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치료봉사, 1

  • List
 
   

제 1 장
참된 의료선교사

우리의 모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요구를 채워 주기 위하여 지칠 줄 모르는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하여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마 8:17). 그분께서는 병과 불행과 죄의 짐을 제거해 버리고자 오셨다 인간에게 완전한 회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평안과 완전한 품성을 주시고자 오셨다.
그분의 도움을 찾아 온 사람들의 환경과 필요성은 제각기 달랐지마는, 그분께 나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돌아간 일은 없었다. 그분께로부터 치료하는 능력의 물결이 흘러 나왔으며, 사람들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완전해졌다.구주의 사업은 어떤 시간이나 장소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분의 동정은 제한이 없었다. 그분께서는 치료하고 가르치는 당신의 사업을 너무도 대규모로 행하셨기 때문에 당신께로 모여든 무리들을 수용하리만큼 충분히 큰 건물이 팔레스틴에는 없었다. 갈릴리의 푸른 언덕 위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가에서, 바닷가에서, 회당에서, 그리고 병자들을 그분께로 데리고 올 수 있는 어떤 장소에서든지
그분의 병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분께서 통과하신 모든 도시와 모든 마을과 모든 촌락에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손을 앓는 사람들 위에 얹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기별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보증으로 그들을 위로하셨다. 하루 종일 그분께서는 당신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셨다. 그리고 밤에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낮 동안에 적은 돈을 얻기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셨다.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로 무거운 책임을 지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인류의 원칙과 목적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바될 것을 아셨다. 그것이 그분의 심령을 누르는 부담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 위에 지워져 있는 무거운 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분께서는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장년 시절을 통하여 고독하게 걸어 가셨다. 그러나 그분 앞에는 언제나 하늘이 열려 있었다. 날마다 그분께서는 시련과 유혹을 당하셨다.
날마다 그분께서는 죄악을 목격하셨고, 당신께서 축복하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온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죄악의 세력을 보셨다. 그럴지라도 그분께서는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셨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당신의 사명 완수에 엄격히 맞추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뜻에 모든 일을 굴복시킴으로써 당신의 생애를 영화롭게 하셨다. 어린 시절에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그분을 랍비 학교에서 발견하고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셨다. 그 대답은 당신의 평생사업의 근본을 말한 것이었다(눅 2:48, 49).
그분의 생애는 끊임없는 자아희생의 생애였다. 그분에게는 지나가는 나그네로서 당신을 영접해 주는 친구들의 친절한 영접 이외는 이 세상에서 거할 집이 없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장 가난한 자의 생애를 사시고 가장 궁핍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고 일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께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한 채로 당신께서 그토록 많은 일을 행하신 사람 사이로 걸어다니셨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인내하시고 쾌활하셨다. 그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생명과 평화의 사자로 환영하였다. 그분께서는 남녀들과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필요성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셨다.예수님께서 당신의 봉사기간 동안에 설교하는 것보다 병자를 치료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바치셨다. 그분의 이적은 그분께서 멸망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당신의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였다. 그분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의 자비의 소식이 그분을 앞서 갔다. 그분께서 지나가신 곳은 어디든지 그분의 동정을 받은 사람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기뻐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새로 발견한 능력을 시험해 보여 주고 있었다. 무리들은 그들 주위에 모여서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그들의 입을 통하여 듣고 있었다. 그분의 음성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껏 처음으로 들어본 소리였으며 그분의 이름은 그들이 처음으로 말한 처음 불러본 이름이었으며 그분의 얼굴은 그들이 처음으로 쳐다본 얼굴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을 찬양하는 음성을 높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분께서 마을과 도시들을 통과하실 때 그분께서는 마치 생명과 기쁨을 나누어 주는 물줄기 같으셨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마 4:15, 16).
구주께서는 모든 치료의 사업을 사람들의 마음과 심령 속에 하나님의 원칙을 심어 주는 기회로 삼으셨다. 그것이 그분의 사업의 목적이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기 위하여 이 세상의 축복을 나누어 주셨다.그리스도께서는 유대 나라의 교사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그 길을 택하셨다 그분께서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다니시며 큰 길가나 골목길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려 주셨다. 바다에서, 산기슭에서, 도시의 거리에서, 회당에서, 성경을 풀이하고
있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때때로 그분께서는 성전의 바깥 뜰에서 가르치심으로 이방인들도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그리스도의 교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설명하는 것과 너무나 달랐으므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랍비들은 유전에 집착되어 인간의 이론과 사상을 강조했다. 때때로 성경에 관하여 사람들이 가르치고 기록한 것이 성경자체를 대신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훈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분께서는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기록하였으되,”“성경에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너희가 어떻게 읽었느냐?”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친구이거나 원수를 막론하고 어떤 관심이 일어난 것을 볼 때마다 그분께서는 말씀을 제시하셨다. 분명하고 능력 있게 그분께서는 복음의 기별을 주장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부조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에 빛을 비추어 주었으며, 성경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계시로 주어졌다. 그분의 말을 듣는 청중들은 하나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그처럼 깊은 의미를 이전에 결코 깨닫지 못했다.*
그리스도와 같은 전도자는 결코 없었다. 하늘의 왕이셨던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신 것은 사람들을 현실 그대로 만나기 위함이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한 자와 속박되어 있는 자, 곧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언약의 사자로서 구원의 기별을 증거하셨다. 위대한 치료자로서의 그분의 명성은 온 팔레스틴에 퍼졌다. 병자들은 그분의 도움을 요청하고자 그분께서 지나가시는 곳으로 나왔다. 여기 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갈망하여, 또한 그분의 손으로 만져주심을 받고자 나왔다. 그와 같이 영광의 왕께서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들을 고치셨다.그분께서는 그 나라의 큰 연중 축제에 참석하셨다. 그리고 외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그분께서는 하늘의 사물들을
이야기해 주고 영원한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의 보고(寶庫)에서 보화를 가져다 주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단순한 말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그 말을 오해할 수 없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슬픔과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도와 주셨다. 그분께서는 부드럽고 예모 있는 덕성으로 죄에 병든 영혼들에게 봉사하셨고 치료와 능력을 가져다 주셨다.교사들의 왕이신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아는 것을 매개로 하여 백성들과 접근하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그것이 언제나 가장 거룩하게 기억되고 공명될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진리를 제시하셨다.
그분께서는 저들의 유익과 행복을 전적으로 당신 자신의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청중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치셨다. 그분의 교훈은 매우 솔직하고, 그분의 비유는 매우 적절하고, 그분의 말씀은 매우 동정적이며 즐거운 것이었으므로 청중들은 매혹되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단순성과 열성때문에 모든 말은 존중되었다.
그분께서 보내신 생애는 얼마나 바쁜 생애였던가! 날마다 그분께서 궁핍과 슬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의 비천한 가정에 들어가서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근심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은혜롭고 친절하고 동정 깊은 마음으로 그분께서는 눌린 자를 일으키시고, 슬픔에 잠긴 자를 위로하시면서 다니셨다. 그분께서는 어디로 가시든지 축복을 가지고 다니셨다.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한편 부유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발견하고자 연구하셨다. 그분께서는 부유하고 교양 있는 바리새인들, 유대의 귀족들, 로마의 집권자들로 더불어 교제하고자 노력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초청을 받아들이시고 그들의 잔치에 참석하시고 당신 자신이 그들의 취미와 직업에 친숙하시므로
그들의 마음을 얻어 그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한 부(富)를 보여주고자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하늘에서 능력을 받음으로써 흠없는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지칠 줄 모르는 인내와 동정 깊은 도움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그분께서는 부드러운 은혜로 사람들의 심령에서 불안과 의심을 제거해 주시고, 적의(敵意)를 사랑으로 불신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셨다.
그분께서는 마음에 원하는 대로 누구에게나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일어나서 그분을 따랐다. 세상에 사로잡힌 속박은 깨뜨려졌다. 그분의 음성을 듣자마자 탐욕과 야망의 정신은 마음에서 사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구주를 따르기 위하여 일어났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형제의 사랑
그리스도께서는 국적이나 계급이나 신조를 구별하지 않으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지역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민족적인 특권으로 규정하고 세상에 있는 그 외의 하나님 가족들을 제외시키고자 욕망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장벽을 깨뜨려 버리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의 선물이 마치 공기와 햇빛과 땅을 적시는 소낙비처럼 제한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자 오셨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계급 제도가 없는 종교, 곧 유대인과 이방인, 자유자와 노예를 하나의 형제로 연결시켜 주고 하나님 앞에 동등되게 해 주는 종교를 세우셨다. 어떤 정치적인 문제도 그분의 운동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분께서는 이웃 사람들과 낯선 사람들, 친구들과 원수들 사이에 차별을 만들지 않으셨다. 그분의 마음에 충격을 준 것은 생명수를 갈급하는 영혼이었다.그분께서는 어떤 사람도 무가치하게 버리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치료제를 적용시키고자 노력하셨다. 그분께서는 어떤 사람들의
무리 중에 계시든지 그 시간과 환경에 적절한 교훈을 제시하셨다. 사람들이 그들의 동료들에게 나타낸 모든 무관심과 모욕은 다만 그들에게 당신의 신성과 인성을 겸한 동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깨닫게 해 주었다. 그분께서는 가장 거칠은 사람들과 가장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넣어 주고, 그들에게 흠없이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보증을 주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생애할 수 있는 품성을 얻게 해 주셨다.
때때로 그분께서는 사단의 지배 아래 들어가 그 올무에서 벗어날 힘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셨다. 낙심되고, 병들고, 유혹받고 타락한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장 부드러운 자비의 말씀, 곧 그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그분께서는 영혼의 원수들과 백병전(白兵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셨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분께서는 인내하도록 격려하고 그들이 승리할 수 있다는 보증을 해 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들 곁에 있으며 그들에게 승리를 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존경받는 손님으로서 세리의 식탁에 앉으셨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당신의 동정과 사교적인 친절로써 당신께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분의 신임을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위치에 놓이고자 갈망했다. 그들의 갈급한 마음에 그분의 말씀은 복되고 생명을 주는 능력으로 전달되었다. 새로운 충동이 일어났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그 사람들에게 새생애의 가능성이 열려졌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람이었지마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사귀었으며 당신의 동족인 바리새인들의 관습을 무시하셨다. 그들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그 멸시받은 사람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지붕 아래서 그들과 함께 주무셨고 그들의 식탁에서 그들과 함께 잡수셨으며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주는 음식을 같이 나누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의 거리에서 가르치고 무한한 친절과 예의로써 그들을 대하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동정의 줄로써 그들의 마음을 당신께로 이끄시는 한편 당신의 거룩한 은혜로써 유대인들이 거절한 구원을 그들에게 가져다 주셨다.
개인적 봉사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놀라운 말씀을 들어보라. 그분께서는 그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을 때에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계셨다. 그분께서는 그 여자에게 한 가지 요청을 하심으로 그를 놀라게 했다. 그분께서는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시원한 물 한 모금을 얻고자 하셨으며, 또한 생명의 샘물을 그 여자에게 줄 수 있는 길을 열고자 원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당신은 유대인
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말하였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더라.”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너에게 주었으리라 …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7-14).
그리스도께서는 이 한 여자에게 얼마만큼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셨는가! 그분의 말씀은 얼마만큼 열렬하고 웅변적이었는가! 그 여자가 그 말을 들었을 때에 그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마을로 뛰어가서 그의 친구들에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요 4:29, 39). 그리고 그 말이 그 당시부터 여러 해를 지내면서 영혼을 구원하는데 큰 역할을 한 그 감화력을 누가 감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어디에서나 진리를 받고자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교훈하시고자 하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시고 마음을 아시는 그분께서 받으실만한 봉사가 무엇임을 말씀해 주신다.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그분께서는 비유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다”고 말씀하신다.
봉사의 날들

가버나움의 한 어부의 집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다.” 그러자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구주와 그분의 제자들에게 봉사하였다(눅 4:38, 막 1:30, 마 8:15).
그 소식은 신속히 퍼져 갔다. 그 이적은 안식일에 행해졌으므로 사람들은 랍비들을 두려워하여 해가 지기 전에는 치료를 받으러 오지 못했다. 그러나 해가 진 후에 집에서, 상점에서, 시장에서, 그 마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초라한 오막살이로 몰려왔다. 병자들은 들것에 들려, 지팡이에 의지하여,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힘 없이 비틀거리면서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사람들은 몰려왔다가 몰려가곤 했다. 내일 그 동일한 치료자를 그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가버나움에서 그 날의 일과 같은 것을 본적이 없었다. 승리의 음성과 구원의 함성으로 공중은 충만해 졌다.예수님께서는 마지막 환자가 고침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당신의 일을 멈추셨다. 무리들이 떠나 가자 이미 밤은 깊어졌고 시몬의 집
은 적막에 싸였다. 지루하고 분주했던 하루는 지나갔고, 예수님께서는 휴식을 찾으셨다. 그러나 도시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에 구주께서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 하셨다”(막 1:35).
아침 일찍이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가버나움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을 찾고 있다고 말하였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눅 4:43)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그 당시에 가버나움에 있던 흥분 상태로 볼 때 그분의 사업의 목적이 상실될 위험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적을 행하는 사람이나 육체적 질병을 고쳐 주는 사람으로 당신 자신이 주목을 받는 일을 만족히 여기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주로 알려 주고자 노력하고 계셨다. 사람들이 그분을 세속적 나라를 통치할 왕으로 오신 분이라고 열렬히 믿고 있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세속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돌이키고자 열망하셨다. 단순한 세속적 성공은 그분의 사업을 방해할 것이었다.주의성 없는 무리들의 경탄(驚嘆)은 그분의 마음에 거슬렸다. 그분의 생애에는 자신을 내세우는 주장이 전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지위와 재물과 재능에 대하여 돌리는 존경은 인자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사람들이 충성심을 얻거나 존경심을 요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어떤 수단도 예수님께서는 사용치 않으셨다. 그분께서 출생하시기 여러 세기 전에 그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되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 42:2, 3).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까다로운 형식주의와 그들의 예배의 허식과 그들의 자선 행위로써 두드러지게 나타나고자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토론의 주제로 만듦으로 그들의 종교에 대한 열성을 증거하였다. 교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은 요란하고도 지루하였다. 거리에서 율법을 잘 아는 학자들이 내뱉는 분노한 논쟁의 음성을 듣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 모든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 생애에는 시끄러운 논쟁, 허식적인 예배, 칭찬을 받고자 하는 행동 등을 볼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품성 가운데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계시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고자 열망하셨다.
의의 태양께서는 당신의 영광으로 빛나는 화려한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다고 기록되어 있다(호 6:3). 조용하고 부드럽게 새벽 빛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세상에 생명을 일깨워 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의의 태양께서는 “치료하는 광선을” 가지고 떠오르신다(말 4:2).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사 42:1)
“주는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사 25:4)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42:5-7)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사 42:16)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광야와 거기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의 거하는 촌락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거민들은 노래하며
산 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지어다”
(사 42:10-12).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삼림과 그 가운데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실 것임이로다”
(사 44:23).*
헤롯의 감옥에서, 구주의 사업에 관하여 실망과 낭패를 안고 있던 그곳에서, 침례 요한은 사태를 주시하고 기다린 나머지 그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하였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3).구주께서는 그 제자들의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분의 침묵을 이상히 생각하면서 서 있는 동안, 앓는 사람들이 그분께로 나오고 있었다. 전능하신 치료자의 음성이 귀머거리의 귀를 뚫고 들어갔다. 그분께서 손으로 한 번 만지시면서 말씀하시자, 소경의 눈이 열려 대낮의 빛과 천연계의 모습과 친구들의 얼굴과 구주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분의 음성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건강하고 활기 찬 모습으로 일어났다. 중풍병 걸리고 사귀 들린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자 그들의 광기(狂氣)는 떠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을 경배하였다. 랍비들에게 불결한 사람들이라고 도외시되어온 가난한 농부들과 노동자들이 그분의 주위에 모
여들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영생의 말씀을 들려 주셨다.
그와 같이 그 날은 지나가게 되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부르시고, 가서 그들의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 기별을 가지고 갔으며,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요한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회상하였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심이라 (사 61:1, 2). 나사렛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야셨다. 그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는 고통당하는 인간의 필요성을 따라 봉사하시는 그분의 사업에 나타났다. 그분의 영광은 우리의 낮은 신분까지 내려오신 그분의 겸손에서 보여졌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그분께서 메시야가 되심을 선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나라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 보여주었다. 요한에게는 광야에 있던 엘리야에게 나타났던 것과 동일한 진리가 계시되었다.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라(왕상 19:11, 12), 그러나 불 후에 하나님께서 세미한 소리로써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왕위와 나라들을 전복하거나, 화려한 것과 외관상 과시로 당신의 사업을 수행하실 것이 아니고, 긍휼과 자아희생의 생애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하심으로 수행하실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부적 과시를 수반하여 임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부드러운 영감을 통하여, 성령의 내적 역사(內的役事), 곧 생명되시는 분과의 영혼의 교통을 통하여 오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위대한 능력의 표현은 그리스도의 품성의 완전함에 도달한 인간의 성품 속에 보여진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한 노력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훌륭한 선(善)을 자랑하기 위하여 자기 만족에 도취된 어떤 노력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심령이 하늘 나라의 원칙에 잠겨 지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세상과 접촉할 때, 그들 속에 있는 빛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생애의 모든 면에 나타나는 그들의 확고한 성실성은 빛을 비추는 수단이 될 것이다.*재물과 높은 지위, 값비싼 장비, 건물과 설비 등은 하나님의 사업을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허영심을 조장시켜 주는 것은 성공이 아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세속적인 과시는 하나님의 안목에 무가치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것을 가치있게 여기신다. 전자는 후자를 나타내 줄 때에만 가치가 있다. 가장 잘 정선된 예술품도 심령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열매인 품성의 아름다움과 비교될 수 있는 미(美)를 간직하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주셨을 때, 그분께서는 불멸의 재산, 곧 세상이 창조된 이래 사람들이 축적해 온 부(富)도 그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재산을 인류에게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간직되어 온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 앞에 서셨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분과의 연결을 통하여 받고 나타내고, 나누어 주어야 할 보화이다.
하나님의 사업에 있어서의 인간의 노력은 헌신적인 일꾼의 활동에 의하여, 생애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냄으로써만 능률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을 우리에게 치셨고,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의 품성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계시므로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의 구속주께서는 당신의 의로써 우리를 덮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봉사사업에 남녀들을 택하실 때, 그들이 세속적 재산과 학문과 웅변력을 소유하고 있는지 묻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신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나의 길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겸손하게 걸어가고 있는가? 내가 나의 말을 그들의 입술에 넣어 줄 수 있는가? 그들이 나를 대표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성전에 당신의 성령을 넣어 주실 수 있는 비례만큼 각 사람을 사용할 수 있으시다. 그분께서 가납하실 사업은 당신의 형상을 반영하는 사업이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의 영원한 원칙에 속한 불후의 특성들을 세상에 제시할 그들의 신임장으로 간직해야 한다.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예수님께서 도시들의 거리에서 봉사하시자 어머니들이 그들의 병들고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을 품에 안고 군중을 헤치며 그분의 시선이 미치는 지점까지 나오고자 애쓰고 있다.
핏기없이 지쳐 있는 그 어머니들, 거의 절망적이면서도 굳은 결심과 인내력을 잃지 않고 있는 그 모습들을 바라보라. 그들은 고통의 짐을 진 채 구주를 찾고 있다. 밀려 오는 군중 때문에 그들이 뒤로 물러가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겨 마침내 그들 곁으로 접근해 가신다. 희망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솟아난다. 그들이 그분의 시선과 마주치고 긍휼과 사랑이 충만한 그 눈을 바라볼 때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그 무리들 중 한 사람을 골라내어, 구주께서는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줄까”하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여자의 신뢰심을 불러 일으키신다. 그 여자는 흐느끼며 “주님, 나의 아이를 고쳐 주소서”라고 말하므로 그의 가장 큰 소원을 아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어린 아이를 그 여자의 팔에서 받으신다. 그분께서 그 아이를 만지시자 질병은 즉시 물러간다. 창백한 죽음의 흔적은 사라지고, 생명의 물결이 혈관을 통하여
흐르고, 근육은 힘을 얻는다. 위로와 평안의 말씀이 그 어머니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그 일과 마찬가지로 긴급한 또 다른 상황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주는 당신의 능력을 다시 발휘하신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된다.우리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생애에 대하여 많이 생각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에 관하여, 그분께서 행하신 이적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적은 것으로 간주된 사물들에 기울인 그분의 주의력은 그분의 위대함을 더욱 잘 나타내 주는 증거이다.유대인들 중에는 어린이들을 어떤 랍비에게 데리고 가서 그의 손을 그들 위에 얹고 축복하게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구주의 사업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일로 방해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어머니들이 그들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 달라고 그분께 요청할 때, 제자들은 그들을 불쾌하게 쳐다보았다. 그들은 그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유익을 얻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분께서 그들이 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그들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그 어머니들의 염려와 근심을 이해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당신이 계신 곳으로 오게 하셨다.
한 어머니는 예수님을 찾고자 그의 아이를 데리고 집을 떠났다. 도중에서 그는 이웃 사람에게 자기의 용무를 이야기하였더니 그 이웃사람 역시 그의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축복받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몇 사람의 어머니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왔다. 그 어린이들 중 몇은 이미 영아기를 넘어서 유년기와 소년기에 도달해 있었다. 그 어머니들이 소원을 아뢰자, 예수님께서는 동정의 마음으로 그들의 수줍고 눈물어린 요구를 들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고자 기다리셨다. 제자들이 그 어머니들을 책망하면서 그들을 쫓아 버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을 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보시고, 그분께서는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잘못을 알려 주셨다. 그분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당신의 팔에 안으시고, 당신의 손을 그들 위에 얹으시고, 그들이 받으러 온 축복을 베푸셨다.
어머니들은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축복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새로운 기분으로 그들의 의무를 감당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희망찬 마음으로 일할 용기를 얻었다.
만일 그 어린 아이들의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면, 우리는 그 어머니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그 날의 광경을 회상시켜 주고, 사랑스러운 구주의 말씀을 그들에게 되풀이해서 들려주는 것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훗날에 그 어린이들이 참으로 자주 그 말씀들을 기억함으로써 주님의 구원받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셨던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동정 깊은 구주이시다. 그분께서는 유대나라에서 어린 아이들을 팔에 안으셨던 그 당시와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진실로 어머니들을 도우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가정에 있는 자녀들은 옛날의 어린 아이들과 꼭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로 산 영혼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어머니의 마음 속에 있는 부담을 아신다. 궁핍과 가난으로 고생한 어머니를 모셨던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모든 어머니를 동정하신다. 가나안 여인의 근심된 마음을 위로하고자 긴 여행을 하셨던 그분께서는 오늘날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꼭 같은 일을 해주실 것이다. 나인성 과부에게 그의 독자를 돌려 주셨고,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당신의 어머니를 기억하셨던 그분께서는 오늘날도 어머니들의 슬픔을 동정하신다. 모든 슬픔과 고난을 그분께서는 위로하시고 도와 주실 것이다.
어머니들로 하여금 그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가게 하라.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돌보는데 필요한 충분한 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짐을 구주의 발 앞에 내려놓고자 하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문이 열려 있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막 10:14)고 말씀하신 분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들에게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당신의 축복을 받으라고 초청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데리고 온 어린 아이들 중에서 당신의 은혜의 후사와 당신의 나라의 백성이 될 남녀들을 보셨다. 그리고 그들 중 어떤 어린이들은 당신을 위하여 순교자가 될 것을 보셨다. 그분께서는 그 어린 아이들이 장성한 사람들, 곧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으로 현명하고 마음이 굳어져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쉽게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그들의 구속주로 받아들일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실 때, 그들의 수준까지 낮추셨다. 하늘의 왕이신 그분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고, 그들의 순진한 이해력에 맞도록 당신의 중요한 교훈들을 단순하게 풀이하셨다. 그분께서는 훗날에 자라나서 영생의 열매를 맺을 진리의 씨를 그들의 마음에 심으셨다.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각 시대에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곧 교회의 직원들과 목사들과 조력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당신께 이끌고 계신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것은 만일 그대들이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면 그들이 올 것이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뜻이다.그대들은 비그리스도인적 품성으로 예수님을 그릇되게 나타내지 않아야 한다. 그대들의 냉랭하고 거칠은 태도로 어린 아이들을 그분께로부터 떠나가게 하지 말라. 만일 그대가 하늘에 있다면 하늘이 즐거운
장소가 될 수 없다는 느낌을 그들에게 주지 않도록 하라. 종교란 어린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거나, 마치 그들이 어린 시절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종교란 우울한 종교라는 것과 구주께 나오면 생애를 즐겁게 해주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그릇된 인상을 주지 말라.
성령께서 어린이들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실 때 그분의 사업에 협력하라. 구주께서 그들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과 그들이 원기왕성한 꽃다운 시절에 자신들을 구주께 바치는 것이 그분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라.
부모의 책임
구주께서는 당신의 피로 산 영혼들을 무한한 자비로 돌보신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다. 그분께서는 말할 수 없는 열망으로 그들을 바라보신다. 그분의 마음은 잘 양육받은 가장 매력적인 어린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유전과 태만으로 좋지 못한 품성의 특성을 가진 어린이들에게로 끌려간다. 많은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특성들에 대하여 그들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녀들의 품성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그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자비와 지혜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어린이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 보신다. 그분께서는 원인에서 결과까지 알아 보신다.
그리스도인 일꾼은 결함 많고 잘못된 그 어린이들을 구주께로 인도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될 수 있다. 지혜와 기지로써 그는 그들을 자기의 마음에 붙들어 매고,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그들에게서 품성이 변화된 것을 보고, 그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섯 덩이의 적은 보리떡으로 무리들을 먹임
그리스도께서 바닷가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하루 종일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을 따라 모여들었다. 그들은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너무도 단순하고 쉬웠기 때문에 그들의 심령에 마치 길르앗의 유향과 같았다. 그분의 거룩한 손의 치유력은 앓는 자들에게 건강과 죽어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날은 마치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식사 후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는지조차 깨닫지 못하였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마침내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와서 그들 자신들을 위하여 무리들을 보내야겠다고 주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먼 곳에서 왔으며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 주위에 있는 마을과 촌락에서 그들은 음식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마 14:16). 그리고 그분께서는 빌립을 돌아보시며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질문하셨다(요 6:5).
빌립은 눈을 들어 사람의 물결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 많은 무리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200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떡을 구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충분치 못하고 조금씩 밖에 안돌아가겠다고 대답하였다.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들 가운데서 얼마만큼의 음식물을 발견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셨다. 그러자 안드레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말했다(요 6:9).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당신께로 가져 오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풀밭에 앉히라고 명령하셨다. 그 일이 다 이루어지자
그분께서는 그 음식물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게 되었다(마 14:19, 20).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먹이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신 이적이었다. 그러나 제공된 음식물은 갈릴리의 어부들이 매일 먹는 물고기와 보리떡에 불과한 것,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음식물이 아니었던가.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호화로운 식사를 제공할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단순히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준비된 음식물은 그들에게 유익한 교훈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이 이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단순성(單純性)의 교훈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만일 오늘날의 사람들이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생활했던 것처럼 천연계의 법칙에 조화되게 생활함으로써 그들의 습관이 단순했을 것같으면, 인류의 필요는 풍성하게 채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기심과 식욕의 방종이 죄악과 불행을 초래하여 한편으로는 폭음폭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궁핍하게 되었다.예수님께서는 사치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켜 주심으로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끌고자 하지 않으셨다. 흥분되고 긴긴 하루를 보낸 후 피곤하고 배고픈 그 큰 무리에게 주어진 그 단순한 식사는 그분의 능력과, 일상생활에서 그들을 돌보시는 그분의 사랑의 보증이 되었다. 구주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호화로운 것을 주시기로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운명은 빈곤으로 둘러싸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그들의 필요가 채워질 것이라고 보증해 준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세상의 물질보다 더 좋은 것, 곧 당신 자신이 임하심으로 마음 속에 거하는 위로를 약속하신다.
무리들이 먹고난 후에도 많은 음식이 남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명령하셨다(요 6:12). 이 말씀은 음식물을 광주리에 담으라는 말 이상의 뜻이었다. 그 교훈은 이중적(二重的)이었다. 아무것도 낭비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속적 유익이 지나가 버리도록 방임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인류의 유익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주린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거두어 들이라. 그와 꼭 같은 주의력으로 우리는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고자 하늘에서 온 떡을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관련된 말씀은 하나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한 말씀도 헛되이 땅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보리떡의 이적은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5,000명을 먹이실 때 가까이에 음식물이 없었다. 그분에게는 당신의 명령대로 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분께서는 그곳 광야에서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이외에 5,000명의 사람들과 함께 계셨다. 그분께서는 무리들에게 당신을 떠나 그곳까지 오라고 초청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있고 싶은 열성 때문에 초청이나 명령을 받지 않고 왔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이 하루 종일 당신의 교훈을 들었으므로 배가 고프고 지쳐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들은 집에서 멀리 떠나 있었고 밤은 가까왔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음식을 살 돈이 없었다. 그들을 위하여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하셨던 분께서는 그들을 주린 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실 것이었다.하나님의 섭리가 예수님을 그곳에 계시게 하였으므로, 그분께서는 어려움을 해결할 길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의존하셨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 모든 비상사태에서 우리는 무한한 자원을 좌우하시는 분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이 이적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상호간에 나누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모든 사람은 그분에게 생명의 떡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사람들 사이에 임명된 교통의 수단이다.
제자들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한 구주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온갖 어려움이 생겼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게 하겠느냐”고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던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먹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봉사하라고 명령하셨다. 음식물은 그분의 손에서 불어났다.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뻗혀진 제자들의 손은 채워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조금 밖에 안되는 그 식물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였다. 무리들이 먹고나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서 공급된 귀중한 음식을 먹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 무지한 사람들,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깨달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자주 위축되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의문을 품는다. “우리의 연약한 힘과 빈약한 자원이 이 큰 필요를 어떻게 채워 줄 것인가? 우리는 그 사업을 지도하기 위하여 더욱 큰 재능을 가진 어떤 사람이나 그 일을 맡아 줄 어떤 기관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그대가 가진 재산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라. 그대의 보리떡을 예수님께 가지고 가라.비록 그대의 자원이 수천 명을 먹이기에는 충분하지 못할지라도 한 사람을 먹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손에 들어가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처럼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라. 그리스도께서는 그 선물을 증가시켜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정직하고 단순하게 의지할 때 갚아
주실 것이다. 보잘 것없는 공급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 것이 풍성한 잔치가 되었음이 입증될 것이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고후 9:6-11) 지리라.
천연계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제함

구주의 지상생애는 천연계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제하는 생애였다. 이 교제를 통하여 그분께서는 능력 있는 생애의 비결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열렬하고 지칠 줄 모르는 일꾼이셨다. 그분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살아간 사람은 없다. 세상의 슬픔과 죄의 짐을 그분보다 더 무겁게 지셨던 분은 없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아를 불태우는 그런 열성을 가지고 일하신 분은 없다. 그럴지라도 그분께서는 건강한 생애를 사셨다. 영적으로는 물론이요 육체적으로도 그분께서는 “흠없고 점없는”(벧전 1:19) 희생제물의 어린 양으로 대표되셨다.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모든 인류에게 성취되기를 기대하신 바 모본이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쳐다보았을 때, 그분의 얼굴에서 거룩한 동정심과 지각하는 능력이 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영적 생명의 분위기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분의 태도는 친절하고 겸손한 반면에, 그분께서는 감취어 있으면서도 완전히 숨겨질 수 없는 어떤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였다.주님께서는 봉사생애 동안 당신의 생명을 노리는 교활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추적을 당하셨다. 정탐꾼들은 그분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을 대적할 기회를 포착하고자 그분의 말씀을 주시하였다. 그 나라의 가장 영리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논쟁을 통하여 그분을 패배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없었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의 비천한 교사에게 패배와 수치를 당하여 싸움터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교훈에는 사람들이 이전에 결코 소유해 본 적이 없는 참신함과 능력이 있었다. 심지어 그분의 원수들까지도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지내신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세대의 인위적 습관으로 물들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목수간의 작업장에서 일을 하며 가정 생활의 짐을 지고 순종과 수고의 교훈을 배우시면서 천연계 속에서 휴식을 찾으셨다. 그리하여 천연계의 신비를 이해하고자 애씀에 따라 그 속에서 지식을 얻으셨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셨다. 그리고 그분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노동하던 장소를 떠나 들로 나가 조용한 산골짜기에서 명상하고, 산허리나 수풀의 나무들 사이에서 하나님과 교통할 때였다. 이따금 이른 아침에 어떤 후미진 장소에서 명상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시는 그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찬미의 노래로써 아침 빛을 맞이하셨다. 그분께서는 감사의 노래로써 당신의 노동시간을 즐겁게 하고, 수고에 지치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기쁨을 안겨 주셨다.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봉사생애 동안 대부분 옥외(屋外)에서 보내셨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여행하실 때 그분께서는 걸어 다니셨고, 대부분의 교훈은 옥외에서 하였다. 당신의 제자들을 훈련시키실 때 그분께서는 이따금 혼잡한 도시를 떠나 조용한 시골을 찾아 가심으로써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단순성과 믿음과 자아희생의 교훈에 훨씬 잘 조화가 이루어지게 하셨다. 열 두 제자를 사도로 임명하고 산상설
교를 하신 곳은 갈릴리 바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산허리의 나무 그늘 아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푸른 하늘 아래서, 풀이 많은 언덕 위에서, 호숫가에서, 사람들을 당신의 주위에 모으시기를 좋아하셨다.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업적으로 둘려 있는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인공적인 것으로부터 천연적인 것으로 돌이킬 수 있었다. 천연계의 성장과 발전에 그분의 나라의 원칙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눈을 들어 하나님께 속한 언덕들과 그분의 손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업적들을 바라볼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속한 귀중한 교훈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미래의 어떤 날 그 거룩한 교사의 교훈들은 천연계의 사물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반복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신은 향상되고 마음은 휴식을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사업을 통하여 당신과 관련되어 있는 제자들을 이따금 얼마 동안 해방시켜 줌으로써 가정을 찾아 가 휴식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을 활동에서 떠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분께서는 온종일 당신께 나오는 무리들에게 봉사하셨다. 그리고 땅거미 질 무렵이나 이른 아침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하기 위하여 산 속에 있는 성소를 찾아 가셨다.쉴새없는 활동과, 원수와 랍비들의 거짓 교훈과의 투쟁이 그분을 완전히 지쳐버리게 했으므로 이따금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그분의 생명이 희생당하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고된 하루를 마치고 기도시간에서 돌아오실 때, 그들은 그분의 얼굴에서 화평의 모습을, 그리고 그분의 온 몸에 퍼져 있는 듯한 활기와 생기와 힘을 목격하였다. 매일 아침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단 둘이 보낸 시간에서 얻은 하늘의 빛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가지고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첫 선교여행에서 돌아오자 즉시,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라고 명령하셨다. 제자들은 복음의 사신으로서 성공한 기쁨을 안고 돌아왔다. 그 때 그들은 헤롯의 손에 침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심한 슬픔과 낙망의 소식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침례요한을 옥에서 죽도록 버려두심으로써 제자들의 믿음에 큰 시험을 준 것을 아셨다. 동정 깊은 친절로써 그분께서는 슬픔의 눈물에 젖어 있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셨다. 주님께서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의 눈과 음성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갈릴리 바다 북쪽 끝, 벳세대 가까운 곳에 싱싱한 봄철의 신록으로 꾸며진 아름답고 조용한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휴식하게 되었다. 그 장소를 향하여 그들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갔다. 여기에서 그들은 혼잡한 군중들을 떠나서 휴식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반박과 비난으로 방해를 받지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주님과 교제함으로 짧은 기간의 친교를 나누고자 희망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만 짧은 기간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귀중한 것들이었던가. 그들은 복음 사업과, 사람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진리의 보화들을 열어 주실 때, 그들은 거룩한 능력으로 힘을 얻고 희망과 용기로 고취되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얼마 후에 무리들에게 발각되셨다. 그분께서는 흔히 휴식하러 가시던 장소에 계신 줄로 생각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곳까지 그분을 따라왔다. 단 한 시간의 휴식이라도 얻어 보고자 했던 그분의 희망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양들의 선한 목자이신 그분께서는 당신의 순결하고 동정 깊은 마음 속에, 끊임없이 갈급한 심령을 가진 그 무리에 대한 사랑과 자비만을 가지고 계셨다. 하루 종일 그분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셨다. 그리고 밤이 되자 그들을 흩어 가정으로 돌아가 쉬게 하셨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완전히 헌신하는 생애 속에서, 구주께서는 끊임없는 활동과 인간의 필요에 부딪히는 일을 떠나서 휴식을 찾고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한 교제를 나누어야 할 필요를 깨달으셨다.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이 떠나가자 그분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신다.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고난당하고, 죄많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당신의 심령을 쏟아놓으신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쉬지 않고 일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시고,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명령하셨다(마 9:38). 그분께서는 당신의 최초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바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수고에 지친 당신의 일꾼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훈련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과, 천연계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할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세상과 세상의 풍습과 습관에 일치되지 않은 생애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얻는 일에 있어서 개인적 경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분께서 마음 속에 말씀하시는 음성을 개인적으로 들어야 한다. 모든 다른 음성이 그치고 정적 속에서 그분 앞에 나갈 때, 조용한 심령은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확실히 구별하게 된다. 그분께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시 46:10).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모든 활동에 있어서 효과적인 준비가 된다. 분주한 군중들과, 긴장된 생애의 활동 속에서 이와 같이 기운을 회복한 사람은 빛과 화평의 분위기에 싸이게 될 것이다.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의 생애는 향기를 발산하고, 사람들의 심령과 접촉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믿음의 접촉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 9:21). 이 말은 한 불쌍한 여자, 곧 12년 동안 그의 생애를 괴롭힌 질병으로 고생한 한 여자의 말이었다. 그는 그의 모든 재산을 의사들과 치료에 써 버렸지마는, 다만 고칠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치료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그의 희망은 소생되었다. 그 여자는 “만일 내가 그분께 이야기할 수 있으리만큼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유대의 랍비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막 5:23). 이 간절한 탄원은 부드럽고 동정깊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을 향하여 즉시 출발하였다.그리스도의 주위에 무리들이 밀려왔기 때문에 그들은 천천히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군중을 뚫고 나가시는 중에 구주께서는 앓는 여자가 서 있는 곳 가까이 이르셨다. 그 여자는 주님께 접근하고자 거듭거듭 애를 써 보았지마는 헛수고에 불과했다. 이제 그 여자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그분에게 이야기할 길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시는 주님의 진로(進路)를 방해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분의 겉옷을 만짐으로 치료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고침을 받을 기회를 놓칠까 염려한 나머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자의 마음을 아시고 그가 서 있는 곳으로 발을 옮기셨다. 그분께서는 그 여자의 큰 필요를 깨닫고, 믿음을 행사하도록 그를 도와 주고 계셨다.
그분께서 지나가시자 그 여자는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겉옷자락을 간신히 만지는데 성공했다. 그 순간 그는 고침을 받은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 일촉(一觸)에 그 여자의 일생의 믿음이 집중되었다. 즉시 그의 고통과 질병은 사라졌다. 그 여자는 그 순간에 온 몸을 통하여 흐르는 전류와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에게 완전한 건강이 주어졌다는 느낌이 왔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 5:29).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해 진 그 여자는 12년의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의사들이 한 것보다 더 큰 일을 단 한 번의 접촉으로 이루어 주신 위대하신 치료자 예수님께 감사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여자는 감사한 마음으로 군중 속에서 빠져 나가고자 노력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고 주위를 둘러보시며,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질문하셨다.
베드로는 놀란 표정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고 대답하였다(눅 8:45).
예수님께서는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고 말씀하셨다(46절). 그분께서는 주의성없는 무리들의 우연한 접촉과 믿음의 접촉을 분별할 수 있으셨다. 어떤 사람이 심각한 목적을 가지고 그분을 만졌고 응답을 받았던 것이다.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 진상을 알고자 질문하지 않으셨다. 그분께는 사람들과, 당신의 제자들과, 그 여자에게 줄 교훈이 있었다.
그분께서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희망으로 고무시키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치료의 능력을 가져 온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를 원하셨다. 그 여자의 믿음을 설명없이 지나쳐 버려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가 감사한 마음으로 나타내는 신앙고백으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그의 믿음의 행위를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그에게 이해시키기를 원하셨다. 그분께서는 다만 절반 쯤 축복한 채 그 여자를 보내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 여자는 자기의 고통을 주님께서 알고 계셨다는 것과, 그분께 나오는 모든 사람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과 능력을 믿는 그의 믿음을 그분께서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버려두어서는 안될 것이었다.그 여자를 바라보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누가 당신을 만졌는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것을 깨닫고, 그 여자는 떨면서 앞으로 나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는 감사의 눈물을 머금고 모든 사람 앞에서 그가 그분의 겉옷을 만진 이유와 즉시로 고침을 받게 된 내력을 그분께 이야기하였다. 그 여자는 그분의 겉옷을 만진 것이 일종의 참람된 행위가 아니었는지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입에서는 한 마디의 책망도 나오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다만 칭찬하는 말씀만을 하셨다. 그 말씀들은 인류의 불행에 대한 동정으로 충만해 진 사랑의 마음에서 나왔다. 그분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눅 8:48). 그 말씀은 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을까? 이제 그의 기쁨을 쓰라리게 만들었던 공포감은 사라졌다.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어 온 호기심에 찬 군중들에게는 생명력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분을 만진 병든 그 여자는 고침을 받았다. 그러므로 영적 일에 있어서는 우연한 접촉과 믿음의 접촉이 구별된다. 그리스도를 단순히 세상의 구주로 믿는 믿음은 영혼에게 치료를 결코 가져다 줄 수 없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므로 내가 그분을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된다(요 3:16). 내가 그분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께 나올 때, 나는 그분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내가 이제 사는 생애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갈 2:20).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일종의 견해라고 주장한다. 구원하는 믿음은 일종의 거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하나님과 언약관계로 연결하게 된다. 산 믿음은 활력과 신뢰심의 증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산 믿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람에게 승리하는 능력이 된다.
믿음은 죽음보다 더 강한 정복자이다. 만일 병자들로 하여금 믿음의 눈으로 강력한 치료자 예수님을 바라보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놀라운 결과를 목격할 것이다. 그것은 육체와 심령에 생명을 가져다 줄 것이다.악습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일할 때, 그들이 신속히 달려가고 있는 절망과 파멸을 지적해 주는 대신, 그들의 눈을 예수님께로 돌려 주라. 그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주목하게 하라. 이것은 속절없고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앞에 펼쳐져 있는 무덤의 온갖 공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육신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하게 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한 백부장의 종이 중풍병으로 누워 있었다.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종은 시장에서 사고 파는 노예였으므로 이따금 능욕적으로, 또한 잔인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 백부장은 그의 종에게 부드러운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종이 회복되기를 매우 소원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구주를 보지 못했지마는 그가 들은 소문은 그에게 믿음을 일으켜 주었다. 유대인들의 형식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로마인은 그들의 종교가 자기의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정복자와 피정복민(被征服民)을 분리시켜 놓은 민족적 편견과 증오의 장벽을 이미 헐어 버렸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존중하였으므로 그분께 예배하는유대인들에게 친절을 나타냈다. 그에게 전해지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영혼의 필요를 채워 주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영적인 것은 구주의 말씀에 반응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예수님께 접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대의 장로들에게 호소하여 그의 종을 고쳐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었다.
그 장로들은 그 사정을 예수님께 아뢰면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나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고 말하였다(눅 7:4, 5).
그러나 백부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께서는 백부장 자신이 보낸 기별, 곧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는 기별을 받으신다(6절).그럴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길을 걸어가신다. 그러자
백부장이 직접 나와서 그 기별을 종결 짓는다.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7, 마 8:8, 9).
“나는 로마의 권세를 대표하며, 나의 군사들은 나의 권위를 최고의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며, 모든 피조물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 주님께서 질병을 떠나가도록 명령하시면, 그 질병은 당신에게 순종할 것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그리스도께서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 8:13).
유대의 장로들은 백부장이 자기들의 민족에게 보여 준 호의 때문에 그를 그리스도께 추천하였다. 그들은 백부장이 “회당을 지었”기 때문에 그가 합당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부장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합당치 못한 사람이다고 하였다. 그럴지라도 그는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의 선행을 신뢰하지 않고 구주의 자비를 신뢰하였다. 그는 자신의 큰 필요성을 유일하게 주장하였다.
꼭 같은 방법으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하신다(딛 3:5). 그대는 그대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내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금이나 미래에 호소할 탄원의 조건은 전혀 속절없는 우리의 상태, 곧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상태이다. 자아를 의존하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우리는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말할 것이다.
“내 손에는 가지고 갈 아무런 대가도 없고,
다만 당신의 십자가에만 매달립니다”“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우리를 하늘과 연결시켜 주고 암흑의 세력을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악한 기질을
정복하고 아무리 강한 유혹이라도 모두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므로 그리스도께로부터 떠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속절없이 무가치한 그대로 자비하신 구주의 긍휼 앞에 자신을 내어놓으라. 자아를 보지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사람들 사이에 다니시면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 분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강한 구속주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약속을 생명나무의 잎사귀처럼 붙잡으라.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그대가 그분께 나아갈 때 그분께서 받아주신다는 것을 믿으라.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 사실을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렇게 하는 동안, 그대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1, 32).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 39).*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동양에 알려진 모든 질병 가운데 문둥병이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그 병의 불치성과 전염성, 그리고 그 병이 희생자에게 끼치는 끔찍스러운 결과 등은 가장 용감한 사람일지라도 공포로 충만하게 하였다. 유대인들 간에서는 이 질병을 죄로 말미암아 받는 심판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재앙”, 혹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불렀다. 그 병은 뿌리가 깊어 근절할 수 없고 치명적이었으므로 죄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의문의 율법에 의하여 문둥병자는 부정하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가 만진 것은 무엇이나 부정하였다. 공기는 그의 호흡으로 불결해 졌다. 문둥병자는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사람들이 사는 거주지에서 격리되었다. 그 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을 받는 사람은 자신을 제사장에게 보여야 했고, 제사장은 자세히 살펴 본 후 그의 상황을 결정해 주어야 했다. 만일 문둥병자라는 선고를 받게 되면, 그는 자기의 가족과 격리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고, 다만 같은 환자들과만 사귀도록 운명이 지워졌다. 심지어 왕들과 통치자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이 무서운 질병에 걸린 군주는 홀(忽)을 버리고 사회를 떠나가야 한다.
문둥병자는 친구와 친척들을 떠나서 그의 질병의 저주를 견디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재난을 공표하고, 옷을 찢고, 경고의 음성을 높이므로 전염성이 있는 병자에게서 피해 가도록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어야 했다. 외롭게 추방된 자가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는 슬픈 음조는 공포와 증오를 알려 주는 신호였다.
그리스도께서 봉사하시던 지역에는 그 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분의 사업에 대한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 지자, 마음 속에 믿음이 솟아나기 시작한 한 사람이 있었다. 만일 예수님께로 갈수만 있다면 그는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 영원히 격리될 수 밖에 없도록 운명지워진 그가 치료자되시는 예수님께 어떻게 자신의 몸을 내 보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고쳐 주실 것인가? 주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이나 심지어 자기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서 피해 가라고 경고한 의사처럼 하지 않으실 것인가?
그는 예수님께 대하여 들은 바를 모두 생각해 본다. 그분께 도움을 구한 사람 중에 한 사람도 그냥 돌아간 사람은 없다 그 가련한 사람은 구주를 찾고자 결심한다. 비록 마을과 격리되어 있을지라도, 산길을 따라 뚫려 있는 어떤 소로(小路)를 지나가시는 예수님과 마주칠 수도 있고, 마을 밖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그분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려움은 많을지라도 그것이 그의 유일의 소망이다.그 문둥병자는 멀리 떨어져 서서 구주의 입에서 나오는 몇 마디의 말씀을 듣는다. 그는 예수님께서 병자들 위에 손을 얹으시는 것을 본다. 그는 절름발이, 소경, 중풍병자, 그외 여러 가지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일어나서 구원받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본다. 그의 믿음은 강해진다. 그는 청중들이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접근해 간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속박, 사람들의 안전, 모든 사람이 자기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공포감
등을 깡그리 잊어버린다. 그는 다만 치료를 받는다는 복스러운 소망만을 생각한다
그는 몸서리칠만큼 보기 흉하다. 그 질병이 무섭게 잠식해 있었으므로 썩어가는 그의 육체는 보기에 끔찍스럽다. 그를 보자 사람들은 뒤로 물러간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피차 함께 무리를 지운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예수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자 애를 쓰지마는 헛일이 되고 만다. 그는 그들을 보지도 않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 아연실색하는 그들의 표정은 그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을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음성만을 듣는다.*
그는 예수님께로 달려가서 자기 몸을 그분의 발 앞에 던진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고 부르짖는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 8:2, 3)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손을 그 사람 위에 얹으신다.
즉시로 그 문둥병자에게 변화가 생긴다. 그의 피는 정결해 지고, 신경은 감각을 얻고, 근육은 튼튼해진다. 문둥병자의 특징인 부자연스러운 흰 비늘 모양의 피부는 사라진다. 그의 살은 어린 아이의 살처럼 된다.
만일 제사장들이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은 사실에 관한 내력을 알것 같으면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증오심 때문에 부정직한 판결을 내릴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공정한 판결을 얻기를 바라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고침받은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 이적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전에 지체 말고 예물을 가지고 성전에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신다. 제사장들은 그와 같은 예물을 받기 전에, 예물을 바친 자를 살펴 보고 그가 완전히 회복된 사실을 확인해야 하였다.그와 같이 몸을 검사하는 일이 마쳤다. 그 문둥병자에게 추방을 선고했던 그 제사장들이 그의 병이 완치된 것을 증명하였다.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은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건강의 혜택이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원기발랄한 남성으로서 가정에 돌아가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주의를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치료에 대한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쁨으로 돌아다니면서 자기를 완전하게 고쳐 주신 분의 능력을 전하였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 왔을 때, 그는 “온 몸에 문둥병”이 들어 있었다. 문둥병의 치명적 독소가 그의 온 몸에 퍼져 있었다.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을 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자 애를 썼다. 왜냐하면 문둥병자를 만진 사람은 스스로 불결해 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문둥병자 위에 얹으셔도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셨다. 문둥병은 깨끗해졌다. 죄의 문둥병, 곧 뿌리가 깊고, 치명적이며, 인간의 능력으로 깨끗함을 받을 수 없는 죄의 문둥병도 그와 같다. “온 몸은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 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로다(사 1:5, 6). 그러나 인성을 쓰고 오신 예수님은 더럽힘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의 임재는 죄인에게 치료의 힘이 되셨다. 누구든지 그분의 발 아래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고 믿음으로 말을 하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어떤 치료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구한 바 축복을 즉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문둥병의 경우에는 호소하자마자 즉시 응답을 받았다. 우리가 세속적 축복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지체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기도할 때는 그렇지 않다.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 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 15).
예수님께서는 근심되고 마음이 괴로운 자들, 희망이 꺾인 자들, 세속적 기쁨으로 심령의 갈급을 진정시키고자 애쓰고 있는 자들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부르사 당신 안에서 쉼을 얻으라고 하셨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께서는 수고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마 11:29).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다. 사람을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모든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모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벗겨 주실 수 있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우리가 지고 있는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이다. 만일 우리가 그 짐을 질 수 밖에 없도록 버려졌다면, 그것이 우리를 찌그러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그 짐을 지셨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주님께서 우리의 죄짐을 지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피곤한 어깨에서 짐을 벗겨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것이다. 근심과 슬픔의 짐 역시 그분께서 지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근심을 당신께 맡기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당신의 마음에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류의 맏형님되시는 주님께서는 영원한 보좌 곁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구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바라보신다. 그분께서는 경험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이 무엇이며, 우리의 소원이 무엇이며, 우리를 시험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기 때문이다(히 4:15). 그분께서는 떨고 있는 연약한 하나님의 자녀에 불과한 그대를 살펴 보신다. 그대는 시험을 받고 있는가? 그분께서 건져 주실 것이다. 그대는 연약한가? 그분께서 강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대는 상처를 받고 있는가? 그분께서 고쳐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며,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신다(시 147:4, 3).
그대의 염려와 시련이 무엇이든지, 그대의 사정을 주님 앞에 내놓으라. 그리하면 그대의 정신은 넉넉히 인내하게 될 것이다. 난처하고 어려운 일에서 스스로 해결될 길이 그대에게 열려질 것이다. 그대 자신이 연약하고 속절없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분의 능력 안에서 그대는 더욱 강해 질 것이다. 그대의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대의 짐을 져 주시는 분에게 그 짐들을 맡김으로써 얻는 안식은 더욱 복될 것이다.
환경이 친구들을 헤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넓은 바다의 출렁거리는 물결이 우리와 그들 사이에 가로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환경도, 어떤 거리도, 우리를 구주와 분리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분께서는 우리 우편에 계셔서 우리로 쓰러지지 않게 해 주시고, 옹호해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위로해 주신다. 그리스도께 구속받은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욱 크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안식하면서 “그분께서 나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셨으므로 내가 그분을 의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인간의 사랑은 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할 줄을 모른다. 우리가 도움을 얻고자 그분께 부르짖으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손을 펴신다.
“산들은 떠나며
적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 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54장 10절
심령의 치료

그리스도께 도움을 얻고자 온 많은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질병을 자청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기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서 나온 능력이 그 사람들에게 들어갈 때 그들은 죄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적 질병은 물론이요 영적 질병도 고침을 받았다.
그와 같은 사람들 중에는 가버나움의 중풍병자가 있었다. 문둥병자와 마찬가지로, 그 중풍병자는 회복에 대한 모든 소망을 잃어버렸다. 그의 질병은 죄악적 생애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그는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바리새인들과 의사들에게 호소하였으나, 모든 일이 허사였다. 그들은 그의 병이 불치의 것이라고 선언하고, 그를 죄인이라고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중풍병자는 절망 가운데 빠졌다. 그 때에 그는 예수님의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처럼 죄가 많고 속절없는 다른 사람들도 고침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그가 구주께로 운반되어 갈 수만 있다면 자기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질병의 원인을 생각하자 희망은 사라졌다. 그럴지라도 그는 치료에 대한 소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의 큰 소원은 죄의 짐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뵈옵고 용서의 보증과 하늘의 화평을 얻고자 갈망하였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만족히 여길 것이었다.잃어버릴 시간이 없었다. 그의 쇠약해 진 육신에는 이미 죽음의 징조가 나타났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기를 침대에 누운 채로 예수님께 운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기꺼이 그 일을 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구주께서 계신 집 안과 주위에는 너무 많은 군중이 빽빽히 모여 있어서 그 환자와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가기는 커녕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들어갈 수 조차도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들의 관례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주위에 가까이 앉아 있었고, 또한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도 앉아 있었다(눅 5:17).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참소하기 위한 정탐꾼으로 온 자들이었다. 그들 외에도 혼잡한 군중, 열성 있는 자들, 호기심을 가진 자들, 믿지 않는 자들이 모여 있었다. 상이한 민족들과 사회의 모든 계급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생명의 영께서 회중들 위에 덮여 있었으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분의 임재를 식별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부족감을 느끼지 못하였으므로 고침을 받는 일이 저희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 1:53)
중풍병자를 운반하는 사람들은 군중을 뚫고 들어가려고 거듭거듭 시도해 보았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 병자는 말할 수 없는 고민으로 자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처럼 갈망하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이처럼 가까이 와 있는데, 어떻게 그 희망을 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의 요청으로 친구들은 그를 지붕으로 운반하여 지붕을 뚫고 예수님 발 아래 그를 내려놓았다.설교는 중단되었다. 구주께서는 슬픔에 잠긴 그 얼굴을 바라보시고 당신을 주목하고 있는 애원하는 눈을 보셨다. 그분께서는 무거운 짐에 눌려 있는 그 영혼의 갈망을 잘 아셨다. 그 중풍병자가 아직 집에 있을 때 그의 양심을 각성시켜 주신 분은 그리스도셨다. 그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완전하게 고쳐 주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을 때, 구주의 자비는 그의 심령에 복을 주셨다. 최초의 희미한 믿음의 빛이 자라나서 예수님께서 죄인을 도와 줄 유일의 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을 그분께서는 주시하셨다. 그리고 그 믿음이 당신 앞에
나오고자 하는 온갖 노력과 함께 더욱 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보셨다.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을 당신께로 이끄신 분은 그리스도셨다. 이제 구주께서는 그 병자의 귀에 음악과 같이 들리는 음성으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9:2).
죄의 짐이 그 병자의 심령에서 떠나간다. 그는 의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보여 준다. 누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부인할 것인가? 희망이 절망을 대신하고, 즐거움이 우울한 심정을 대신한다. 육체적 고통은 사라지고 온몸은 변화된다. 그는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고 평화로운 침묵 속에 누워 있다. 너무나 행복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이상한 사건을 하나 하나 지켜 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초청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죄 때문에 심령의 병이 들어있지 않았던가? 그들은 그 짐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군중들에게 자기들의 영향력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한 나머지, 마음 속으로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말하였다(막 2:7).예수님의 시선이 그들과 마주치자 그들은 그 시선을 피하여 움츠렸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분께서는 중풍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마 9:4-6).
그러나 들것에 실려서 예수님께 왔던 그 사람은 젊음의 탄력과 힘을 가지고 자기 발로 일어섰다. 그는 즉시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막 2:12).
그 썩어가는 육체에 건강을 회복시키는데는 바로 창조의 능력이 요구되었다. 땅의 흙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바로 그 음성이 죽어가는 중풍병자에게 생명이 회복되도록 말씀하셨다. 그리고 육체에 생명을 주신 바로 그 능력이 마음을 새롭게 하였다. 창조 시에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시 33:9) 서게 하신 분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에게 생명을 말씀하셨다. 육체의 치료는 마음을 새롭게 해 준 능력의 증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령하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과 육체가 모두 치료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육체의 건강을 누리기 전에 심령의 건강이 필요했다. 육체의 질병을 고침받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해방을 주고, 심령을 죄에서 정결케 하셔야 한다. 이 교훈을 간과하지 말 것이다. 오늘날 육체적 질병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들은 이 중풍병자와 같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기별을 듣고자 갈망하고 있다. 불안하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수반한 죄의 짐이 그들의 질병의 기초가 된다. 그들은 심령을 고쳐 주시는 분 앞에 나오기 전에는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한다. 오직 그분께서 주실 수 있는 화평만이 심령에 활력을 주고 육체에 건강을 줄 것이다.
중풍병자의 치료가 사람들에게 끼친 결과는 마치 하늘이 열려 더욱 좋은 세상의 영광이 주어진 것과 같은 것이었다.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이 발을 옮길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짐을 마치 새의 깃털인양 가볍게 지고서 군중을 뚫고 지나갈 때, 사람들은 물러서면서 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그 사람을
응시하며, 저희들끼리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가만히 속삭였다(눅 5:26).
불과 얼마 전에 가족들 앞에서 천천히 운반되어 갔던 그 사람이 침상을 가뿐히 가지고 돌아오자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의 집에는 큰 기쁨이 생겼다.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주위에 모였으나 그들의 눈을 거의 의심할 정도였다. 그 사람은 성인의 완전한 활기를 간직하고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팔들이 그의 마음대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오그라들고 우중충한 색깔을 띠고있던 살은 이제 발랄하고 혈색이 좋아졌다. 그는 든든하고 자유롭게 걸었다. 그의 얼굴 표정 하나 하나에 기쁨과 소망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순결과 화평의 표정이 죄와 고통의 흔적들을 대신하였다. 그집에서는 기쁨에 넘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으며,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고통받는 자에게 힘을 주신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생애를 예수님께 바칠 준비가 이루어졌다. 조그마한 의심도 그들의 믿음을 흐리게 하지 않았고, 조그마한 불신도 어두웠던 그들의 가정에 빛을 비추어 주신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깨뜨리지 못하였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편 1-14절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요 5:2, 3).
이 못의 물은 때때로 움직였다. 그런데 이 물이 움직이는 일은 초자연적 능력의 결과이므로 누구든지 물이 움직인 후에 제일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고침을 받는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다. 수백 명의 병자들이 그곳을 방문했으나 물이 움직일 때에는 무리가 너무 많아서 남자, 여자, 아이들, 할 것없이 저들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발로 짓밟으면서 서로 앞을 다퉈 밀려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은 그 못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었다. 못 가까이까지 간 많은 사람들은 그 못 둑에서 죽었다. 그곳에는 오두막이 세워져서 환자들이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날마다 병에서 놓여나겠다는 헛된 소망을 안고 연못가에까지 기어와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명상과 기도를 하시는 등 홀로 거니시다가 그 못까지 오셨다. 그분께서는 비참한 환자들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유일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시기를 지켜 보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치유력을 발휘하셔서, 고통당하는 모든 자들을 건강하게 해 주시고자 열망하셨다. 그러나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무리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치료행위는 유대인들의 편견을 일으켜 당신의 사업을 단축시킬 것을 아셨다.그러나 구주께서는 가장 비참한 한 사람의 형편을 보셨다. 그것은 38년 동안 속절없는 앉은뱅이로 지내온 한 사람의 경우였다. 그의 질병은
대체로 그 사람 자신의 악습의 결과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친구도 없이 홀로, 하나님의 자비에서 끊어졌다고 생각하며 오랫 동안의 불행한 세월을 지내왔다. 물이 움직일 것으로 생각되는 때가 되면 그의 절망적인 형편을 동정한 사람들이 그를 행각까지 운반해 주곤 했다. 그러나 혜택을 입을 절호의 기회가 되면 그를 물 속으로 들어가도록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지마는 못가에서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 사람보다 더 강한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먼저 뛰어 들어가곤 하였다. 가련하고 속절없는 그 환자는 이기적으로 날뛰는 무리들과 성공적으로 겨룰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끈덕진 그의 노력과 근심, 거듭되는 실망 때문에 그에게 남아 있는 힘까지 빨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병자는 자리에 누워서 간혹 그 못을 바라보려고 머리를 들어보곤 하였다. 바로 그 때에 친절하고 인자한 얼굴을 한 한 분이 그를 굽어보면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하므로 그는 주목하게 되었다. 그의 마음 속에 희망이 솟았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도움을 받아야 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타오르던 용기는 곧 시들어 버렸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자주 그 못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던가를 회상하였다. 그는 지금 물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살아 있을 가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바라보면서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신다(6-8절).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그 병자는 예수님을 바라본다. 그분의 얼굴 표정과 그분의 음성은 어떤 사람과도 같지 않다. 사랑과 능력이 그분이 계신 곳에서 풍겨오는 것같다. 그 앉은뱅이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든다. 그는 의심없이 순종하고자 뜻을 정한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자, 그의 온 몸이 반응을 나타낸다.
모든 신경과 근육이 새로운 생명으로 약동하고, 불구가 되었던 그의 사지는 건강하게 움직인다. 그 사람은 제발로 일어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다시 찾은 힘을 기뻐하면서 든든하고 거리낌없는 발걸음으로 걸어간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아무런 보증도 주지 않으셨다. 그 사람은 “주님, 만일 당신이 나를 고쳐 주신다면, 나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 사람은 의심을 품음으로써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유일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자기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믿었다. 그는 즉시 노력을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힘을 주셨다. 그가 걸어가고자 작정하자 걷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움직일 때, 그는 낫게 되었다.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다. 우리의 심령은 마비되어 있다. 그 쇠약한 사람이 걸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저들의 속절없는 상태를 깨닫고 그들을 하나님과 조화되게 해 줄 영적 생명을 갈급하며 그것을 얻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그들은 절망을 안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는다(롬 7:24). 그처럼 절망 가운데서 애쓰고 있는 사람들은 위를 쳐다보아야 한다. 구주께서는 당신의 피로 산 사람들을 굽어보시며, 말할 수 없는 친절과
긍휼로써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그대에게 건전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일어서라고 명령하신다. 그대가 완전히 나았다고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구주의 말씀을 믿어라. 그대의 의지를 그리스도 편에 두라. 그분을 섬기고자 뜻을 세우고 그분의 말씀대로 행동할 때 그대는 힘을 얻을 것이다. 오랫 동안의 방종으로 영과 육을 속박하고 있는 악습과 정욕의 지배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서 능히 건져 주실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 주시고자 갈망하신다. 그분께서는 “죄로 죽었던”(엡 2:1) 영혼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약점과 불행과 죄의 사슬에 매여 있는 포로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다.
죄책감은 생명의 샘을 망쳐 버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그대의 죄를 제거해 주겠다. 내가 그대에게 평안을 주겠다. 나는 나의 피로써 그대를 샀다. 그대는 나의 것이다. 나의 은혜가 그대의 약한 의지를 강하게 해 줄 것이다. 나는 그대의 죄책감을 제거해 줄 것이다.” 유혹이 그대를 엄습할 때, 근심과 걱정이 그대를 둘러쌀 때, 좌절당하고 낙심되어 절망상태에 빠지고자 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리하면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어두움이 그분께서 임재하시는 밝은 빛에 의하여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죄가 그대의 심령을 지배하려고 싸우고 양심을 무겁게 할 때, 구주를 바라보라. 그분의 은혜는 죄를 정복하기에 넉넉하다. 불안으로 떨릴 때, 감사한 마음으로 그분께 돌아가라. 그대 앞에 놓여 있는 소망을 굳게 붙잡으라.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를 당신의 가족으로 입적(入籍)시키고자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의 능력은 그대의 연약함을 도와 줄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대를 한 걸음씩 인도하실 것이다. 그대의 손을 그분의 손에 쥐어주라. 그리하여 그분께서 그대를 인도하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멀리 떠나 계신다고 결코 생각하지 말라. 그분께서는 언제나 가까이 계신다. 사랑스러운 그분께서는 그대 주위에 계신다. 그분께서 그대에게 발견되기를 바라시는 분으로 알고 그분을 찾아라. 그분께서는 그대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교통을 통하여 당신과 동행하기를 바라신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장막절은 이제 막 끝났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과 랍비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한 그들의 계책에 있어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밤이 되자,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요 7:53, 8:1).도시의 흥분과 혼잡, 열렬한 군중들과 반역적인 랍비들을 피하여 예수님께서는 다만 하나님과만 함께 계실 수 있는 조용한 감람산으로
가셨다. 그러나 이른 아침에 그분께서는 성전으로 돌아가셨다. 그러자 그분의 주위에 백성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그분께서는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분께서는 얼마 후에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셨다. 한 무리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공포에 질린 어떤 여자를 끌고와서, 거칠고 열띤 음성으로 그 여자가 일곱째 계명을 범하였다고 고소하였다. 그들은 그 여자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밀어 버렸다. 그리고 외관상으로 존경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말하였다. “선생님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4, 5).
그들의 가장된 존경에는 그분을 죽이기 위하여 교묘하게 짜놓은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다는 비난을 받으실 것이었다. 만일 그분께서 그 여자를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선언하신다면 그분께서는 로마인들에게만 속해 있는 권리를 빼앗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로마인들에게 고소를 당할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장면, 곧 수치심에 사로잡혀 떨고 있는 희생자와 인간적인 동정조차없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고관들을 보셨다. 흠없이 순결한 그분의 정신은 그 광경 앞에 전율하였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질문을 들은 척도 않으시고 몸을 굽혀 땅을 보시며 땅 위에 글을 쓰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심과 동시에 외관상으로 무관심하신 듯하자, 초조해진 고소자들은 가까이 접근해 와서 그분의 주의를 그 문제에 집중시키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저들의 시선이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 땅 위로 쏠렸을 때, 그들의 음성은 조용해졌다. 그들 앞에 그려져 있는 것은 저희 자신들의 생애에 숨겨 있는 죄의 비밀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드시고 음모를 꾸민 장로들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그리고 몸을 굽혀 계속해서 글을 쓰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모세의 율법도 깨뜨리지 않고 로마의 권위도 침해하지 않으셨다. 고발자들은 패배당하였다. 이제 거룩함을 가장하던 그들의 옷은 벗겨져 나가고, 그들은 무한히 순결하신 분 앞에서 정죄를 받고서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애의 숨은 죄악이 무리들 앞에 공개되지 않을까 두려워 떨면서 머리를 숙이고 시선을 떨어 뜨린채 저들의 희생자와 그를 동정하는 구주를 남겨두고 도망쳐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그 여자를 보고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0, 11).
그 여자는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 앞에 서 있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 여자에게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그 여자는 감히 눈을 들어 구주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기다렸다. 그는 자기를 고발하던 자들이 부끄러워 하면서 말없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런데 이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희망의 말이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의 마음은 녹아졌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감사한 마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쓰라린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이것은 그 여자에게 있어서 순결과 평화의 생애, 하나님께 헌신한 새생애의 시작이 되었다. 이 타락한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지독한 육체적 질병을 고치시는 것보다 더 큰 이적을 행하셨다. 그분께서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영적 질병을 고치셨다. 이 회개한 여인은 예수님을 가장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자아희생적 사랑과 헌신으로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신 은혜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었다. 잘못을 범한 이 여자에 대하여 세상은 다만 멸시와 조롱만을 했지마는, 그 여자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신 죄없는 그분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그 여자에게 뻗으셨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은 정죄하였지마는, 예수심께서는 그 여자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하셨다.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환경을 아신다. 죄인의 죄가 크면 클수록 그에게는 구주가 더욱 필요하다. 거룩한 사랑과 긍휼로 이루어진
그분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가장 속절없이 원수의 올무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에게로 끌려간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로써 인류의 해방문서에 조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귀한 값을 지불하고 사신 사람들이 원수의 유혹의 놀림거리가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정복당하여 멸망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사자굴에서 사자들의 입에 자갈을 물리시고, 불꽃 가운데서 당신의 충성된 증인들과 함께 거니셨던 그분께서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성 가운데 있는 모든 악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오늘날 그분께서는 은혜의 제단 앞에 서서 당신의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리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울며 통곡하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사유와 회복을 위하여 당신께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값없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누구에게나 당신이 나타나실 것을 모두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 그러나 떨고 있는 모든 영혼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명령하신다.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그분과 화평할 수 있다. 그리하면 그분께서 화평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피난처를 찾아 당신께 돌아온 사람들을 높여 주시고 그들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면하게 해 주신다. 어떤 사람이나 악한 천사라도 그와 같은 사람들을 송사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당신 자신의 신성과 인성에 연합시켜 주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빛 가운데서 죄를 담당하신 위대한 예수님 곁에 서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준다(요일 1:7).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 34).*
그리스도께서는 바람과 물결, 귀신들린 자들을 완전히 지배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폭풍을 잔잔케 하고 흉용한 바다를 고요하게 하신 그분께서는 사단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억눌림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을 말씀하셨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에 사로잡힌 자들을 자유케 하시는 당신의 사명을 말씀하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공포에 질린 한 비명으로 방해를 받으셨다. 미친 사람 하나가 사람들 사이에서 달려나오며 소리질렀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꾸짖으시며,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눅 4:35).
그 사람의 고통의 원인 역시 그 자신의 생애에 있었다. 그는 죄의 쾌락에 매혹되어 인생을 하나의 큰 오락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부절제와 천박한 생활이 그의 성격에서 고상한 특성들을 망가뜨려 버렸으므로 사단이 그를 완전히 지배해 버렸다. 후회는 너무 늦게 찾아 왔다. 그가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재물과 향락을 희생하고자 하였을 때 그는 이내 악한 자의 손아귀에서 속절없이 되어 있었다.
구주의 면전에 나타나자 그 사람은 자유를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귀신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저항하였다. 그 사람이 예수님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하고자 했을 때 악한 영이 그의 입에 말을 넣어 주었으므로 그는 공포의 괴로움 가운데서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를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 앞에 나와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 위대한 손을 붙잡을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가고자 애를 쓰자 또 하나의 다른 의지가 그를 붙들었으며, 그를 통하여 다른 말이 나오게 되었다.
사단의 능력과, 자유를 얻고자 한 그 사람의 욕망 사이에 전개된 투쟁은 무서웠다. 고통을 당한 그 사람은 자신의 인간성을 파멸시킨 그 원수와의 투쟁에서 생명을 잃어버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구주께서 권세를 가지고 말씀하시자 사로잡혔던 그 사람은 해방되었다. 귀신들린 그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침착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그 사람은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기쁜 음성으로 찬양하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 광증으로 빛나던 눈이 이제는 지성으로 빛나고, 감사의 눈물이 흘러 나왔다.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말문을 열게 되자 그들은 피차에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고 외쳤다(막 1:27).오늘날에도 가버나움의 귀신들린 사람처럼 악한 영의 권세에 정말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에서 고의적으로 떠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사단의 지배에 맡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악습과 친근해지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미혹당하므로 그는 자기의 의지보다 더 강한 의지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자아를 마침내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 신비한 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은밀한 죄와 강력한 정욕은 그를 마치 가버나움의 귀신들린 사람처럼 속절없는 포로로 만들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의 상태는 절망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동의없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신이 어떤 능력으로 지배를 받을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아무리 타락하고 아무리 부도덕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귀신들린 사람은 기도대신에 다만 사단의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있는 말없는 호소는 주님께 알려졌다. 영혼이 필요를 느끼고 외치는 소리는, 그것이 비록 말로 표현되지 않을지라도 무시당하는 일이 없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단의 능력이나 자신의 본성의 연약한 상태 그대로 방치되지 않는다.
“용사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것을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마는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사 49:24, 25).
믿음으로 구주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변화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권세를 주었으니”
열 두 사도들처럼 그리스도께서 그 후에 파견한 70인의 제자들도 그들의 사명의 표로서 초자연적 능력의 선물을 받았다. 그들이 사업을 마치고 기쁨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대답하셨다(눅 10:17, 18).*
그 때부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사단을 정복당한 원수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위하여 승리를 얻으셔야만 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이 그 승리를 자기들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0:19).
전능하신 성령의 능력은 모든 회개한 영혼의 방비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와 믿음으로 당신의 보호를 간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사단의 세력 아래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사단이 강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악한 자를 하늘에서 내어쫓으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 계심을 감사하자. 사단은 우리가 그의 힘을 과장하여 나타낼 때 기뻐한다. 왜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가? 왜 그분의 능력과 사랑을 자랑하지 않는가?
하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언약의 무지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한 말씀에 대한 영원한 증거이다(요 3:16).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과 더불어 투쟁하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을 우주에 증거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존속하는 한 우리에게 능력과 보호를 약속해 주는 보증이 된다.
봉사를 위하여 구원해 줌

갈릴리 바다에 아침이 왔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바다에서 폭풍의 하룻밤을 새운 후 해안에 도착하셨다. 마침 떠오르는 햇빛은 평화의 축복인 양 바다와 육지를 어루만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바닷가에 발을 딛자 격노한 태풍보다 더 무서운 광경이 저들의 눈 앞에 전개된다. 무덤들 사이에 있는 어떤 은신처에서 두 사람의 미치광이가 마치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기라도 할 것처럼 그들에게로 달려든다. 그들의 몸에는 그들이 감금된 상태에서 벗어날 때 끊어 버린 쇠사슬이 달려 있다. 그들의 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다. 인간의 형상 그것은 말살되어 버린 것 같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 야수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제자들과 그 일행은 무서워 도망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것을 즉시 깨닫고 예수님을 찾고자 돌아선다. 그분은 그들이 그분을 버리고 떠나간 그 자리에 서 계신다. 폭풍을 잔잔케 하시고, 이미 사단과 대결하여 정복시킨 그분께서는 그 사귀들 앞에서 도망하지 않으신다. 그 사람들은 이를 갈고 입에서 거품을 뿜으면서 예수님께 접근해 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파도를 가리켜 잔잔케 하신 그 손을 드신다.
그들은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해 올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서서 화를 내지마는 어쩔 수 없다.
그분은 권위를 가지고 더러운 영들에게 그들로부터 나오라고 명령하신다. 그 불쌍한 사람들은 그들을 괴롭히는 사귀들에게서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이 가까이 계심을 깨닫는다. 그들은 구주의 자비를 탄원하기 위하여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린다. 그러나 그들이 입을 열었을 때, 그들을 통하여 사귀들이 외친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마 8:29).
그 악한 영들은 그들의 희생자들을 놓아 줄 수 밖에 없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사귀들린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빛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비친다. 그들의 눈은 지성으로 빛난다. 그처럼 오랫 동안 사단의 형상으로 찌그러져 있던 얼굴이 갑자기 부드러워지고, 피묻은 손들은 조용해진다. 그들은 음성을 높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한편 사람에게서 쫓겨난 사귀들은 돼지떼 가운데 들어가 그것들을 멸망으로 달려가게 한다. 돼지를 지키던 자들은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급히 달려간다. 그러자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 몰려든다. 귀신들린 그 두 사람은 마을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람들이 옷을 입고 올바른 정신으로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을 고쳐 주신 예수심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돼지를 잃어버린 것이 이 사단의 포로들이 구원받은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주위에 모여들어 그들에게서 떠나가주기를 간절히 요구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즉시 배를 타고 건너편 해안을 향하여 떠나신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광인(狂人)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저희를 구원하여 주신 분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그들의 생애를 괴롭히고 폐인이 되게 했던 귀신들에게서 벗어나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고자 하실때, 그들은 예수님 곁에 가까이 가서 그분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들은 그들을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게 해 주시므로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이야기하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에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이방인 가정에 가서 그들이 예수님께 받은 축복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일이다. 그들이 구주와 헤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이 이방인 동족들과 교제할 때 그들에게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에서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이 사업을 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분께서 그들의 의무를 지적해 주시자 그들은 즉시 순종할 자세를 취한다.*
그들은 집안 사람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데가볼리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어디에서나 구원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전하고 그분께서 그들을 어떻게 사귀에게서 해방시켜 주셨는지 이야기하였다.
비록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선택한 흑암 가운데 저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그들에게서 떠나가도록 말하였을 때,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거절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빛을 보내시되 그들이 듣기를 거절하지 아니할 사람들을 통하여 하셨다.돼지가 멸망당하도록 함으로써 사람들을 구주께서 떠나가게 하고 그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사건은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그 지방에서 일어나게 했고, 그리스도께로 주의를 집중시켰다. 비록 구주께서는 떠나셨지마는 그분께서 고쳐 주신 그 사람들은 그분의 능력을 증거하는 증인들로서 남아 있었다. 흑암의 왕의 매개체가
되었던 사람들이 빛의 통로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의 사자(使者)들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데가볼리로 돌아오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3일 동안 그 주위의 모든 동네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기별을 들었다.
고침을 받은 두 광인은 그리스도께서 데가볼리 지방에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한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다만 짧은 기간에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으로 하신 단 한 번의 설교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처럼 사람들을 가르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아는 것, 곧 구주의 능력에 관하여 그들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에 감동을 받은 각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 주께서 요구하시는 증거인데, 그와 같은 증거가 부족하므로 세상은 멸망하여 가고 있다.
복음은 하나의 생명없는 이론으로 제시될 것이 아니고 생애를 변화시키는 산 능력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소유할 수 있고 당신의 위대한 사랑의 보증을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종들이 증거하기를 바라신다. 그분께서는 구원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딸로서의 거룩한 특권을 회복하고 누리기 전에는 결코 만족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증거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대하여 가장 반항적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일지라도 아낌없이 받아 주신다. 그들이 회개하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성령을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을 불충실한 자들의 진영으로 보내어 당신의 자비를 선포하게 하신다. 사단의 도구로 타락한 영혼들이 오늘날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의의 사자로 바뀌어져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는지 증거하도록 파견되고 있다.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가버나움의 여인이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져 고침을 받은 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받은 축복을 고백하기를 원하셨다. 복음이 제공해 주는 선물은 몰래 간직하거나 은밀히 즐겨서는 안된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이사야 43장 12절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우리가 공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하여 하늘이 택한 수단이다. 우리는 옛날의 거룩한 사람들을 통하여 알려진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대한 간증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신성한 능력의 역사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증인들이다. 각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된 생애를 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상이한 경험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개성으로 특징지어진 찬송을 당신께 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에 의하여 입증될 때,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귀중한 고백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는 항거할 수 없는 능력이 된다.
하나님의 모든 선물을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간직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믿음이 강하여져서 더욱 많은 것을 달라고 주장하고 받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믿음과 경험에 대하여 읽을 수 있는 모든 기록에서 얻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얻는 가장 적은 축복 속에 우리를 위한 더욱 큰 힘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물을 댄 동산과 같아질 것이다. 그의 치료는 급속할 것이며, 그의 빛은 흑암 중에서 발하고, 여호와의 영광은 그에게서 나타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뉘 능히 여호와의 능하신 사적을 전파하며
그 영예를 다 광포할꼬”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찬양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내 혀로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주 여호와여 주는 …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시 116:12-14; 104:33, 34; 106:2;
105:1, 2, 3; 63:3-7;
56:11-13; 71:22-24, 5, 6, 45:17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복음의 초청은 범위를 좁혀서 다만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 곧 우리의 생각에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우리에게 영광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만 제시되어서는 안된다. 그 기별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하실 때 그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세상을 위하여 축복하신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 그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나누어 줌으로써 증가시키도록 하기 위함이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이야기한 사마리아 여인은 구주를 발견하자 즉시 다른 사람들을 그분께로 인도해 왔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오히려 더욱 능률적인 선교사임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제자들은 사마리아가 유망한 선교지라는 것을 알려 주는 아무런 흔적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의 생각은 장차 이루어져야 할 큰 사업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 바로 주위에 거두어 들여야 할 수확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멸시하던 그 여자로 말미암아 온 동네가 구주의 말씀을 들으러 나왔다. 그 여자는 그 빛을 즉시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전하였다.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실천적 신앙의 역할을 설명해 주는 하나의 예증이다. 모든 진실한 제자는 한 사람의 선교사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태어난다. 그는 구주를 알게 되자 즉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려 주고자 열망한다. 구원하고 거룩케 하는 진리는 그의 마음 속에 숨겨둘 수 없다. 생명수를 마시는 사람은 생명의 샘이 되다. 받는 자는 주는 자가 된다. 마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사막에 있는 샘과 같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새롭게 해 주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마시게 해 주고자 갈망하게 한다. 이와 같은 일을 함으로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게 된다. 우리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일함으로써 구주께 가까이 나가게 된다.
당신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에 관하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겔 34:26).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이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 38).
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각 방면에서 도와달라는 호소가 들려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들의 동료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라고 요구하신다. 영생의 면류관을 얻어야 하고, 하늘나라를 소유해야 하고, 무지로 죽어가는 세상을 복음으로 깨우쳐야 한다.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요 4:35, 36).*
3년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훌륭한 모본을 목격해 왔다. 날마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걸어다니며 이야기하고, 고생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기쁘게 해 주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나타내는 그분의 능력을 보았다. 그들을 떠나가실 때가 되자, 그분께서는 그들이 당신의 이릭으로 당신의 사업을 완수할 은혜와 능력을 주셨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과 치료의 복음의 빛을 널리 비춰야 하였다. 그리고 구주께서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분께서 사람들 사이를 직접 걸어 다니시던 때보다도 그들과 더욱 가까이 계실 것이었다.
제자들이 한 일을 우리도 또한 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동정과 긍휼로써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며, 이타적(利他的) 열성으로 고통당하는 인류의 불행을 가볍게 해 주고자 노력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 할 일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활동할 장소가 없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구주께서는 당신 자신을 모든 인류와 동일하게 간주하신다. 우리를 하늘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하시고자 그분께서는 지상 가족의 일원이 되셨다. 그분께서 인자가 되시므로 아담의 모든 아들 딸들과 형제가 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서 죽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자기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큰 직물(織物)의 일부분이므로 하늘은 그들을 성도들의 형제로 여기는 것은 물론이요 죄인들의 형제들로도 여긴다.질병과 무지와 죄에 빠져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들어야 할 만큼 듣지 못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입장과 그들의 입장이 바뀌어졌다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겠는가?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우리는 힘이 미치는 한 그들을 위하여 해 주어야 한다. 심판 때에 우리 각 사람이 설 수 있을 것인지 넘어질 것인지를 측정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칙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법칙이다(마 7:12).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욱 많이 받은 모든 것, 그것들이 교육과 교양, 고결한 품성, 그리스도인 교육, 종교적 경험 등임을 막론하고, 우리는 우리보다 혜택을 적게 받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 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
하늘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 영광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어린 자녀들을 섬기는 일을 기뻐한다. 천사들은 그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언제나 나타나며, 자아와 더불어 가장 어려운 싸움을 싸우고, 그들의 환경이 가장 절망적인 사람들과 함께 한다. 천사들은 많은 성품의 결함들을 가지고 있는 연약하고 불안한 영혼들을 특별히 돌봐 준다.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품성이 열등하고 타락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을 굴욕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마는, 그것은 바로 하늘 조정에서 온 순결하고 죄없는 천사들의 사업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상태에 놓여 있는 동안 천국을 바람직한 곳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비난과 모욕의 생애, 수치의 죽음을 당하시기 위하여 하늘 조정을 떠나셨다. 하늘의 무한한 보화로 부요하셨던 그분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당신의 궁핍을 통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그분께서 밟으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은 이제부터 자기 자신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드리워진 사슬의 한 고리로, 그리스도의 자비의 계획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고자 그분과 함께 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생애하시던 장소들을 방문하여 그분께서 걸어가신 곳을 걸어 보고 그분께서 가르치기 좋아하시던 호숫가를 바라보고 그분의 눈이 그처럼 자주 머물렀던 들과 골짜기들을 바라보는
것이 큰 특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기 위하여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이나 베다니로 갈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병자의 침상 곁에서, 가난한 오두막에서, 사람이 많은 대도시의 뒷골목에서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위로가 필요한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님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주린 자들을 먹이고, 벗은 자들을 입히고, 고난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해야 한다. 우리는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고취시켜야 한다.
이타적 봉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은 악을 행하는 자를 개혁시키는 일에 있어서 칼이나 공의의 법정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일을 할 것이다. 칼이나 공의의 법정은 범법자에게 공포감을 안겨 주기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하는 선교사는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때때로 견책 때문에 굳어지는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아질 것이다.
선교사는 육체적 질병을 고쳐 줄 뿐만 아니라 죄의 문둥병에서 영혼을 정결케 해 줄 위대한 의사 그리스도께로 죄인을 인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병자들, 불행한 자들,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이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의도하신다. 당신의 인간 기구들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그러한 위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구주께서는 고통당하고 슬퍼하고 시험받는 사람들에게 봉사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당신의 귀중한 생명을 주셨다. 신자의 무리들이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잘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가정과 지역사회와 심지어는 지역 저편을 넘어서까지, 그 결과가 영원토록 멀리 미칠 사업을 할 수 있다.
최초의 제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이 말은 해당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 28:18, 19, 막 16:15).
그리고 그분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은 우리를 위한 약속이기도 하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오늘날은 호기심에 찬 군중들이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한적한 장소에 몰려들지 않는다. 그분의 음성은 번화한 거리에서 들리지 않는다. 길 거리에서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고 외치지 않는다(눅 18:37). 그러나 그 말은 오늘날도 해당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게 우리의 거리를 걸어다니신다. 그분께서는 자비의 기별을 가지고 우리들의 가정을 찾아 오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봉사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협력하고자 기다리신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들과 함께 계시면서 치료해 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사 49:8, 9).
“좋은 소식을 가져 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 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사야 52장 7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식을 발하여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이사야 52장 9, 10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