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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주 기도문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태복음 6장 9절).

우리의 구주께서는 주의 기도를 두 번 가르치셨는데, 한 번은 산상 설교를 듣던 무리에게 하시고, 또 한 번은 그로부터 몇 달 후 제자들만 있는 데서 하셨다. 제자들은 잠시 그들의 주님과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돌아왔을 때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고 계시는 그분을 발견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시는 듯 계속 큰 소리로 기도하셨다. 구주의 얼굴이 하늘의 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분의 바로 면전에 계신 듯하였으며, 그분의 말씀에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강한 능력이 있었다.경청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깊이 감동되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당신의 아버지와 교통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시는 것을 흔히 목격하였다. 그분께서는 당신께로 밀려드는 무리에게 봉사하고 랍비들의 신빙성 없는 궤변을 폭로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셨다. 이처럼 계속적인 수고로 극도의 피곤을 보이시자, 그분의 모친과 형제들은 물론 제자들까지도 그분의 생명이 희생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나 그분께서 고된 하루를 마감하는 기도의 시간에서 돌아오실 때, 그들은 그분의 얼굴에서 평화의 모습, 곧 전신을 휩싸고 있는 듯한 상쾌함을 보았다. 그분은 아침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시간을 보낸 후에야 사람들에게 하늘의 빛을 전하기 위해 나가셨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과 사업의 능력이 그분의 기도 시간과 관련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제 그분의 간구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들은 마음이 위엄에 눌려 겸비해졌다. 그분께서 기도를 그쳤을 때, 그들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누가복음 11장 1절) 하고 부르짖은 것은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기도를 가르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전에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반복하신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너희는 내가 이미 알려 준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너희가 아직 깨닫지 못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이 기도문의 말씀들을 꼭 그대로 사용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성을 쓰신 분으로서 기도에 대한 당신의 이상을 제시하시되, 말은 어린아이가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가장 명석한 사람들도 그 의미를 다 헤아릴 수 없는 포괄적인 것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감사의 찬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필요를 아뢰고, 죄를 자백하고, 그분의 약속에 따른 자비를 구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
(누가복음 11장 2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신다. 그분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히브리서 2장 11절). 구주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접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강하고 간절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사용해야 하는 첫번째 말로 거룩한 관계를 보증하는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게 하신다.
여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신다는, 용기와 위로로 가득 찬 놀라운 진리의 선언이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한 당신의 마지막 기도에서 하신 말씀, 곧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요한복음 17장 23절)신다는 말씀이다.
사단이 권리를 주장하며 폭정을 일삼아 온 이 세상을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한 위대한 업적을 통하여 사랑으로 안으시고 다시 여호와의 보좌와 연결시키셨다. 그룹과 스랍과 타락하지 아니한 모든 세계의 무수한 무리들은 이 승리가 확정되었을 때 하나님과 어린양을 향해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타락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과, 세상이 죄의 저주에서 속량 될 것을 생각하며 기뻐하였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놀라운 사랑을 직접 받게 된 자들은 얼마나 더 기뻐해야 되겠는가!
어찌 우리가 의심과 반신 반의의 마음을 가지며 자신을 고아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신 것은 율법을 범한 자들을 위해서였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평화와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와 같이 되셨다. 우리는 하늘에 중보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죄짐을 스스로 져야 하는 고아로 버림을 받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한일서 3장 2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로마서 8장 17절).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한일서 3장 2절).하나님께 나가는 첫 단계는
그분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고 계시는 사랑을 알고 믿는 것이다(요한일서 4장 16절).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이끌려 그분께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이기심을 버리게 된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모든 자녀를 우리의 형제로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리저리 얽힌 거대한 인간 사회의 한 부분이며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간구할 때 자신과 함께 이웃도 포함시켜야 한다. 자신만을 위하여 축복을 구하는 사람은 올바로 기도한다고 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그대로 하여금 그분께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완전히 이해하라. 세상의 그 어떤 부모도 우리를 지으신 분께서 죄인을 위해 호소하시는 것처럼 열렬하게 호소한 적은 없다. 아무리 다정하고 관심이 많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이처럼 따뜻한 초청의 손길을 뻗은 적은 일찌기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도처에 계신다. 그분은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들으시고,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각 사람의 슬픔과 실망을 맛보시고, 우리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매와 친구와 이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지 주시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끊임없이 넘쳐흐르고 있다.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는 그분의 사랑에 변함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그분의 지혜로 인도함을 받고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하는 그분의 자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생애를 위한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품성과, 그분의 가족과, 그분의 사업을 최고의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될 것이다. 그대가 가지게 된 하늘 아버지와, 그 가족의 모든 구성원과의 관계를 기쁜 마음으로 인정하며 귀히 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한 가족이 된 자들의 복리를 위한 것이라면, 비록 미천한 일일지라도 모두 즐거이 하게 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로 바라보도록 명령하시는 이분께서는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시편 115편 3절)다. 우리는 그분의 보호 아래서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편 56편 3절)고 말하면서 안전하게 쉴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장 9절).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지존자(至尊者)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존경심을 가지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 하시도다”(시편 111편 9절).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칭호나 명칭을 경솔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도로써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알현실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경외심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가리운다. 그룹과, 빛나고 거룩한 스랍들도 더할 수 없는 존경심으로 하나님의 보좌로 다가간다. 그렇다면 유한하고 죄 많은 존재인 우리는 한층 더 경건한 태도로 우리의 창조주이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않겠는가!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것은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외관상으로 최대의 경건을 나타내면서도 그분의 이름을 계속적으로 모독할 수가 있다. “여호와의 이름”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며 … “악과 과실(過失)과 죄를 용서”(출애굽기 34장 5-7절)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것으로,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예레미야 33장 16절)는 기록이 있다.
이 이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유업이다. 가족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불리어진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심한 고난과 환란을 당할 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예레미야 14장 9절) 하고 기도하였다.
이 이름은 하늘의 천사들에 의하여,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거민들에 의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 그대는 그 이름이 이 세상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그대 자신에 의해서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간구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그대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셨으므로,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야고보서 2장 7절)손상하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당신의 대리자로 세상에 내보내신다. 그러므로 생활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야 한다. 이러한 간구를 드리려면 하나님의 품성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생활과 품성으로 하나님의 생애와 품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대는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없고 그분을 이 세상에 나타낼 수 없다. 그대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이 일을 할 수 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태복음 6장 10절).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돌보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또한 우주의 크신 왕이기도 하다. 그분의 나라의 유익이 곧 우리의 유익이므로, 우리는 그 나라의 설립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의 영광의 나라가 즉시 임하기를 고대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당장은 그 나라가 건설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되 미래의 사건으로 알고 해야 했다. 그러나 이 간구는 그들에게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이 그 나라의 임함을 당대에 이루어질 사건으로 볼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일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 것은 그 나라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시간에 기필코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은 죄와 반역으로 충만해 있는 마음들이 그분의 사랑의 주권에 날마다 굴복함으로써 지금 건설 중에 있다. 그러나 그분의 영광의 나라의 완전한 건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 에게 붙인 바”(다니엘 7장 27절) 될 것이다. 그들이 “창세로부터”(마태복음 25장 34절)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위대한 권능을 가지고 다스리실 것이다.
하늘의 문들이 다시 들리며, 우리 구주께서 천천 만만의 거룩한 무리들과 함께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나타나실 것이다. 여호와 임마누엘은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스가랴 14장 9절),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요한계시록 21장 3절)실 것이다.그러나 예수께서는 재림이 있기 전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마태복음 24장 14절)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은혜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전에는 그분의 나라가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다른 사람들을 그분께로 인도할 때, 우리는 그분의 나라가 빨리 임하도록 하는 것이다. 오직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장 8절)라고 말하면서 안 보이는 눈을 뜨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사도행전 26장 18절)기 위하여 그분의 사업에 투신하는 사람들, 이들만이 “나라이 임하옵소서” 하고 진실하게 기도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장 10절).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거룩한 율법에 표현되어 있으며, 이 율법의 원칙은 곧 하늘의 원칙이다. 하늘의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가장 높은 지식을 얻는 것이며,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이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봉사를 할 때 율법주의 정신으로 하지 않는다. 사단이 여호와의 율법을 거역하였을 때, 천사들은 마치 전혀 의식하지 않던 것을 갑자기 떠올리듯 율법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천사들은 봉사할 때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한다. 그들과 그들의 창조주는 서로 완전히 연합되어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순종은 고역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봉사를 기쁨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영광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편 40편 8절)라는 그분의 말씀이 울려 퍼진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간구하는 것은 이 땅에서 악의 통치가 끝나고, 죄가 영원히 소멸되고, 의의 나라가 건설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그 때에는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모든 선을 기뻐”(데살로니가후서 1장 11절)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태복음 6장 11절).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전반부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에 대한 것으로서, 그분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 그분의 나라가 세워지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첫째의 관심사로 삼을때, 그대는 자신 있게 필요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만일, 자아를 버리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면, 그대는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고,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이 그대를 위한 것이 된다. 현세와 내세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모든 보화가 그대에게 열려진다. 천사들의 봉사, 성령의 선물, 그분의 종들의 활동, 이 모든 것이 그대를 위한 것이다. 세상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그대에게 유익될 수 있는 한 그대의 것이다. 악한 자들의 적의까지도 그대를 하늘나라에 적합하도록 훈련시켜 줌으로써 축복이 된다는 것이 판명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만물이 다 너희 것”(고린도전서 3장 23, 21절)이 된다.그러나 그대는 아직 유업을 관리할 처지에 이르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부부에게 한 것처럼 교활한 방법으로 그대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그대의 귀중한 재산을 그대에게 일임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위하여 그 재산을 약탈자의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붙들고 계신다. 그대는 어린아이처럼 매일 그 날에 필요한 것들을 받게 될 것이다. 매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한다. 내일을 위하여 넉넉하게 소유하지 못할지라도 낙담하지 말라. 그대는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편 37편 3절)라는 그분의 약속의 보증을 가지고 있다. 다윗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편 37편 25절)고 말한다. 그릿 시냇가에 있는 엘리야를 먹이기 위하여 까마귀를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실하고 헌신적인 자녀들 중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의롭게 행하는 사람에 대하여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33장 16절).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시편 37편 19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로마서 8장 32절). 당신의 홀로 된 어머니의 걱정과 근심을 덜어드리고 나사렛의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 어머니를 도우신 분께서는 자녀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어머니를 동정하신다. “고생하며 유리”(마태복음 9장 36절)하는 무리를 동정하신 분께서는 지금도 고난중에 있는 불쌍한 자들을 가엾게 여기신다. 그분께서는 축복하시기 위해 그들을 향해 손을 뻗치고 계시며, 또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신 동일한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고 가르치신다.“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도 기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믿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굶주린 사람들을 먹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의 은택을 준비하셨다(시편 68편 10절). 그분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누가복음 14장 12-14절).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9장 8절).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린도후서 9장 6절).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에는 육신을 지탱해 줄 양식뿐만 아니라 영혼에게 영양을 공급하여 영생하게 할 영적 양식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한복음 6장 27절)고 명령하신다. 그분께서는 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한복음 6장 51절)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구주는 생명의 양식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며 그것을 심령 가운데 받아들임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을 먹게 된다.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고 이해시키며 말씀의 진리를 우리의 가슴에 새겨 주기 위해 성령이 주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분께서 성령을 보내 그 말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심령을 강하게 해줄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도록 날마다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의 축복과 영적 축복을 막론하고 필요한 것을 매일 구하도록 가르치시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성취시키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변함없는 보호하심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이끌어 내어 친히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까닭이다. 우리는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위대하고 귀중한 진리의 연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이런 교제를 나눔으로써 굶주린 영혼처럼 배부름을 얻고, 목마른 자들처럼 생명의 샘에서 생기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누가복음 11장 4절).

예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줄 때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는 것은 그분의 사랑이며, 이 사랑에 마음이 감동되면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예수께서는 주의 기도를 마치신 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 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부언하셨다.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끊어 버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들이 잘못을 고백하지 않는 한 그들을 용서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물론, 회개와 고백으로 마음을 겸손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도리이긴 하나,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이 그 실수를 고백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그들에 대하여 긍휼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아무리 심한 상처를 줄지라도, 불만을 품거나 상처를 받은 자신을 동정하지 말며,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용서받으려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용서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널리 용서하시리라”는 약속을 주시면서, 마치 그 약속의 뜻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처럼 이렇게 부언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장 7-9절).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주는 사법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한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구원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편 10절) 하고 기도했을 때 용서의 참 뜻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편 103편 12절)라고 말한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기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악의 짐을 담당하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장 32절)고 말씀하신다.
거룩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거하시며 그대를 통하여, 소망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죄로 병든 마음에 하늘의 평화를 가져다 줄 천국의 사랑을 나타내시게 하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처음부터 가져야 할 조건은 그분에게서 자비를 받고 그분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이다.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누어 주기 위하여 우리가 필수적으로 해야 할 것 하나는, 그분께서 우리에 대하여 가지신 사랑을 깨닫고 믿는 것이다(요한일서 4장 16절).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자 그가 할 수 있는 온갖 기만을 부리며 활동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실수와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를 축복하고 구원해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유도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연약한 것 외에는 볼 것과 하나님께 내어놓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사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우리의 품성의 결함을 고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사단은 다음과 같이 속삭일 것이다. 그대가 기도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대는 악한 일을 한 적이 없단 말인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양심을 더럽힌 일이 없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사단에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장 7절)라고 말 할 수 있다. 죄를 범하여 기도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바로 기도해야 할 때이다. 부끄럽고 매우 비참한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기도하고 믿어야 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장 15절). 용서 곧 하나님과의 화목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죄 많은 인간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를 둔 선물로서 주어진다.
변명으로 우리의 죄를 감소시키고자 노력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하며, 그것은 실로 무겁다. 오직 갈바리만이 죄의 무서운 흉악성을 나타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면, 죄가 우리를 눌러 뭉개 버릴 것이다. 그러나 죄 없는 분께서 우리와 입장을 바꾸셨다. 그렇게 할 책임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장 9절). 당신의 율법에 공의로우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분,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진리인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가 7장 18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마태복음 6장 13절).

시험은 죄를 짓도록 유인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사단과 우리 마음속의 악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야고보서 1장 13절).사단은 우리의 품성에 있는 악을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 드러내고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주장하기 위하여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고자 노력한다. 스가랴의 표상적 예언을 보면,
사단이 여호와의 사자의 바른편에 서서,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비난하며 사자가 그를 위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께로 이끌기를 원하시는 모든 영혼에 대한 사단의 태도를 나타낸다. 원수는 우리를 죄 가운데 빠지게 한 후 하늘 우주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스가랴 3장 2절). 그분께서는 또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스가랴 3장 4절)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극진한 사랑으로 우리 안에 성령의 귀한 은혜가 나타나도록 하고자 애쓰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장애와 핍박과 난관을 허락하시되 저주로서가 아니라 우리 생애의 가장 큰 축복으로 허락하신다. 우리가 대항한 모든 시험과 우리가 용감하게 견딘 모든 시련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며 품성 형성이라는 과업에서 우리를 전진하게 한다. 하늘의 능력으로 시험에 대항하는 사람은 세상과 하늘 우주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효능을 나타낸다.그러나 우리는 시련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낙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의 욕망이 이끄는 데로 가지 않도록 해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자신을 하나님의 지도에 맡기며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구하게 된다.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스스로 택한 길을 가고자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실 그분의 손을 기다리며,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이사야 30장 21절)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사단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 얻게 될 유익을 생각하기 위하여 지체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죄는 그 가운데 빠지는 모든 사람에게 불명예와 불행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본질상 눈을 현혹시키고 기만적인 것이므로 아첨하는 말로써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비록 사단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능력에서 보호의 보증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힘이 미치는 한 유혹자가 우리에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모두 막아야 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기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약속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3절)는 보증을 얻게 된다.
악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안전책은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시게 하는 것이다. 시험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이기심을 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바라볼때, 이기심은 가증하고 불쾌한 성질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서 쫓아내 버리고자 갈망하게 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때 우리의 마음은 부드럽고 겸손해지며, 시험은 그 힘을 잃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품성을 변화시키게 된다.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위하여 돌아가신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떠나가고 시험에 넘어질지 모르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속량물로 바친 그 사람을 결코 버리고 돌아서지 않으신다.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눈을 뜬다면, 압박에 눌리고 슬픔의 짐을 진 사람들이 마치 짐 더미 아래 있는 마차처럼 깔려서 낙망 가운데 죽어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시험을 당하여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천사들이 빨리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이들 영혼들을 포위하고 있는 악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 영혼들을 인도하여 확실한 기초 위에 발을 디디도록 해준다. 이 두 군대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세상의 군대들이 싸우는 것처럼 실제적이며, 그 영적 투쟁의 결과에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누가복음 22장 31, 32절)라고 하신 말씀은 베드로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가 홀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와 대결하는 싸움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누가복음 10장 19절)고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가운데 생활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결코 놓지 않을 손으로 그대를 굳게 붙들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이해하고 믿으라. 그리하면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랑은 사단의 모든 기만과 공격에 대해 난공 불락의 요새가 된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언 18장 10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태복음 6장 13절).

이 마지막 말씀은 주 기도의 첫 문장과 같이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모든 권세와 권위와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신 분으로 지적한다. 구주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앞에, 그들이 꿈꾸어 온 것처럼 세속적 번영과 영광의 양지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증오와 사단의 분노의 폭풍으로 얼룩진 흑암의 세월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셨다. 국가적 분쟁과 파멸 속에서, 제자들은 발걸음이 위험에 휩싸이면서 때때로 마음이 공포로 압도당할 것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황폐되고, 성전이 무너지고, 예배가 영원히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량한 해안에서 파선된 것처럼 모든 나라로 흩어지는 것을 볼 것이었다. 예수님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고) …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태복음 24장 6-8절)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소망이 사라졌다거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버리셨다는 생각으로 두려워할 것이 아니었다. 권세와 영광은 위대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의 완성을 위하여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꾸준히 움직이시는 분에게 속해 있다. 매일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모든 죄악의 권세와 지배를 초월하여 만유를 다스리는 나라를 소유하시며 그들의 아버지와 그들의 영원한 친구가 되시는 주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지시를 받았다.예루살렘의 멸망은 이 세상을 무너뜨릴 마지막 파멸의 상징이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된 예언들이 마지막 시대에는 더욱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우리는 지금 크고 엄숙한 사건 바로 앞에 서 있다. 세상이 한 번도 목격한 일이 없는 위기가 우리 앞에 와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만유를 다스린다는 보증은 초기의 제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기쁨이 된다. 다가오는 사건들에 대한 계획이 창조주의 손에 쥐어져 있다. 하늘의 주권자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대한 이해 관계와 마찬가지로 나라들의 운명도 친히 주관하신다. 거룩한 교사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성취함에 있어서, 고레스에게 말씀하신 것과 똑같이 모든 대리자에게“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이사야 45장 5절)라고 말씀하신다.
선지자 에스겔이 이상을 보았을 때, 그룹 천사의 날개 아래 손이 나타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로 사용하는 자들은 그분의 사업이 그들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막중한 책임은 유한한 자들이 지도록 되어 있지 않다. 졸지 아니하시는 분,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는 분께서 당신 자신의 사업을 추진 시키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한 자들의 목적을 좌절 시키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해치려고 모의하는 자들의 계획에 혼란을 일으키실 것이다. 왕이시며 만군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고 국가들의 투쟁과 소요 가운데서도 여전히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 하늘에서 통치하시는 분이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분은 모든 시련을 헤아리시며, 모든 영혼이 반드시 들어가 시험 받아야 할 풀무의 불을 주시하신다. 왕들의 요새가 무너지고 분노의 화살이 하나님의 원수들의 가슴을 꿰뚫을 때에도,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의 손에서 안전할 것이다.
“여호와여 광대 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역대상 29장 11,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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