각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부드러운 정신과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는 실수한 사람들을 구원해 내고 많은 죄를 가리워 준다.
사도 바울은 잘못을 책망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실수한 사람의 친구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얼마나 신중하게 노력하였던가! 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그들에게 얼마나 열렬하게 설명하였던가! 그는 그들에게 고통을 준 것이 그에게도 고통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는 승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자신의 확신과 동정을 보여주었다.그는 “내가 큰 환란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고후 2:4).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냈었느니라 …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고후 7:8-13).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후 7:16, 빌 1:3-5, 1:6, 7, 4:1, 살전 3:8).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로서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는 품성에 있어서 완전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혹을 대항하여 싸우는 한편, 또한 넘어질 위험에 놓여 있는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그들에게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영원한 언약의 피로” 그분께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실 것을 보증하였다(히 13:20, 21).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의 실수를 깨달을 때, 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무관심과 불신으로 그 사람을 낙담케
하지 말라. “그 사람이 끝까지 잘 해 나갈 것인지 본 후에 그를 신뢰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흔히 바로 그와 같은 불신이 시험받는 사람을 실족케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흑암의 사슬에 매인 채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결심과 도덕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마음의 시련을 별로 알지 못한다. 가장 비참한 것은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상태이다. 그는 진흙 속으로 빠져들어가면서 비틀거리며 정신을 잃고 있는 사람과 같다. 그는 아무것도 분명하게 볼 수 없다. 마음이 흐려져 있으므로 발을 어떻게 옮겨야 할지 모른다. 많은 불쌍한 영혼들이 오해를 받고,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고통과 번민에 싸인 채 잃어버린 양이 되어 방황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럴지라도 그는 용서와 평안을 갈급하는 강력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아, 고통을 더욱 심하게 해 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말아야 한다! 죄악 생애에 지쳐있으면서도 벗어날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긍휼이 많으신 구주를 알려 주라. 그의 손을 잡아 주고, 그를 일으켜 주고, 그에게 용기와 희망의 말을 해 주고, 그를 도와서 구주의 손을 붙들게 해 주라.
우리는 우리의 노력에 즉시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너무나 쉽게 실망한다. 우리는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으면 영혼을 위한 노력을 결코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 구속주의 희생으로 산 귀한 영혼들은 유혹자의 세력에 가볍게 버려두기에 너무나 귀중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험받는 사람들의 처지에 놓을 필요가 있다. 유전의 힘, 나쁜 교제와 환경의 영향, 나쁜 습관의 힘 등을 생각해 보라. 그와 같은 영향 아래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는 것을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에 그들이 느리게 반응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때때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 외관상으로 보잘 것없고 유망해 보이지 않은 사람들이 가장 충성스런 복음의 신봉자와 옹호자들 중에 속할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더럽혀져 있지 않다.
외관상으로 가까이 가기 어려운 이면에는 접촉할 수 있는 선량한 본성이 잠재해 있다.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결코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내와 꾸준한 노력을 통하여,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운 말과 친절한 염려와 실제적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마음 속에 있는 한 줄기 희미한 희망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는 그런 종류의 권면이 필요하다. 그들과 접촉하는 사역자들은 이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너무 오랫동안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생애에서 더 나은 환경에 결코 처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의의 태양의 밝은 광선은 그 영혼에게도 비추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평가되는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다. 그들의 마음 속에 숭고하고 고상한 사상을 심어 주라. 그대의 생활로써 부도덕과 순결, 흑암과 빛의 차이점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라. 그대의 모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그들에게 알려 주라.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에 두시며, 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불멸의 유업(遺業)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적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유용한 생활에 적합해질 수 있다. 그들은 멸시당하고 버림받은 나머지 완전히 낙심상태에 빠져 있다. 그들은 냉랭하고 완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을 참으로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어리석음은 성령의 역사 아래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둔하고 흐려 있던 정신은 각성될 것이다. 죄의 사슬은 끊어질 것이다. 부도덕은 사라지고, 무지는 극복될 것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은 순결해지고, 정신은 계발될 것이다.
부절제한 사람을 위한 봉사

모든 참된 개혁은 복음사업에 그 중심을 두고 있으며 그것은 새롭고 더욱 고상한 생애로 영혼을 향상시켜 준다. 특별히 절제 개혁은 그리스도인 일꾼들의 지원을 요망한다. 그들은 이 사업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그것을 하나의 실제적 문제로 삼아야 한다. 어느 곳에서나 그들은 사람들에게 참된 절제 원칙을 가르쳐 주고 절제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악습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열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부절제로 타락한 사람들을 위하여 해야 할 사업이 어느 곳에나 있다. 교회 안에서, 종교적 기관에서, 그리스도인 가정이라고 공언하는 곳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멸망으로 가는 길을 택하고 있다. 부절제의 습관으로 그들은 스스로 질병을 초래하고 죄악적 방종에 쓸 돈을 벌기 위한 탐욕 때문에 부정직한 생활로 전락한다. 건강과 품성은 파괴된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사회에서 버림 받은 그 가련한 영혼들은 이생과 내생에서 한 가지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부모들의 마음은 상처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이 그릇된 사람들을 소망이 없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그런 상태로 만든 모든 환경을 이해하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들을 불쌍하게 보신다. 그런 사람들은 도움이 요구되는 계급에 속한다. 그들에게 “아무도 내 영혼을 돌봐 주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결코 주지 말라.
부절제의 희생이 된 사람들 중에는 온갖 계급에 속한 사람들과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 탁월한 재능을 소유한 사람, 위대한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식욕의 방종에 빠져, 마침내 유혹을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른다. 한때 크게 부요하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고통과 불행과 질병 속에서 타락 상태가 되어 집도, 친구들도 없어진다. 그들은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이 뻗혀지지 않으면, 그들은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갈 것이다. 이와 같은 방종에는 도덕적 죄악뿐만 아니라 육체적 질병도 수반된다.
때때로 부절제한 사람들을 도와 줌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흔히 하셨던 것처럼 먼저 그들의 육체적 상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건전하고 비자극성 식물과 음료, 깨끗한 의복, 육체적 청결을 얻을 기회가 필요하다. 그들은 유익하고 고상한 그리스도인 감화의 분위기에 둘러싸일 필요가 있다. 모든 도시에는 악한 습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사슬을 끊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독한 술을 고통 중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의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공언하는 사람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의 역할을 담당하는 대신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본을 따를 것같으면, 많은 사람들이 독한 술을 위로의 방편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부절제의 희생자들을 취급할 때 우리는 정신이 건전한 사람들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얼마 동안 악마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내하고 참으라. 혐오감이 들고 가까이 가기 싫은 외모를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귀중한 생명을 생각하라. 주정뱅이가 자신의 타락상을 깨닫게 되면, 그대가 그의 친구임을 보여 주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라. 비난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말라. 행동이나 표정으로 비난이나 혐오감을 결코 나타내지 말라. 가련한 영혼은 매우 쉽사리 자신을 저주한다. 그가 일어서도록 도와 주라. 믿음을 고취시켜 줄 말을 해 주라.
그의 품성 가운데 있는 모든 좋은 특성을 강화시켜 주기 위하여 노력하라. 향상하는 방법을 그에게 가르쳐 주라. 동료 인간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생활을 할 가능성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해 주셨지마는 그가 계발하기를 등한히 한 재능들의 가치를 볼 수 있게끔 그를 도와 주라.
비록 의지가 타락되고 약화되었을지라도 그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이 있다. 그는 마음 속에서 더욱 고상한 동기와 더욱 고귀한 욕망을 일으킬 수 있다. 복음을 통하여 자기 앞에 제시된 희망을 굳게 붙들도록 격려하라. 시험을 받아 투쟁하고 있는 사람 앞에 성경을 펴고 거듭 거듭 하나님의 약속을 읽어 주라. 그 약속들은 그에게 생명나무의 잎사귀와 같을 것이다. 감사의 마음에서 나오는 기쁨으로 떨리는 손을 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된 구속의 소망을 붙잡을 때까지 그대의 활동을 꾸준히 계속하라.
그대는 그대가 도와 주고자 애쓰고 있는 사람들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승리는 결코 그대의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거듭거듭 독한 술을 마시고 싶은 욕망에 거의 정복당할 뻔할 것이다. 그들은 거듭해서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대의 활동을 중단하지 말라.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생활에 힘을 다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력은 약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해야 할 사명으로 알고 영혼들을 돌보는 사람들에 의하여 세심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남자다운 기백을 잃어버렸으므로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강한 유전적 성질을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부자연스런 욕망, 감각적 충동 등은 그들의 선천적 유산(遺産)이다. 그와 같은 것들은 주의 깊이 경계되어야 한다. 내외(內外)에서 선(善)과 악(惡)은 서로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거의 압도적인 식욕의 세력, 또한 방종의 습관과 모든 일에 절제하고자 하는 결심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세력을 이해할 수 없다. 거듭해서 전쟁을 치루어야 한다.그리스도께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식욕과 정욕을 대항하는 싸움을 계속할 도덕적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역자가 그것 때문에 낙심해서는 안된다. 그들이야말로 타락의 밑창에서 건져냄을 받아야 할 유일의 대상이 아닌가?
그대는 혼자서 일하고 있지 않음을 기억하라. 섬기는 천사들은 진실한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봉사하는 일에 연합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회복자시다. 위대한 의사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일꾼들 곁에 서서 회개하는 영혼에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막 2:5).
버림받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들에게 제시된 소망을 붙들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큰 기회와 큰 빛으로 축복을 받았으나 그것들을 이용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다.
악습의 희생이 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노력할 필요를 깨달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건져내기 위하여 가장 열렬한 노력을 기울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고, 그리스도께서 탄원하시고 그분의 천사들이 봉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를 위하여 싸우고자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일이 허사가 될 것이다.
당시에 하나의 젊은이에 불과했지만 미구에 이스라엘의 왕위를 계승할 솔로몬에게 한 다윗의 마지막 말은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것이었다(왕상 2:2). 인류의 모든 자녀, 곧 불멸의 면류관을 얻을 후보자들에게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한 영감의 말씀이 주어져 있다.
방종의 생활을 하는 자들은 그들이 대장부가 되려면 위대한 도덕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느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일어나서 죄악적 방종으로 희생시켜 버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대장부다운 기백을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 입어 다시 찾으라고 호소하신다.많은 사람들은 무서운 유혹의 힘, 곧 방종으로 빠져 들어가는 욕망의 힘을 깨닫고서 절망 중에 “나는 악을 저항할 수 없다”고 부르짖는다. 그에게 악을 저항할 수 있다는 것과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라. 그는 거듭거듭 정복당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그는 죄악 생활의 습관에 지배된 나머지 도덕적 능력이 약하다. 그의 약속과 결심은 마치 썩은 새끼와 같다. 그가 약속을 깨뜨리고 서약을 어긴 것을 알므로 그는 자신의 성실성에 대한 확신이 약해지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받아 주시거나 그와 함께 역사하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어떤 유전과 후천적 습관과 기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보다 낮은 욕구에 사로잡혀 있기보다 오히려 모든 식욕과 정욕을 지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한한 힘으로 악과 싸우도록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셨다. 우리의 선천적 혹은 후천적 성격이 아무리 그릇되게 이루어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고자 마련해 주신 능력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다.
의지력(意志力)
시험받는 사람은 의지의 참된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성격 가운데 있는 지배력, 곧 결정하고 선택하는 능력이다. 모든 일은 올바른 의지의 활용에 좌우된다. 선과 순결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거기에서 그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악한 기질들을 정복하고자 바라고 소원하는 동안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를 택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력을 주셨으므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고,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애정을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순결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업에 적합한 상태로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 있고,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드릴 수는 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의 온 성격이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의지력의 올바른 활용을 통하여 완전한 변화가 생애에 이루어지게 된다. 의지를 그리스도께 굴복시킴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굳게 붙들어 줄 능력을 위로부터 받는다. 순결하고 고상한 생애, 식욕과 정욕에 승리하는 생애는 연약하고 요동하는 인간의 의지를 전능하고 확고한 하나님의 의지에 결합시키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식욕의 힘을 대항하여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은 건강생활의 원칙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질병의 조건을 만들고 부자연한 욕망을 일으킴으로써 건강 법칙을 깨뜨릴 때 음주의 습관에 대한 기초가 놓인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다만 건강의 원칙에 순종하여
생활함으로써만 그들은 부자연한 흥분제를 구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식욕의 속박을 깨뜨리고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동안 그들은 도덕적, 육체적 법칙을 막론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함으로써 그분과 협력해야 한다.
개혁을 하고자 애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감이 주어져야 한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무료로 의식주(衣食住)가 해결되기를 바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도 그들이 받는 것만큼 갚아 줄 수 있는 각종의 방안이 연구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급(自給)하도록 권장하라. 그 일은 자중심(自重心)과 고상한 자립성을 강화시켜 줄 것이다. 유용한 분야의 정신적, 육체적 직업은 유혹을 저항하는 안전책으로서 필수적이다.
실망의 위험
타락한 자들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개혁을 약속하는 많은 사람에게서 실망을 당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습관과 행동에 있어서 다만 피상적인 변화만을 보일 것이다. 그들은 충동에 의하여 움직이고, 일시적으로 개혁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마음의 변화는 없다. 그들은 전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어리석은 쾌락을 갈망하는 마음과 방종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품성을 형성하는 사업을 알지 못함으로 원칙적인 사람으로 신뢰할 수 없다. 그들은 식욕과 정욕의 만족으로 정신적, 영적 능력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연약한 상태에 빠져 있다. 그들은 변덕스럽고 변하기 쉽다. 그들의 감정은 관능적으로 기울어진다. 그런 사람들은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의 요인이 된다. 그들이 개혁한 남녀로 인정되어 책임이 위탁되면 그들은 그들의 감화력으로 순결한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개혁하고자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도 넘어질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부드럽고 매우 지혜롭게 취급을 받을 필요가 있다. 가장 깊은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칭찬하고 높여 주는 처사가 흔히 그들을 멸망시키는 일임이 입증된다. 남녀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죄악 생활의 경험을 공중 앞에서 이야기하게 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에게 다같이 위험하다. 죄악적 장면에 머물러 있으면 정신과 심령이 타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타락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두드러진 위치에 놓게 되면 그들에게 해가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 생활이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탁월성을 주었다고 느끼게 해 준다. 영혼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입증된, 나쁜 평판을 좋아하고 자기를 신뢰하는 정신이 고무된다. 그들은 오직 자아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자비를 의지함으로써 굳게 설수 있다.회개의 참 증거를 나타내는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도록 고무되어야 한다. 아무도 사단을 섬기는 일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한 영혼을 외면하지 않도록 하라.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증거가 보이면, 주님의 사업을 착수하도록 그에게 온갖 권면을 해 주라.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22). 하나님께로 오는 지혜로 현명하게 된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되는 사람들, 진정으로 회개했으나 권면이 없으므로 소망의 줄을 담대히 붙들 수 없는 사람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떨며 회개하는 영혼들을 영접하여 친절하게 교제하도록 당신의 종들의 마음 속에 지혜를 주실 것이다. 그들을 둘러 있는 죄악이 어떠하든지, 그들이 어느 정도로 깊이 타락하였든지, 그들이 회개함으로 그리스도께 나오면 그분께서는 그들을 영접해 주신다. 그 때에 그분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주신다. 만일 그들 자신들이 구원을 받은 멸망의 구덩이에서 다른 사람들을 건져내는 일에 활동하기를 원하면, 그들에게 기회를 주라. 그들을 경험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게 함으로 영적 힘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라.
그들의 마음과 손을 주님을 위한 일로써 채워 주라.
빛이 심령 속에 비춰질 때, 죄에 가장 깊이 빠졌던 것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때 처해 있던 것과 꼭 같은 처지에 있는 죄인들을 위하여 활동하는 성공적인 일꾼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어떤 사람들은 봉사의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되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업에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약점이 어떤 것인지 알며, 그들의 본성의 타락상을 깨닫고 있다. 그들은 죄의 힘, 곧 악습의 세력을 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으면 승리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나는 나의 속절없는 영혼을 당신께 바칩니다”고 끊임없이 부르짖는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다. 시험과 시련을 받으므로 희망이 거의 사라졌으나 사랑의 기별을 들음으로써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영혼 구원의 이치를 깨달을 것이다. 구주께서 그 자신을 찾아내어 양의 우리 안으로 다시 들어오게 하셨기 때문에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는 길을 안다. 그는 죄인들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가리켜 줄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렸고 사랑하는 그리스도께 영접을 받았다. 연약한 상태에서 도움을 받고자 뻗은 손이 붙잡혀졌다. 그런 사람들의 봉사를 통하여 많은 탕자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올 것이다.
죄악 생활에서 순결한 생활로 전환하고자 애쓰는 모든 영혼을 위하여 마련된 위대한 능력의 요소는 오직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 이름”(행 4:12) 안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한 소망과 죄악적 기질에서의 구원을 주시고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신다(요 7:37). 부도덕을 고치는 유일의 치료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이다.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훌륭한 결심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 세상의 온갖 서약이 악습의 힘을 깨뜨릴 수 없다.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와진 후에야 비로소 모든 일에 절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한 순간도 우리 자신을 죄에서 보호할 수 없다. 매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
참된 개혁은 심령을 정결케 하는데서 시작된다. 타락한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사업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가 품성을 다시 형성시키고 심령이 하나님과 산 연결을 이룰 때만 참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는 생애를 하셨다. 그런 점에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본을 남기셨다. 그분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생애를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의 교훈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타락한 사람들을 위하여 일할 때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와 그분께 충성할 필요성이 정신과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과 그분을 섬기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지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에 실패하지 말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명령을 고의적으로 멸시하는 일을 용서하실 수 없다. 사람들이 불성실의 결과를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 정부의 원칙이다. 오직 그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그분께서 존중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사람의 행위가 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사람은 자기가 심은 그대로 거두어야 한다. 원인에는 결과가 따르게 되어 있다.
완전한 순종이 아닌 것은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표준에 달할 수 없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요구를 분명치 않게 남겨 주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인류가 당신과 조화를 이루는데 필요치 않는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죄인들에게 사람의 품성에 대한 그분의 이상(理想)을 지적해 주고, 이 이상에 도달하게 해 주는 유일의 은혜를 소유하신 그리스도께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구주께서는 연약한 인성을 취하시고 죄없는 생애를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인간성의 약점 때문에 승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그분의 생애는 인성이 신성과 연합할 때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구주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하여 승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모든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항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능력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유혹하는 자는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분께서는 모든 시험을 “기록하였으되” 라는 말씀으로 대처하셨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악을 저항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벧후 1:4).
시험받는 자에게 환경과 자신의 연약함과 유혹의 힘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보도록 알려 주라. 그 모든 힘은 우리의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오며”라고 말한다(시 119:11, 17:4).*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하라. 그들이 기도로써 하나님을 쳐다보게 하라. 시험에 정복당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실패 때문에 굴욕감을 느끼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접근하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원수의 암시에 속한 것이다. 그들이 죄를 지었으므로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바로 그 때가 기도할 때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라. 그들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진정으로 자신을 낮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자복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고 그들을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구주의 공로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보다 더욱 속절없이 보이는 것이 없지마는 실상은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와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믿음으로 가장 약한 사람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을 붙드셔서 그들이 결코 떠나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다음의 귀중한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든 영혼이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말씀들이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나의 대적이여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미가 7장 7, 8절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 7장 19절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
이사야 13장 12절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같도다.”
시편 68편 13절
그리스도께 가장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그분을 가장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날에 그분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설 사람들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장 4절)
직업없고 집없는 사람들을 도와 줌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과 그들을 구제해 줄 어떤 방법이 없을까하고 걱정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관대한 남녀들이 있다. 직업없고 집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공통적인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의도하신 생활을 하게끔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대답을 찾고자 열렬히 노력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적 상태에 잠재해 있는 원인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못하며, 심지어 교육자들과 정치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를 지도하는 사람들도 가난과 빈곤과 격증하는 범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들은 보다 안전한 기초 위에서 일을 하고자 애쓰지마는 허사가 되고 만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에 더욱 유의하였을 것같으면, 그들은 자기들을 괴롭히고 있는 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구약성경에서 노동문제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문제에 관하여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각 가족은 경작하기에 충분한 땅을 가지고 가정을 세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용하고 근면하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위한 수단과 동기가 제공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사람들의 어떤 고안(考案)도 그 계획을 능가하지 못했다. 세상이 그 계획에서 떠남으로써 오늘날 존재하는 대부분의 빈곤과 불행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자 그 땅은 온 백성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다만 성소 봉사자로 구별된 레위인들만은 균등한 분배에서 제외되었다. 매 지파에 속해 있는 가정들이 계수되었고, 그 가족의 수에 따라 유업이 각 가정에 할당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일시적으로 처리할 수는 있었으나 자기 자녀의 유업을 영구적으로 팔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 땅을 다시 찾을 수 있을 때는 언제든지 그렇게 할 자유가 있었다. 빚은 매 7년에 탕감되었고, 50년째 되는 해, 곧 희년(禧年)에는 모든 토지의 소유권이 본래의 소유주께 돌려졌다.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 25:23-28).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10절).
그와 같이 모든 가정이 재산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빈부(貧富)의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보호책이 마련되었다.
직업훈련이스라엘에 있어서, 직업훈련은 하나의 의무로 간주되었다. 모든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어떤 유용한 직업을 가르치도록 요구되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은 생산적 직업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모든 여자에게는 살림살이에 대한 의무를 아는 지식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 의무에 따른 기술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여자들에게 하나의 명예로 여겨졌다.
여러 가지 직업들을 선지자 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학생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육체노동으로 자급자족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함
그러나 그와 같은 조치가 빈곤을 완전히 퇴치하지 못하였다. 빈곤이 완전히 제거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었다. 빈곤은 품성을 계발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 중 하나이다. 그분께서는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말씀하신다(신 15: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며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7, 8절).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레 25:35)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레 19:9, 신 24:19-21).
아무도 그들의 너그러운 구제 때문에 궁핍이 초래될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반드시 번영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치리할지라도 너는 치리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신 15:10, 6).
사업의 원리
하나님의 말씀은 한 계급의 사람들이 다른 계급의 사람들을 압박하고 고통케 함으로 부요해 질 수 있는 정책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사업 거래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우리와 거래하고 있는 상대방의 위치에 놓으라는 것과, 우리 자신의 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약점과 무능력을 통하여 자신이 이익을 얻고자 도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과 교훈을 다 같이 범하는 자이다.*“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 “무릇 네 이웃에게 꾸어 줄 때에 네가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섰고 네게 꾸는 자가 전집물을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외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네 이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라”(신 24:17, 10-12, 출 22:26, 27, 레 25:14).
“너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 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공평한 저울과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레 19:35, 신 25:13, 14, 레 19:36).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니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마 5:42, 시 37:21).
“너는 모략을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오정 때에 밤같이 그늘을 짓고 쫓겨난 자를 숨기며 도망한 자를 발각시키지 말며 나의 쫓겨난 자들로 너와 함께 있게 하되”(사 16:3, 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생활계획은 온 인류를 위한 하나의 실물교훈이 되도록 의도되었다. 만일 그 원칙들이 오늘날 실천되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다른 장소로 바뀌어졌을까!
광활한 천연계의 영역 안에는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궁핍한 사람들을 위하여 집을 마련해 줄 장소가 아직도 남아 있다. 천연의 품 속에는 그들에게 식물을 공급해 주기에 충분한 자원들이 있다. 땅속 깊은 곳에는 천연계의 보화를 캐낼 용기와 의지와 인내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위한 축복들이 숨겨져 있다.
토지를 경작하는 것, 곧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류에게 정해주신 직업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재산을 얻을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장(場)을 열어 준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시편 37편 3절)
흙을 상대로 일하고 있어야 할 수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몰려 들어 적은 돈을 벌기 위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 적은 돈은 양식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고 몸과 마음을 파괴시키는 것을 얻기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돈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을 고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은 정직하게 노력하기 보다는 술책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일하지 않고 생활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욕망은 거의 걷잡을 수 없는 불행과 부도덕과 범죄에 대하여 문을 연다.
도시의 빈민가대도시들에는 말 못하는 짐승에게 베푸는 것보다 더 못한 보호와 동정을 받는 무리들이 있다. 형편 없는 셋집에 함께 몰려 사는 가족들을 생각해 보라. 그런 거처들의 대부분은 습기와 더러운 오물로 악취가 나는 어두운 지하실이다.
이처럼 참혹한 장소에서 어린 아이들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감정을 순화시켜 주기 위하여 창조하신 천연계의 사물에 나타난 아름다움을 전혀 보지 못한다. 누더기를 걸치고 거의 굶주린 채로 그들은 부도덕과 타락 속에서 살아가며, 그들을 두르고 있는 불행과 죄에 의하여 품성을 꼴짓는다. 어린 아이들은 다만 불경하게 나타내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을 뿐이다. 더러운 말과 저주와 욕설이 그들의 귀를 채우고 있다. 술과 담배냄새, 메스꺼운 악취, 도덕적 타락 등은 그들의 지각을 왜곡시킨다. 그리하여 수 많은 사람들은 범법자, 곧 자기들을 불행과 타락 속에 방치해 둔 사회에 대한 원수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도시의 빈민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그와 같은 계급에 속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남녀들이 질병과 불행 때문에, 때로는 그들의 동료들을 약탈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정직한 계략때문에 가난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있다. 정직하고 품성이 좋은 많은 사람들이 직업훈련의 부족 때문에 가난하게 된다. 무지 때문에 그들은 인생의 난관과 싸우기에 부적합하다. 그들은 도시로 밀려 와서 흔히 직업을 발견할 수 없다. 부도덕의 광경과 소리에 둘러싸여 그들은 무서운 시험에 굴복당한다. 부도덕하고 타락한 사람들과 무리를 짓고 때로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면, 다만 초인간적 노력, 곧 유한한 인간의 힘 이상의 노력에 의해서만 그들은 그 동일한 깊이까지 빠져 들어가는 일에서 보호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성실성을 굳게 지켜 죄를 짓기 보다는 차라리 고난받는 길을 택한다. 특별히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도움과 동정과 격려가 필요하다.오늘날 도시들에 몰려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시골에서 생할하였을 것같으면 그들은 생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오늘날 그들이 잃고 있는 건강과 행복도 찾았을 것이다. 고된 일, 적은 임금, 어려운 경제 사정, 잦은 역경과 궁핍 등이 그들의 운명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악에 대한 유혹, 환란과 범죄, 불행과 불결 등이 있는 도시를 떠나 시골의
정적과 평안과 순결을 찾아간다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될 것인가.발 하나 들여 놓을 작은 잔디밭 하나 없고 몇 해가 지나도록 불결한 마당과 좁은 골목, 벽돌 담과 포장된 도로, 먼지와 연기로 덮인 하늘을
보면서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푸른 들, 수목과 언덕과 개울, 맑은 하늘과 신선하고 깨끗한 시골 공기 등으로 환경이 이루어진 어떤 농촌 지역으로 옮겨 간다면, 그곳이 거의 천국과 같은 느낌을 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사람들을 의존하는 일에서 거의 떠나고 세상의 부패한 처세술과 관습과 흥분에서 격리되어 천연계의 중심부에 더 가까이 이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들에게 더욱 실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천연계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 속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평안과 사랑의 음성을 듣고, 마음과 영혼과, 몸이 치유해 주고 생명을 주는 능력에 반응을 나타낼 것이다.
만일 매우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자급자족하게 되려면 그들은 도움과 격려와 교훈을 받아야 한다. 가난한 가정들이 많다. 그들을 시골에 정착하게 해 주고 땅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줌으로 그들을 도와 주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좋은 선교사업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도움과 교훈의 필요성은 도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보다 훌륭한 생활을 할 가능성을 다 갖추고 있는 시골에서까지도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매우 궁핍한 중에 있다. 모든 지역사회는 근면과 위생면에서 교육이 결핍되어 있다. 사람들은 빈약한 가구와 의복으로, 연장도 없고, 책도 없고, 생활의 이기(利器)와 편리한 시설과 문화적 시설도 없는 오두막에서 산다. 더럽혀진 정신과 연약하고 병든 몸은 악한 유전과 그릇된 습관의 결과가 어떠함을 나타내 준다. 그런 사람들은 바로 기초부터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쓸모없고 게으르고 타락한 생활을 해 왔으므로 올바른 습관으로 훈련받을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개선의 필요를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더욱 고상한 생애에 대한 이상을 갖도록 지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을 일어나도록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을 것인가?빈곤이 편만하고 발걸음마다 싸워야 할 곳에서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분명히 그 사업은 어렵다. 남녀들이 자기들의 외부에서 오는 어떤 힘으로 도움을 받지 않으면 필요한 개혁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다 같이 동정과 원조의 띠로 밀접히 결속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재물과 재능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선물들을 그들의 동료 인간들을 축복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농부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농촌에서 거처를 마련하도록 도와 주고, 그들에게 토지를 경작하며 그 땅에서 수확을 거두는 방법을 가르쳐 줌으로 참된 선교사업을 할 수 있다. 그들에게 농기구를 사용하고 여러 가지 작물을 경작하고 과수원을 만들어 돌보는 방법들을 가르쳐 주라.
토지를 경작하는 많은 사람들은 태만하기 때문에 적당한 수확을 얻는 일에 실패한다. 그들의 과수원은 올바르게 관리되어 있지 않고, 곡식들은 적당한 때에 심겨지지 않고 있으며, 토지를 경작하는데 있어서 다만 피상적인 일만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를 땅이 불모하다는데 돌려 버린다. 적당하게 일을 하였을 것 같으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땅을 정죄함으로 거짓 증거를 하게 된다. 빈약한 계획, 적은 노력, 최선의 방법에 대한 적은 연구 등은 크게 개선되어야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당한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진보적 견해를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기를 원치 않으면 조용히 가르쳐 주라. 그대 자신의 땅을 경작하는 일을 꾸준히 계속하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웃 사람들에게 한 마디씩 이야기해 주라. 그리하여 수확에 무엇이 올바른 방법인지 입증해 주게 하라. 적당하게 일을 하면 땅이 어떤 일을 해 준다는 것을 실증해 주라.
여러 가지 산업체들을 세워 가난한 가족들이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목수, 대장장이, 또한 참으로 어떤 유용한 노동의 분야를 이해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무식하고 직업없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도와 줄 책임을 느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할 때,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자들에게도 넓은 봉사의 분야가 있다. 유능한 요리사, 주부, 여자 재봉사, 보모,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가난한 가족들에게 요리하는 법, 의복을 만들고 수선하는 법, 병자를 간호하는 법, 가정을 적당하게 관리하는 법 등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소년 소녀들에게 어떤 유용한 일과 직업을 철저히 가르쳐 주어야 한다.
선교사업을 하는 가족
선교사업을 하는 가족들은 미개척지에 정착할 필요가 있다. 농부, 금융업자, 건축가, 그 밖의 여러 분야의 기술과 재능을 갖춘 사람들은 등한시되어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서 땅을 개간하고, 산업체들을 세우고, 그들 자신을 위하여 평범한 집들을 마련하고, 그들의 이웃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볼품없는 것들 사이에 아름다운 것들을 두심으로써 천연계의 거칠은 장소들, 곧 경작하지 않은 장소들을 매력 있게 만드셨다. 그것이 우리가 착수하도록 부름받은 사업이다. 이 땅의 버려진 곳들, 외관상으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곳들까지도 하나님의 동산같이 될 수 있다.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사야 29장 18, 19절)실제적 분야를 가르쳐 줌으로 우리는 때때로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와 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근면과 인내와 절약과 자제의 습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어떻게 의무를 감당할지 모른다. 만일 주의 깊고 경제적으로 이용했을 것같으면 가족들을 안락하고 손색없이 부양해 주었을 것들이 이따금 주의력과 올바른 판단의 부족으로 없어진다.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하므로 양식이 많아지거늘 혹 불의로 인하여 가산을 탕패하는 자가 있느니라”(잠 13:23).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의존하는 법을 가르쳐 주게 되어 그들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렇게 주는 일은 이기심과 무능력을 조장한다. 때때로 그 일은 게으름과 낭비와 부절제로 기울어지게 한다.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권리가 없다. “세상이 나를 먹여 살려 줄 의무가 있다”는 말은 그 속에 거짓과 사기와 절도의 요소가 들어있다. 세상은 스스로 일을 할 수 있거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을 먹여 살려 줄 의무가 없다.
진정한 자선사업은 사람들을 자기 스스로 도울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 문전에 와서 음식을 달라고 하면, 우리는 그를 주린 채 돌려 보내서는 안된다. 그의 가난은 재난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구제는 단순한 선물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복리에 진정한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의 필요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가장 유익이 되도록 도와 주고자 노력해야 한다. 생각과 시간과 개인적 노력을 주는 것은 단순히 돈을 주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그것이 가장 진실한 구제이다.
벌어서 얻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하는 법을 더욱 쉽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립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자급자족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길을 습득하고 있다. 기회를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애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라. 성경상 종교는 사람들을 게으른 사람으로 결코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라.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지 근면을 권장하신다. 그분께서는 게으른 사람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섰느뇨”라고 말씀하셨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마 20:7, 요 9:4).
복음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어떤 일을 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증거를 그들의 가정생활과 그들의 습관과 행동과 질서를 통하여 세상에 보여 주는 것이 모든 사람의 특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본을 보여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애의 모든면에 있어서 올바른 본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분께서는 거룩한 특성이 외부에서 나타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가정과 환경은 실물교훈이 되어 개선의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리하면 근면과 청결과 취미와 세련이 나태와 불결과 조잡과 무질서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생애와 모본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품성과 환경에 좋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그리스도인 예절로써 개선을 권장할 수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을 나타낼 때 우리는 그들의 정력을 최선껏 활용하는 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줄 기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희망과 용기
우리는 용기와 인내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과 낙심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을 하라. 그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는 필요에 따라 그들을 도와 줌으로써 그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실제적 증거를 보여 주라. 많은 유리한 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도 많은 일에 여전히 실수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실수를 지적당할 때 고통스럽다는 것과, 그들 앞에는 마땅히 따라야 할 적당한 모본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친절이 비난보다 더욱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자 노력할 때, 그들이 최고의 표준에 도달되기를 바란다는 것과 그대가 그들을 도와 줄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라. 혹시 그들이 어떤 일에 실패할지라도 그들을 빨리 정죄하지 말라.단순, 극기, 검약 등은 가난한 사람들이 배워야 할 매우 요긴한 교훈들이지마는 때로는 그들에게 어렵고 달갑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의 모본과 정신은 자만, 과시, 방종, 타락, 나태 등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조장하고 있다. 그런 악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타락과 불행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낮은 계급의 가정에 태어나셨다. 하늘의 대왕, 영광의 왕, 모든 천군 천사의 사령관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낮추시고 인성을 취하셨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빈곤과 굴욕의 생애를 택하셨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동일한 환경에 처하셨다. 수고, 역경, 궁핍은 그분께서 매일 당하신 경험의 부분들이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갈채를 받고자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군대를 지휘하지 않으셨고, 세상의 나라를 통치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부자들의 환심을 사거나 세상의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국가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어떤 지위를 얻고자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함께 거하셨다. 그분께서는 사회의 인위적 차별을 전혀 무시하셨다. 그분은 귀족계급의 사람들, 부자들, 재간 있는 사람들, 학자들,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으셨다.
그분께서는 하늘의 왕이셨지마는 당신의 제자들을 학식 있는 법률가, 통치자, 서기관, 바리새인들 중에서 택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학식과 지위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유전과 미신적 관습에 사로잡혀 있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읽으실 수 있는 분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겸손한 어부들을 택하셨다. 그분은 세리들과 죄인들로 더불어 함께 잡수시고 일반 사람들과 섞이셨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그들과 같이 비천해지고 세속화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교훈과 모본을 통하여 그들에게 바른 원칙을 제시하고 그들을 속되고 타락한 상태에서 건져내기 위해서였다.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의 거짓 표준을 시정하고자 노력하셨다. 그분께서는 세상이 빈곤에 대하여 찍어놓은 낙인을
제거해 버리시고자 당신의 위치를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처지에 두셨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축복하심으로 빈곤으로부터 조소의 비난을 영원히 벗겨 버리셨다.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걸어가신 길을 우리에게 보이시면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눅 9:23).
그리스도인 일꾼들은 사람들을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만나 그들을 교육시키되, 자만심에서가 아니고 품성 형성의 관점에서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일하시고 자신을 부인하셨는지 그들에게 가르쳐주라. 그분에게서 극기와 희생의 교훈을 배우도록 그들을 도와 주라. 그들이 경성하여 유행을 따라 방종하지 않도록 가르치라. 인생은 자아를 즐겁게 함으로 낭비하기에는 너무나 가치 있고, 엄숙하고, 신성한 책임으로 채워져 있다.
가장 좋은 것들
남녀들은 생애의 진정한 목적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빛나고 화려한 것들에 매력을 갖는다. 그들은 세속적으로 탁월한 목적이 그것 때문에 희생당한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들, 곧 단순, 정직, 진실, 순결, 성실 등은 살 수도 팔 수도 없다. 그것들은 무식한 사람이나 교육받은 사람, 비천한 노동자나 명예로운 정치가에게 꼭 같이 값없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다 같이 누릴 수 있는 기쁨, 곧 순결한 사상과 이기심없는 행동을 개발함으로 얻는 기쁨, 동정어린 말을 하거나 친절한 행동을 하는데서 오는 기쁨을 각 사람에게 주셨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빛이 흘러나와 많은 그늘 때문에 어두워진 생애를 밝혀 준다.세속적 사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는 한편, 그들의 영적 필요를 언제나 명심하라. 그대 자신의 생애로써 구주의 보호의 능력을 증거해 주라. 그대의 품성으로써 모든 사람이 도달해야 할 높은 표준을 보여 주라. 단순한 실물교훈을 통하여 복음을 가르치라.
그대가 해야 할 모든 일이 품성 형성에 있어서 하나의 교훈이 되게 하라.
비천한 매일의 업무 속에서, 매우 연약하고 가장 미약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의 임재와 지탱해 주시는 은혜로 위로받을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는 걱정과 쓸데없는 염려로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지정된 과업을 충실히 완수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분께서는 그들을 돌봐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 7).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돌봐 주신다. 그분께서는 생애의 가장 무거운 짐을 지도록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을 가장 부드럽게 동정해 주시는 일 외에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차별해서 사랑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이 그들에게 부여해 주기를 등한히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가장 유익이 되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그분께서 겸손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시는 것은 우리가 가장 어려운 경우에 처할 때이다.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분은 온갖 비상사태에서 그대를 도와 주실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놀라운 육체적, 지적, 영적 능력을 주신 분께서는 당신이 주신 생명을 지탱하는 일에 필요한 것은 결코 보류해 두지않으실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나무의 잎사귀가 되는 말씀을 주신 분께서는 당신의 궁핍한 자녀들에게 어떻게 양식을 공급해 주실 것인지 알려 주지 않은 채 있지 않으실 것이다.쟁기를 쥐고 소를 모는 사람들은 지혜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들은 은을 구하고, 감추인 보화를 찾듯이 지혜를 구해야 한다.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사 28:26, 29).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을 관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분께서는 오늘날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신다.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리는 사람을 위한 지혜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들 앞에 전진할 길을 열어 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용감하게 앞으로 전진해야 하며, 당신의 풍성한 자비를 따라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보리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무리를 먹이신 분께서는 오늘날 우리의 수고의 열매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갈릴리의 어부들에게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신 분, 그리고 그들이 순종할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채워 주신 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 사실을 통하여 당신께서 오늘날도 그들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한 증거를 보기를 원하신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살아 계셔서 통치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지도하시며 그들을 불러 수행하게 할 사업을 감당할 수 있는 재능과 이해력을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의무를 양심적이요 지혜롭게 행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다. 세상을 소유하시는 그분에게는 자원이 풍부하시며,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애쓰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실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늘을 향해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외관상으로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실망해서는 안되며, 성공이 느린 것처럼 보여도 낙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성실한 일꾼이 거두어서 저장하도록 은이나 금보다 더 귀중한 보화를 땅이 그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즐겁고, 희망차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산들과 작은 산들은 변화되고 땅은 옷같이 낡아지고 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광야에 식탁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도와 주어야 할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일에 있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후에도 동정과 보호를 요구하는 과부와 고아와 나이 많은 사람과 속수무책인 사람과 병자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사람들을 결코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청지기로 삼으신 모든 사람들의 자비와 사랑과 친절한 보호를 받도록 위탁하신 사람들이다.
믿음의 가정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특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교인들 중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의무를 맡기셨다. 그분께서는 모든 교회 안에 당신의 가난한 사람들이 있도록 허락하신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교인들에게 그들을 돌볼 개인적 책임을 맡기신다.
한 가정의 가족들이 병자를 돌봐 주고, 약한 자를 도와 주고, 무식한 자를 가르쳐 주고, 경험없는 자를 단련시켜 줌으로 서로 보호하는 것처럼 “믿음의 가정”에서도 가난하고 속수무책인 사람들을 돌봐 주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과부와 고아들
과부와 고아들은 주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네 고아들을 남겨 두라 내가 그들을 살려 두리라
네 과부들은 나를 의지할 것이니라.”
(시 68:5, 사 54:5, 렘 49:11)
많은 아버지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지라는 부름을 받을 때, 그들을 돌봐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죽음의 안식에 들어갔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거나 까마귀를 시켜 음식을 가져 오는 이적을 행하심으로써가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이기심을 제거해 버리고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의 샘물이 터져 나오게 하는 이적을 행하심으로 과부와 고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사별의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귀중한 위탁물로 맡겨 주신다. 그들은 우리의 동정을 가장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생활의 이기(利器)들을 갖추고 있는 집들, 풍성한 수확물로 가득찬 저장소와 곡물창고들, 직조물을 저장해 둔 창고들, 금과 은을 넣어 둔 저장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생계의 수단을 마련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비의 통로가 되도록 요구하신다.
아버지 없는 자녀들을 가진 많은 홀어머니들은 이중의 짐을 지고 용감하게 투쟁하고 있다. 그들은 때때로 그와 함께 있는 어린 것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하여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고를 하고 있다. 그에게는 그들을 훈육하고 교훈할 시간이 별로 없으며, 그들의 생애를 밝혀 줄 감화력을 그들에게 미칠 기회가 별로 없다. 그는 격려와 동정과 실제적 도움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보호에 필요한 것을 할 수 있는 대로 채워 주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초연한 입장에 서서 그들의 실수나 그들이 일으킬 수도 있는 문제들에 관하여 비난하는 대신에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 주라. 걱정에 눌려 있는 어머니를 도와 주기 위하여 노력하라. 그의 짐을 가볍게 해 주라.*
그런데 부모의 지도와 그리스도인 가정의 부드러운 감화를 완전히 박탈당한 아이들이 수 없이 많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마음과 가정을 그처럼 속절없는 아이들을 향하여 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개인의 의무로 그들에게 맡겨 주신 사업은 어떤 자선기관(慈善機關)에 넘겨지거나 세상의 자선사업에 기회를 주기 위하여 남겨져서는 안된다. 만일 그 아이들에게 그들을 돌봐 줄 친척이 없을 경우에는 교인들이 그들을 위하여 집을 제공해야 한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족들과 반드시 연합하고, 어린이의 성격이 그리스도인 가정의 따뜻한 분위기에서 가장 잘 계발되도록 제도를 마련하셨다.자신의 아이들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아이들을 돌봐줌으로써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애완동물에게 관심을 쏟거나 말 못하는 동물들에게 극진한 애정을 바치는 대신에 품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꼴지어질 수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애정을 바쳐야 한다. 집 없는 인간 가족에게 그대의 사랑을 주라.
그대는 그런 어린 아이들 중 몇 사람쯤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라.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이 함으로 자기 자신이 크게 유익을 보게 될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
나이 많은 사람들 역시 가정의 유일한 감화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의 가정에서 자신의 가정에서 상실한 것을 거의 대부분 회복할 수 있다. 만일 그 집안의 관심사와 직업에 동참하도록 권유를 받게 되면 자기들의 유위성(有爲性)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그들에게 생각하게 해 줄 것이다. 그들의 도움이 가치가 있다는 것과, 그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라. 그리하면 그와 같은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고 그들의 생애에 관심을 갖게 해 줄 것이다.
희어져 가는 머리칼과 떨리는 발걸음이 무덤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친구들이나 잘 아는 사람들끼리 지내도록 해 주라. 그들이 잘 알고 피차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해 주라. 그들이 상냥하고 친절한 손길에 의하여 보호를 받도록 해 주라.
사람들이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그들 자신의 친척에게 봉사하는 것이 각 가정에 속한 가족들의 특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그 일이 교회에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특권으로서, 또한 하나의 의무로서 수락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연약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관심을 나타낼 것이다.그처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 우리 가정에 있게 되면 그리스도의 자비의 봉사를 통하여 그분과 협력하고 그분의 품성과 동일한 품성의 특성을 계발시킬 귀중한 기회를 얻게 된다. 늙은이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교제하면 축복이 된다. 젊은이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애에 햇빛을 비추어 줄 수 있다. 생명을 붙잡는 힘이 약해지고 있는 사람들은 유망하고 쾌활한 젊은이들과 교제함으로 유익을 얻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경험을 통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타적 봉사의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다.
동정과 인내와 자아 희생적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많은 가정이 무한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가정생활을 즐겁게 해 주고 순화시켜 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늙은이들과 젊은이들을 거룩한 미(美)로써 꾸며 주고 영원한 하늘의 보화로 풍성하게 해 줄 그리스도와 같은 미덕을 환기시켜 준다.
품성의 시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막 14:7, 약 1:27).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두시고 그들의 보호에 의존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시험하신다. 하나님의 가난한 자녀들에게 나타내는 우리의 사랑과 봉사로써 우리는 그분에 대한 사랑의 진실성을 입증해 준다. 그들을 등한히 하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거짓 제자들이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임을 보여 준다.
여러 가정에서 고아들을 위하여 집을 제공함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을지라도 돌봐 주어야 할 일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어린이들이 유전적으로 악을 이어받고 있다. 그들은 가망이 없어 보이고, 매력적이 못되고, 성미가 비꼬여 있다. 그럴지라도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피로 산 영혼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앞에는 우리 자신의 어린 자녀들과 꼭 마찬가지로 귀중하다. 만일 또 도움의 손길이 그들을 붙들어 주지 않으면 그들은 무식하게 자라나서 부도덕과 죄악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어린이들이 고아원의 사업을 통하여 구제받게 될 것이다.그런 기관들이 효력을 가장 “잘” 나타내려면, 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인 가정 계획에 가깝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많은 수의 어린이들을 함께 수용하는 큰 기관들보다 작은 기관들이 여러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런 기관들은 어떤 도시나 대도시에, 혹은 그 가까운 곳에 세우는 대신에 경작할 땅을 얻을 수 있고, 어린이들이 천연계와 접촉할 수 있고, 노동의 훈련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시골에 세워야 한다.
그런 기관을 책임맡은 사람들은 마음이 관대하고, 교양적이며, 자아 희생적인 남녀들이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그분을 위하여 어린이들을 양육하는 남녀들이어야 한다. 집 없이 버림받은 많은 어린이들은 그러한 보호하에 사회의 유능한 구성원들이 되어 스스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기 위하여 준비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절약을 인색과 편협으로 오해하고 그것을 멸시한다. 그러나 절약은 가장 관대한 자선사업과 일치한다. 사실상 절약이 없으면 진정한 자선사업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주기 위하여 절약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극기없이 진정한 자선을 실천할 수 없다. 오직 단순, 극기, 엄격한 절약의 생활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표자들로서 우리에게 지정된 사업을 완수할 수 있다. 자만심과 세속적 야망은 우리의 마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사업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이타심의 원칙이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 집들의 벽과 그림과 가구들 위에서 우리는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라는 글귀를 읽어야 한다. 우리의 옷장에서 우리는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라는 글귀가 마치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쓴 글귀처럼 쓰여진 것을 보아야 한다. 식당과 풍성한 음식이 실려 있는 식탁에서 우리는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라고 쓰여 진 것을 보아야 한다(사 58:7).
우리 앞에는 유용한 문들이 수 없이 열려 있다. 때때로 우리는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적음으로 탄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철저하고 진지했을 것같으면, 그들은 그 자원들을 천 배로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유용성을 방해하는 것은 이기심과 방종이다.
단순한 우상에 불과한 것, 즉 더욱 고상한데 사용되어야 할 생각과 시간과 힘을 빼앗아 버리는 것들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재물들이 소비되는가! 얼마나 많은 돈들이 비싼 주택과 가구들, 이기적 쾌락, 사치스럽고 불건전한 음식, 해로운 방종등에 낭비되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는 선물에 낭비되는가 ! 필요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로운 것들을 위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유혹자로부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활동에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이, 몇 배나 더 많이 돈을 쓰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의복에 너무 많은 돈을 써 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둔 것이 없다. 그들은 가장 평범한 의복을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필요를 무시하고 그들 자신을 위하여 값비싼 장신구들과 의복들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자매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옷 입는 방법을 성경에서 제시한 원칙과 조화되게 한다면 그대들보다 더 가난한 자매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것을 풍성하게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금전뿐만 아니라 시간도 갖게 될 것이다. 때때로 이 일이 가장 필요하다. 그대들의 제안, 그대들의 기지(機智)와 기술로써 도와 주어야 할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단순하고 품위 있게 옷 입는 법을 알려 주라. 많은 여자들이 그들의 허름하고 어울리지 않은 의복이 다른 사람들의 의복과 너무나 큰 대조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 집에 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대조 때문에 감정이 예민한 많은 사람들은 심한 굴욕감과 불공평하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종교의 본질을 의심하고 복음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무감각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매일 기근과 유혈사태와 화재와 재난으로 죽어가고 있는 동안, 그의 동족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인간에게 도움이 될 것은 아무것도 낭비하지 말고, 쓸데없이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잘못이며, 우리의 사상을 낭비하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는 이기적 욕구에 몰두됨으로 매 순간을 잃어버린다. 매 순간을 가치 있게 여기고 올바르게 활용할 것같으면 우리는 자신들과 세상을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금전을 사용하고 시간과 기회를 활용함에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도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 6:35).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잠 28:27).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부유한 사람이며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신임과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이교도로 태어나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지마는 유대인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참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얻고, 그분을 경배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을 나타냄으로 그의 믿음의 진실성을 보여 주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다(행 10:2).
고넬료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에 계시된 그대로의 복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직접 그에게 기별을 보내셨고, 또한 다른 기별을 통하여 사도 베드로에게 그를 방문하여 가르치라고 지시하셨다. 고넬료는 유대인의 교회에 속해 있지 않았으므로 랍비들에게 이방인이요 부정한 자로 취급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의 진실을 아시고, 당신의 보좌에서 사자들을 보내셔서 지상에 있는 당신의 종과 연합하여 그 로마의 장교에게 복음을 가르치게 하셨다.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물론이요 높은 계급의 사람들 사이에서 영혼들을 찾고 계신다. 그분께서 당신의 교회와 연합시키기를 원하시는 사람들, 곧 고넬료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주님의 백성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과의 유대 관계가 그들을 굳게 붙들어 매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들어가려면 도덕적 용기가 필요하다.
책임과 사회적 교제 때문에 큰 위험에 빠져 있는 그 영혼들을 위하여 특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외면당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관하여 많이 거론되고 있다. 그렇다면 외면당한 부자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부유층의 사람들을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속적 영광에 눈이 멀고 현혹되어 영원한 것을 관심에서 상실해 버린 그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기 위하여 별반 일을 하지 않는다. 부유층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은 경고를 받지 못한 채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외관상으로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지마는 부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혼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좋은 금을 “내 소망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라고 한다.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전 5:10, 욥 31:24, 28, 시 49:7, 8).
부(富)와 세상의 영화가 심령을 만족케 할 수 없다. 부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거룩한 보증, 곧 어떤 영적 소망을 갈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목적없이 지루한 생애를 종식시켜 줄 무엇인가를 갈망한다. 공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지 않는 어떤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별반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이 듣는 교훈은 심령에 감동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호소해야 하지 않겠는가?
궁핍과 죄에 희생이 된 사람들 가운데는 한 때 재산을 소유했던 사람들이 있다. 여러 가지 다른 직업과 인생의 다양한 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세상의 타락한 풍조와 심한 음주와 정욕의 방종으로 유혹에 굴복당하였다. 그처럼 타락한 사람들이 동정과 도움을 구하고 있는 동안, 아직 그와 같은 깊이까지 타락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과 동일한 같은 길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어야 되겠는가?
신임과 영광을 받는 위치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영혼과 육체에 파멸을 가져 오는 습관에 빠져 가고 있다. 복음사업에 종사하는 성직자들, 정치가들, 저술가들, 부유하고 재능이 많은 사람들, 큰 사업을 할 힘과 유용한 일을 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모든 일에 자제할 필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서운 위험에 빠져 있다. 그들은 편협하고 독단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에 대한 빛으로 절제의 원칙에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만일 참된 절제 원칙이 그와 같이 제시된다면 그 가치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될 사람들이 상류계급에 많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능력을 저하시키는 해로운 방종의 결과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청지기로서의 그들의 책임을 깨닫도록 도와 주라. 그들이 오늘날 다만 해가 되는 일에 쓰고 있는 돈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라. 절대 금주에 대한 서약서를 제시하고, 그들이 술과 담배와 방종 등에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돈을 가난한 환자들의 구제와 세상에서 유용한 일을 할 수 있는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바치도록 요구하라. 그와 같은 호소를 듣지 않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부유한 사람들이 특별히 당하는 또 하나의 위험이 있다. 그것 역시 의료선교사가 봉사할 분야이다. 세상에서 부요하게 살면서 그러면서도
일반적 부도덕에는 결코 빠지지 않을지라도 부를 사랑하므로 멸망을 초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가장 운반하기 어려운 잔은 빈 잔이 아니고 위에까지 가득 찬 잔이다. 가장 주의 깊게 균형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런 잔이다. 고난과 역경은 실망과 슬픔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영적 생애에 가장 위험한 것은 번영이다.
실패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본 떨기나무, 곧 불은 붙고 있었으나 타지 않았던 떨기나무에 의하여 묘사된다. 주님의 천사가 그 떨기나무 속에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손실과 고통 중에도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위로해 주고 지탱해 준다. 이따금 질병과 역경 중에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드린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번영하고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하다.
굴욕의 골짜기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궁핍을 느끼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발길을 인도해 주시도록 의지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다. 그러나 이른바 높은 정상에 서 있는 사람들, 그리하여 그들의 높은 지위 때문에 큰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가장 큰 위험에 놓여 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것같으면 그들은 분명히 넘어질 것이다.*사람이 정직하게 재물을 획득하면 성경은 어떤 사람도 부자가 되는 일을 정죄하지 않는다. 돈이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사람에게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재물이 하나님의 청지기로 행동하는 사람의 손에서 이기심 없이 사용될 때, 재물은 그것을 소유할 사람과 세상에 꼭 같이 축복이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보화에 그들의 관심을 빼앗긴 나머지 하나님의 요구와 동료 인간들의 필요에 무감각해진다. 그들은 그들의 재물을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가옥에 가옥을, 토지에 토지를 더해간다. 그들은 그들 주위에 온통 불행과 범죄, 질병과 죽음 속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집을 사치한 것으로 채우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생애를 자신의 잇속을 위하여 바치는 사람들은
그들 속에 하나님의 속성을 계발시키지 않고 악한 자의 속성을 계발시키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이 필요하다. 그들은 헛된 물질적 사물에서 눈을 돌려 영원한 보화의 가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주는 기쁨, 곧 하나님과 협력하는 사람이 되는 축복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신다. “네가 이 시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부유하게 살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은 우연한 접촉이나 뜻밖의 만남으로 그리스도께 인도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때때로 가장 접근하기 어렵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선교 정신으로 무장된 남녀들, 실패하거나 낙담하지 않을 사람들에 의하여 개인적 노력이 주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상류계급의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기에 적합하다. 그런 사람들은 그들과 접촉하는 방법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되, 단순히 그들과 피상적으로 사귀기 위해서가 아니고 개인적 노력과 산 믿음을 통하여 그들에게 영혼의 필요성을 깨우쳐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의 진리를 알려 주기 위하여 구해야 한다.많은 사람들은 상류계급의 사람들과 접촉하려면 생활 방법과 활동 방식이 그들의 까다로운 취미에 맞도록 적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부유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외양, 값진 건물, 비싼 의복과 가구와 환경, 세상 관습과의 조화, 사교계의 인위적 세련미, 전통적 교양, 세련된 언어 등이 필수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세속적 수단에 속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상류계급의 사람들과 접촉하는데 사용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그들을 효과적으로 접촉하는 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끈덕지게, 그리고 사심없이 제시하는 것이다.
아덴의 철학자들을 만났을 때의 사도 바울의 경험은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중 논리는 논리로, 과학은 과학으로, 철학은 철학으로 대항하였다. 그의 청중들 중 가장 현명한 사람도 놀라서 아무 말을 못했다. 그의 말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별반 결실이 없었다.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때부터 바울은 활동의 방법을 바꾸었다. 그는 복잡한 논쟁과 이론적 토론을 피하고, 남녀들에게 죄인들의 구주가 되는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을 대상으로 활동한 자신의 사업에 관하여 편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다시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상류계급의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천사들이 그들의 동료임을 기억하고 참된 위엄을 간직해야 한다. 그들은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으로 충만한 정신과 마음의 보고(寶庫)를 언제나 간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귀중한 말씀들을 기억의 보고에 넣어 두라. 그것들은 금이나 은보다 더 가치가 있다.그리스도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계급의 사람들을 위한 사업에는 낙담되는 일들이 많을 것이고, 마음 아픈 일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분께서는 돈 버는 일에 생애를 바친 사람들의 마음에 인간 기구들을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으며, 또한 역사하실 것이다.
참된 회개에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이적, 곧 지금은 분별되지 않는 이적이 있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도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범위 밖에 있지 않다. 만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 충실하고 용감하게 그들의 의무를 감당할 것같으면, 그분께서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곧 지성과 영향력을 갖춘 사람들을 회개시키실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은 거룩한 원칙을 받아들이게끔 지도될 것이다.
그들이 당신의 대표자로서 고통당하는 인간을 구제하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많은 사람들은 반응을 나타내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의 재물과 동정을 바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의 마음이 이기적 관심에서 떠나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자신을 굴복시키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영향력과 재물의 냥쭝을 가지고, 그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의 기구로 사용되었던 겸손한 전도자와 연합하여 기꺼이 자선사업에 활동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보물을 올바르게 이용함으로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는 하늘에 그들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쌓아 두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동일한 계급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일하는 기구가 될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업이 다만 이 세상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위탁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시간과 돈은 하나님께 드려질 것이고, 재능과 감화력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업에 바쳐질 것이다.
오직 영원만이 이와 같은 종류의 봉사가 어떤 일을 성취하였는지, 곧 의심으로 병들고 세속적 일과 불안으로 피곤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이 당신께 나오는 모든 사람을 끝까지 구원하고자 열망하시는 위대하신 회복자께로 인도되었는지 알려 줄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구주시며 그분에게서 치료하는 광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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