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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편
목 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벧전 5:2)

제 36 장
선한 목자

모든 교역자의 큰 모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목자로 비유하셨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 14, 15) 하셨다.
이 세상 목자들이 자기의 양을 알듯이, 신령하신 목자 예수님께서도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양무리를 아신다.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31)잃어버린 양의 비유에 나타난 목자는 한 마리의 양-가장 적은 수량의 양-을 찾기 위하여 나아갔다. 자기의 양 가운데 한 마리가 행방 불명이 된 것을 알게 된 목자는 평안히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양만 바라보고 말하기를 “그래도 아흔 아홉 마리가 남아 있으니, 잃어버린 단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하여 나가는 것은 너무 수고로운 일이다. 제 혼자서도 돌아오겠지. 돌아오면 내가 양 우리의 문을 열어 안으로 맞아들이겠노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리자마자, 목자는 슬픔과 근심에 싸인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나간다. 아무리 밤이 어둡고 바람이 사나울지라도, 길이 아무리 험하고 위험할지라도, 또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더딜지라도, 그는 잃은 양을 찾기까지 계속 돌아다닌다.
먼 곳에서부터 양의 소리를 희미하게나마 첫 번으로 들을 때에, 그는 얼마나 안심이 되었을까! 그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서 가파른 고개를 기어올라가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의 가장자리를 거쳐서 그 소리 나는 곳을 향해 간다. 그는 이렇게 찾아가는 중에 그 양의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듣고, 그 양이 거의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침내 잃은 양을 찾았을 때에, 그 목자가 그 양을 자기 뒤에 따라 오라고 하였겠는가? 또는, 그 양이 자기에게 그처럼 걱정과 괴로움을 끼쳤다고 하여서 그 양을 몹시 구박하고 때리거나 혹은 자기 앞에 몰고 갔겠는가? 아니다. 그는 쇠약해진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찾은 것을 기뻐하며 우리로 돌아온다. 그는 너무 기뻐서 노래하며 만족해 한다. 그는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고 외친다.
이와 같이, 선한 목자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죄인 하나를 찾으시는 때에는 하늘과 땅이 모두 기뻐하여 감사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6, 7).크신 목자 예수님의 아래에는 많은 목자들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든 양을 지키라고 맡기셨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두번째 다시 일꾼으로 택하실 때, 그에게 부탁하신 첫째 사업은 어린 양을 먹이는 일이었다(요 21:15 참조). 그러나, 이 일은 지금까지 베드로가 해보지 못한 일이었고,
또 많은 주의와 사랑과 백절 불굴의 인내가 필요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곧 소년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을 돌보며, 지식이 없는 자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 성경을 설명하여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에 유용한, 인물이 되도록 교육하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베드로는 그런 사업에 종사할 자격이 없었고, 또 이 사업의 중대함을 깨닫지도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그 말씀은 실로 의미 심장한 것이었다. 주께서는 제자가 되는 자격과 봉사 사업에 참가할 수 있는 한 가지 유일한 조건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셨다. 이것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격이다. 만일, 베드로가 다른 모든 자격을 갖추고 있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도저히 주의 양을 치는 신실한 목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식과 박애, 웅변과 은혜, 감사와 열심은 모든 선한 사업에 도움이 되지만,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 사업에서 실패할 것이다.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에서 그리스도께 받은 교훈을 일평생 잊지 않고 그가 성령의 감동함을 받아 여러 교회에게 편지할 때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1-4)우리에서 벗어나 방황하는 양은 모든 생물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자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양을 찾지 않으면, 아무리 해도 제 스스로 집을 찾아 돌아올 수는 없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생도 이와 같다. 그는 잃어버린 양처럼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구원하지 아니하면 결코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목자장 그리스도 아래서 활동하는 목자인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동정심과 슬픔과 인내심을 가지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아 하겠는가! 또,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극기와 고난과 궁핍을 이겨 내야 하겠는가!
이제 목자장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서, 길 잃고 방황하는, 양들을 찾는 목자가 필요하다. 이 일에 종사하려면 육체의 쾌락과 안일을 다 이 일을 위해 희생해야만 한다. 죄를 범한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로써 온정을 베풀며, 또한 저희의 여러 가지 잘못과 타락과 절망중의 비참한 지경에 있었던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동정심으로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참 목자의 정신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참 목자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말씀을 전파하고 가정들을 방문하며, 전도함으로써 사람들의 궁핍파 고통과 시련을 알게 되며, 또 인류의 괴로움을 친히 지신 구주와 협력하여 저희의 고통을 나누어 가지며, 또 저희의 근심을 위로하며, 심령의 기갈을 면케 하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게 한다. 교역자가 이런 일에 종사할 때에 하늘 천사가 함께 하며, 또 교역자는 친히 구원을 얻을 지혜가 있게 하는 진리의 교훈과 지도를 받는다.
* *
우리의 사업에는 개인의 활동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큰 결과를 나타낸다. 이런 활동이 적기 때문에 사람들이 멸망하여 가고 있다. 한 영혼의 가치는 무한하다. 갈바리의 십자가가 이를 말해준다. 그리스도께로 인도된 자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도구가 되며, 따라서 축복과 영혼을 구원하는 결과가 계속 증가될 것이다.
제 37 장
개별적인 봉사

목사들은 설교를 너무 많이 하고, 진실로 각 개인의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하여 돌보는 일은 너무 적게 한다. 그러므로, 각 영혼들을 위한 개인적인 활동이 더욱 요구된다. 목사는 그리스도와 같은 동정심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사람들과 친밀하여 그들로 영생에 관한 큰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깨우쳐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마치 도로처럼 단단하여서 그들에게 구주를 소개하려고 하는 것이 무익한 것 같이 보일지 모르나, 논리나 토론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지도 또 확신시키지도 못할지라도, 개인 전도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은 돌과 같이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진리의 뿌리가 박히게 한다.
목회는 설교하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하며, 열심 있는 개인적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상의 교회는 허물이 많은 남녀로 구성되었으므로, 저희가 현세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활동을 하고 또 내세에 영광과 영생의 면류관을 받도록 그들을 훈련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근면한 활동이 필요하다. 목사 곧 신실한 목자가 필요하다.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첨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그들에게 생명의 떡을 나누어 먹이며, 매일 생애에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며, 항상 이기심 없는 깊은 사랑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그 맡은 사람들을 위하여 활동하는 자이어야 한다.목자장의 아래서 일하는 목자들은 때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란과 불화, 시기, 투기 같은 것을 만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 때에는 재치 있게 활동하며,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목사는 강단에서의 설교와 개인 활동으로 신실하게 경고하며, 죄를 책망하며, 잘못된 것을 경고하여야 한다.
고집이 센 사람은 그 기별을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종을 오해하고 비평하고 공격할 것이다. 그런 때에, 목사로서 기억 하여야 할 교훈은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 18)는 것이다.
복음 교역자의 사명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엡 3:9)는 것이다.만일, 이 거룩한 직분에 참예한 자가 헌신과 극기를 가장 적게 하는 일을 택하여, 다만 강단 위에서 설교만 하고 개인 전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그 사람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바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기까지 한 영혼들이 개인 전도의 결핍으로 인하여 멸망하여 간다. 이 사업에 참여하고도 목자들이 하여야 할 개인 전도를 기뻐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는 전혀 하나님의 부르심을 오해한 자이다.목회자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전진시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기회가 좋다”함은, 예배를 보는 장소와, 시간의 특권과, 사람들이 종교적 문제를 이야기하는 경우에 좋은 기회를 잃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는 것을 말한다. 또 “기회가 나쁘다” 함은, 집안에서나 들에서나 혹은 길가에서나 시장에서 그 기회를 따라 사람의 마음을 성경의 위대한 문제에 향하게 하며 사랑과 열성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그들에게 이야기하여 알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때를 얻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같은 기회를 너무나 많이 거저 보낸다.
그러나, 양심을 향하여 발한 지혜로운 충고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오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성경에는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전 11:6)한다고 하였다. 진리의 씨를 뿌리는 자는 때로는 번민하며, 또 때로는 그 수고가 쓸데없는 것 같이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신실하게 일하기만 하면, 반드시 그 일의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하셨다.
가정 방문
목사가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의 일을 단지 시작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아직도 그에게는 개인적인 활동이 남아 있다. 곧, 그는 사람들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고 열심과 겸손으로 그들과 이야기하며 또 기도하여야 한다. 세상에는 주의 종들이 친히 그 가정을 방문하고 향상하는 도를 보이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그 가정에 미치지 못할 가정들이 있다. 이런 일에 종사하는 자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온전히 일치하여야 한다.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목사는 가정마다 다니면서 진리를 가르치며 그들과 친밀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협력해서 활동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적 능력으로 입혀 주시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의 활동을 지도하시며 청중의 미음을 깊이 감동시킬 수 있는 말을 하게 하실 것이다.
모든 목사는 바울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고 또 내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노라(행 20:27, 20, 21)
우리 구주께서는 집집마다 다니시며 병든자를 고치시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시며, 고통당하는 자의 고통을 덜어 주시며, 마음이 상한 자에게 평화의 말씀을 하시었다. 또, 그의 팔로 어린아이들을 안아 축복하시며 괴로와하는 어어니들에게는 희망과 위로의 말씀을 하여 주셨다. 그는 불행과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에 언제나 친절과 사랑으로 대해 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셨다. 그는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능력을 주는 것을 그의 양식으로 삼으셨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은 이제까지 랍비들이 가르치던 유전과 교리와는 전혀 같지 않았으므로 청중들의 마음 가운데 새 희망이 생기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훈에는 열성이 가득하여, 주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죄에서 돌이키게 하였다.
목회 사업에 종사하는 나의 형제들에게 권고하노니, 개인 전도로써 사람들에게 접근하며 그들과 친목하라. 이 일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킬 수도 없는 일이며, 돈을 거저 주거나 꾸어 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강단 위에서의 설교만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각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것이 곧 전도자의 사명이며, 이 일은 설교와 연합하여야 한다. 만일, 이를 행하지 않으면, 설교한 바가 십중 팔구는 실패할 것이다.진리를 찾아 구하는 자에게 꼭 그 때에 적당한 말을 하여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사단이 늘 이런 사람들에게 유혹하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도우려 할 때에 거절 당할지라도 결코 개의치 말라. 비록 그대의 일한 결과가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낙심하지 말라. 활동을 계속하며, 사리를 옳게 분별하여, 말하기도 하고 잠잠하기도 하며,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질 자로서 사람들을 잘 보살피며, 사단의 여러 가지 계교를 항상 살피는 가운데 자기의 의무를 등한히 하지 않도록 하라. 여러 가지 고난들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지 말고 굳센 믿음과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이 모든 고난을 극복하며, 믿음으로 노력을 아끼지 말고 씨를 뿌리라.
* *
그대가 다른 사람을 방문할 때에 갖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친절히 인사함으로 그 주인에게 신임을 받기도 하고, 냉담하게 인사함으로 그대가 그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는 생각을 품게도 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대할 때에, 동정을 베푼다는 거만스러운 태도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도 우리와 같이 귀하므로 우리도 그들을 귀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대하여야 한다. 우리의 의복은 단순하고 평범한 것이 되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의복 차이가 너무 심함으로 그들이 부끄러운 생각을 품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대개, 가난한 자에게는 즐거운 일이 많지 못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저희의 가정에 기쁨과 빛을 가져다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예수님의 온정을 가지고 나가면 반드시 그들 자신의 마음을 열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38 장
목자의 일

참 목자는 양무리를 먹이고 인도하며 보호하고 보살피는 일에 자신의 모든 정신을 기울인다. 그는 항상 크게 지혜를 활용하여 모든 양들에게 따뜻한 성의를 다하며, 특히 시험과 고통과 낙망을 당한 자에게 더욱 성의를 다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요 13:16)니 그리스도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빌 2:7)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15:1-3).
* *많은 일꾼들은 저희의 도움을 가장 많이 요구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못함으로 그 사업에 실패를 당한다. 그러므로, 먼저는 성경을 손에 들고서 “진리가 무엇이냐?”하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의문들을 알고자 진지하게 노력하며 그들을 마치 학교에서 학생들을 다루듯이 조심성 있고 친절하게 지도하며 가르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들이 진리라고 믿어왔던 그릇된 이론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성경의 여러 가지 교리를 그릇 이해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때에,
그들은 당황하며 회의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에, 이들에게는 따뜻한 동정과 가장 현명한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주의 깊이 가르치며, 그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며, 친절과 정성을 다하여 돌보며 보살펴 주어야 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그리스도와 동역자가 되는 것은 큰 특권이다. 구주께서는 오래 참음과 이기심 없는 노력으로써 타락한 인류에게 나가 죄의 결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가르치는 주의 제자들은 큰 모본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 *
새 선교 지방에서는 많은 기도와 지혜로운 활동이 필요하다. 설교할 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체험으로 경건의 오묘함을 깨닫고 사람들의 긴급한 필요를 도울 수 있는 자 곧 예수님의 종 된 자기 지위의 중대함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지라고 말씀하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사람이 필요하다.
목사는 교인들과 밀접히 교제하며, 여러 같지 않은 사람의 성격들을 익숙히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심리 작용을 잘 연구하여, 청중의 사고 능력에 따라 적당하게 가르칠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 목사는 사람의 성격과 필요를 깊이 연구하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큰 사랑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 39 장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침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계획은 하늘로부터 온 생각이다. 남자나 여자나 이 같은 선교적 집회에 참석할 사람이 많이 있다. 이렇게 함으로 교역자는 더욱 향상하게 되며, 하나님의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지고, 교역자는 모든 나라와 족속의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날수가 있다. 성경이 가정에 소개됨으로 그 거룩한 진리가 깊이 마음 속까지 들어간다.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또 스스로 비판하도록 권고한 연후에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든지 혹은 거절 하든지 하는 책임은 그들 자신이 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 귀중한 사업에 반드시 상당한 보상을 주실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반드시 성공하게 하실 것이다.
* *
새로 전도를 시작한 곳에는 반드시 참을성 있게 인내함으로 견디어야 한다. 조그맣게 시작한 사업에 대해서 실망하지 말라. 아주 하찮게 보이는 사업이 가장 큰 결과를 내는 예가 많다. 인간을 위하여 우리가 보다 직접적으로 일하면 일할수록 보다 많은 성과를 거둘것이다. 개인적인 감화는 힘이 된다. 우리와 밀접히 교제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화로 인하여 마음에 감명을 받게 된다. 많은 사람이 모인 앞에서 연설할 때에는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대할 때와 같은 감동을 사람들에게 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을 버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그가 선교하는 사람들과 밀접히 교제하여, 그들이 교역자의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을 만지며 또 그의 원칙을 배우는 동시에 그의 사랑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주의 종 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설교와 강연을 하는 것만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며 또 일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업은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교육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떤 가족들과 더불어 앉아서 진리를 가르치며, 그들로 질문하게 하고, 인내와 겸손으로써 그들에게 답하라. 이 일을 항상 계속하되 더욱 많은 공중 활동과 병행하도록 하라. 설교는 적게 하고 가르치기는 많이 하되 어떤 가족이나 혹은 적은 무리들과도 더불어 성경을 공부하며, 기도함으로 그들을 가르치도록 하라.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모든 자들에게 권고한다. 가정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대의 성경을 펴서 그들에게 성경의 위대한 진리를 소개하라. 그대의 성공은 그대의 지식이나 학력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대의 능력에 달렸다. 사람들과 친근히 교제함으로 가장 유능한 강연보다 더 쉽게 사람들의 사상의 방향을 돌이키게 할 수 있다. 난롯가에 모여 앉은 어떤 가족이나 또는 적은 무리들이 모인 개인 가정에서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은, 밖에서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는 설교나 혹은 회관이나 교회당에서 하는 설교보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더욱 성공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개인 전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강단에서 성경 말씀을 전하는 목사와 마찬가지로, 일하는 태도에 있어서 기계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항상 배우기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또 가장 높은 자격을 가질 수 있도록, 성경에 익숙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열성으로 노력하여야 한다. 그들은 또한 두뇌를 활용하는 습관을 기르며, 특별히 기도와 성경 공부에 힘쓸 것이다.
제 40 장
개인적인 노력의 가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가장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의 역량을 자부하지 않고 겸손과 믿음으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려고 힘쓴 남녀들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와 같이 하셨다. 그분은 가르치시고자 하신 사람들에게 가까이 나가셨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들 앞에서 교훈의 말씀을 들려주셨으나, 말씀하시는 도중에 지나가던 행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그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임으로 마침내 큰 무리가 되어, 하늘에서 오신 크신 교사의 말씀을 놀랍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듣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마리아 여인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회중이 모이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다. 주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진리 중에 어떤 것은 개인에게 말씀하신 것들이다. 사마리아의 한 여인에게 말씀하신 놀라운 말씀을 생각하여보라. 그리스도께서 야곱의 우물 곁에서 쉬고 계실 때에 마침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다. 주께서 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시니 그 여자는 매우 놀랐다. 주께서는 냉수 한 그릇을 원하는 동시에 또한 이로 인하여 그에게 생수를 주는 길을 열고자 하신 것이다.
그 여자가 말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이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리스도께서 이 한 여자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나타내셨는가! 또한, 그분의 말씀에는 얼마나 열렬하고 감동적인 힘이 있었는가! 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고 물 길러 온 것도 잊어버리고 급히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요 4:7-30 참조)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 하던 일을 버리고 야곱의 우물 곁에서 쉬고 계신 예수님께로 와서 여러 가지 문제를 질문하고, 전에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였던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 말씀을 듣는 그들은 마치 캄캄한 밤에 한 줄기 새벽 빛을 따라 밝은 아침을 구하는 이들 같았다.
예수님께서 피로하고 시장하여 우물가에 앉아 쉬시던 때에 행하신 그 일의 결과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도우고자 하셨던 한 영혼은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자가 되어 저희에게 가서 저희를 구주께로 나오게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업이 지상에서 발전하게 되는 변함없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빛을 발하라. 그리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 빛을 받아 다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군인들처럼 어느 때를 막론하고 즉시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기회는 시시 각각으로 여러분의 앞에 열리고 있다. 이러한 기회들은 끊임없이 오고 간다. 그러므로, 이를 최선껏 이용할 수있도록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말씀을 들려줄 수 있는 기회가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지 않도록 하고 그리스도의 무한한 부요하심을 남에게 알게 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하라. 한번 잃어버린 기회는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제 41 장
분 업

진리를 성공적으로 전파하는 일에 우리가 예기치 못한 큰 장애가 우리 교회 자체 안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우리의 믿음을 소개하기 위하여 전도회를 할 때마다, 신자들은 마치 저들은 제 삼자인 양 물러서서 모든 무거운 짐을 목사 혼자 지게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장 유력한 목사의 활동도 그다지 좋은 성과를 볼 수 없는 때가 있다. 비록 설교를 아무리 잘하고 사람들에게 적절한 기별을 전달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영혼을 수확하여 그리스도께 드리지 못한다.
목사는 이미 몇 신자가 있는 곳에서 일할 때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도하기 전에 먼저 교인들이 진심으로 협력하도록 훈련할 것이다. 목사는 교인 각 사람을 위하여 활동하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깊은 영적 경험을 가지고 남을 위해 일하도록 권장할 것이다. 그리하여, 교인들이 기도와 활동으로 목사를 돕게 되면, 그 전도회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
* *교인마다 각각 그 책임을 깨닫지 못하면 각 교회에서 결코 큰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교인은 각각, 자기 영혼의 구원은 자신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얻게 됨을 깨달아야 한다. 노력 없이는 영혼이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목사가 신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빛을 전하는 통로는 될 수 있으나,
일단 빛이 전해진 후에 그 빛을 활용하며 다시 그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치게 하는 것은 신자에게 달린 것이다. ― 2T, 121.
교회의 조력자를 양성함
목사는 설교하고 활동하고 기도하는 모든 일이 다 자기 혼자만 해야 하는 의무인 줄로 생각지 말고 각 교회에서 자기를 도울 자를 양성하여야 한다.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번갈아 예배도 인도하며 성경 공부도 시키게 하라. 그리함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활용하게 되고 동시에 일꾼으로서의 수양을 받게 될 것이다.
어느 면으로 보면, 목사의 지위는 공장의 공장장과도 같고, 또한 많은 선원을 지도하는 선장과도 같다. 그들은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이 맡은 일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할 수 있도록 감독하고, 위급한 경우에만 조목조목 일에 손을 댈 것이다.
어떤 큰 제분소 주인이 하루는 공장에 들어가 보니 공장장은 기계실에서 간단한 기계를 고치고 있고, 거기서 일하는 여섯 직공은 팔장을 끼고 곁에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주인은 부당한 처리를 하지 않기 위하여 사실을 알아본 연후에 공장장을 그의 사무실로 불러 퇴직금을 주면서 면직시켰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때에 주인이 말하기를 “나는 그대로 하여금 여섯 사람을 감독하게 하려고 그대를 채용하였는데, 내가 보니 여섯 사람은 놀고 있고 그대 혼자만 일하고 있으니, 그것은 여섯 사람 중 누구도 그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나는 그대로 하여금 여섯 사람에게 노는 법을 가르치게 하려고 일곱 사람의 삯을 줄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물론, 이 사실이 적당한 경우와 적당치 않는 경우도 있지마는, 많은 목사들은 전 교인들로 각 분야의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장려할 줄 모르고 또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만일, 목사가 교인들로 적극적으로 계속 활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더욱 주의를 기울이면, 더욱 많은 일을 이룰 것이며, 연구할 시간과 방문할 시간이 더 많이 생기고, 또 이로 인하여 여러 가지 마찰이 일어날만한 일들을 미리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혹 어떤 사람들은 경험의 부족으로 잘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나 그런 경우에는 그들에게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가르쳐 줄 것이다. 이와 같이, 목사는 남녀들을 교육하여, 일꾼이 부족하여 곤란을 당하고 있는 선한 사업에 참여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로 필요한 경험을 얻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일하게 하는 것이다.
남을 구원함으로 자신이 구원을 얻게 됨
일하는 교회는 곧 발전하는 교회다. 교인들은 다른 사람을 돕는중에 원기와 기력을 얻게 된다. 나는 어떤 추운 겨울날 눈이 깊이 쌓인 눈길을 걸어가다가 혹독한 추위를 만나 거의 몸이 꽁꽁 얼어죽을 뻔하였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추위로 빈사 상태가 되어 살 기력을 거의 잃게 되었을 때에 문득 눈 위에 쓰러져 죽어 가는 한 나그네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그의 마음에 동정심이 일어나 구원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괴로움을 잊어버리고 한참 동안 죽어 가는 그 사람의 얼음장같은 찬 손발을 문지르고 일으켜 세워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도저히 그를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정의 팔로 그를 업고, 지금까지 맨몸으로도 갈 수 없었던 그 험한 눈길을 걸어갔다.
마침내 그 행인을 안전한 장소에까지 업고 갔을 때에, 문득 그가 남을 구원함으로 자기도 구원 얻게 된 사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가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열심히 노력하였으므르 자기 혈관의 얼게 되었던 피는 다시 빨리 순환하여 온몸을 전부 덥게 하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 자신이 도움을 얻는다는 공과를 항상 젊은 신자들에게 교훈과 실례로서 이야기하여, 그들의 신앙 생애에 좋은 얼매를 맺도록 하여야 한다. 낙담하는 자나, 또는 영생에 들어가는 길은 고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하여 나가 일하도록 권면하라. 만일, 이러한 노력이 신령한 빛을 구하는 기도와 연합되면, 하나님의 은혜의 생기를 받아 그들의 마음이 힘차게 고동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사랑은 더욱 뜨겁게 불타 오를 것이다. 그들의 그리스도인적 생애는 더욱 실제적이 되고, 더욱 열성이 생기게 되며, 더욱 많이 기도하는 생애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사모하는 나그네요 외국인임을 잊지 말자. 봉사의 언약으로써 주와 연합한 자들은 반드시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에 주와 함께 일할 의무가 있다.
교인들로 하여금 평일에 그 맡은 일을 충실히 하게 하고 안식일에는 그 경험한 바를 이야기하게 하면, 그 집회는 때를 따라 주시는 식물과 같을 것이며, 참석한 모든 자들에게 새 생명과 새 원기를 주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하신 바와 같이 활동함이 매우 필요함을 깨달으면 안식일에 모여서 하는 간증은 힘이 있겠고, 그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함으로 얻은 귀한 경험을 기쁨으로 증거하게 될 것이다.
교회와 거룩한 위탁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실 때에 교회와 교회의 모든 치리권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거룩한 위탁물로 맡기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은 목사나 교회를 지도하는 몇 사람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다. 교인 각자가 어떤 때,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주의 사업을 위하여 최선껏 일하기로 주와 엄숙한 언약을 하였음을 생각하고 각각 일을 부담하며 책임을 져야 한다. 만일, 모든 교인이 개인적인 책임을 느낀다면, 반드시 영적으로 보다 큰 진보함이 있을 것이다. 저희의 어깨 위에 있는 엄숙하고도 중대한 책임은 저희로 하여금 자주, 능력과 은혜를 하나님께 구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교회를 올바로 평가하려면, 그 교리나 녹명책에 적혀 있는 신자의 수효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지로 주를 위하여 일하는 활동과 그 교회의 신실하고 견인 불발한 일꾼들의 수효에 의해서 평가하여야 한다. 이기심 없는 개인적인 노력은 설교나 신조보다 그리스도의 사업을 보다 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사는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반드시 주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무거운 짐 곧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무거운 짐을 져야 할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는 때에는 그를 찾아가서 같이 기도하며 그를 도와 주어야 한다. 교인들이 목사에게만 의존하려는 잘못된 습관에 빠지게 하지말고, 그들로 하여금 각자의 재능을 활용하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도록 가르쳐 주라. 이와 같이 그들이 활용함으로 하늘 천사들의 협력을 받게 될 것이며, 경험을 얻게 되고 믿음을 더하게 되며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게 될 것이다.
제 42 장
목사의 아내

지난날, 목사의 아내들은 가난과 핍박을 견디었다. 남편이 투옥 당하고 때로는 죽음을 당하는 일이 있을 때에라도 희생 정신이 많은 이 훌륭한 아내들은 남편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장차 그들은 남편이 받을 상급과 꼭 같은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보드맨 씨 부인과 져드슨 씨 부인은 남편과 함께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였다. 그들은 저희 남편이 캄캄한 가운데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숨겨진 오묘한 진리를 그들에게 보이는 일을 돕기 위하여 가정과 친구에 대한 전부를 희생하였다. 그들은 항상 목숨이 위태한 가운데 있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목적이었으며, 이를 위해 그들은 고난을 달게 받을 수가 있었다.
목사의 아내가 혹 남편이 여행할 때에 함께 가게 되거든, 자기의 특별한 즐거움을 찾아 이리저리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방문하거나 초대를 받거나 하지 말고 남편과 함께 일하여야 한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선한 일을 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별히 장애가 되는 일이 없는 한 기꺼이 남편과 동행하며, 남편을 도와 영혼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아내들은 온유하고 겸손하며 또한 자립 정신을 가지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대한 감화를 끼치며 자기의 임무를 다하는 동시에 공중 집회와 가정 예배 또는 난롯가에서 담화하는 때에라도 그가 져야 할 십자가와 무거운 짐을 즐겨 져야 한다. 교인들은 목사의 아내가 이렇게 하기를 기대하며, 또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이 기대가 현실화되지 못한다면, 그 남편의 감화는 절반 이상이나 소멸될 것이다.목사의 아내는 자기가 할 마음만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또, 희생 정신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선한 일을 행하는 데 남편 못지 않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진리를 전하는 데 있어서 목사가 하지 못하는 것을 부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으며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 그러하다.
목사의 아내에게 지워진 책임은 쉽게 내버려서는 안 되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목사의 아내에게 빌려 준 달라트를 그 이자까지 요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남편과 연합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 있고 신실하게 일하여야 한다. 결코 자신의 요구와 소원대로 하려고 애쓰거나,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하여 재미가 없다고 말하거나, 또는 고향 생각을 너무하여 불만을 나타내서는 안된다. 목사의 아내 된 자는 어디까지나 이러한 모든 인간적인 성정은 모두 억제하고 평생의 한 목적을 정하고 흔들림 없이 그대로 그것을 성취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자기의 감정과 쾌락 및 기호에 저촉될 때에는, 영혼을 구원하며 선을 행하기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희생하여야 한다.목사의 아내는 기도를 많이 하며 헌신적인 생애를 하여야 한다.그러나, 어떤 아내는 극기와 스스로의 노력이 없고 자기의 희생이 조금도 없는 편안한 신앙 생애를 하고자 한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떳떳이 서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자기의 책임을 이행하는 대신에, 거의 다른 사람에게만 의존하며 그들의 영적 생애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의뢰한다. 만일, 그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며 모든 애정을 예수님께 바치고 그 생애를 산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의탁하면, 그들은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이룰 것이며, 얼마나 많은 도움을 남에게 끼칠 것이며, 그들의 남편들에게 얼마나 큰 조력을 할 것이며, 또한 종말에 그들이 받을 상급은 얼마나 크랴! 그들의 귀에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이 아름다운 음악과 같이 들릴 것이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말씀은 귀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견디고 참은 모든 고통과 시련에 대하여 천 배의 상이 될 것이다. ― 1T, 451-453.
* *
만일, 이미 결혼한 교역자가 그 아내에게 가정에서 자녀를 돌보게하고 자기는 일하러 나가게 되면, 아내요 어머니 된 그는 남편이요 아버지 된 이의 하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는 크고 중대한 일에 종사하게 된다. 즉, 한 사람은 선교 지방에서 또 다른 사람은 가정 선교지에서 일하게 되는데, 가정에서 선교하는 사람이 가지는 책임과 근심 걱정이 남편이요 아버지 된 자의 책임과 근심 걱정보다 훨씬 클 때가 많다. 어머니의 일, 곧 자녀들의 마음과 품성을 꼴지우고 이 세상에서 유능한 인물이 되도록 교육하며 장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 힘쓰는 일은 매우 엄숙하고도 중대하다.
밖의 선교지에서 일하는 남편은 때때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때도 있으나, 가정에서 수고하는 아내는 아무에게도 그 한 일에 대하여 칭찬 듣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만일 가정의 유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일하며 자녀들의 성품이 거룩한 모본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힘쓰면, 기록하는 천사는 그의 이름을 세상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의 하나로 기록할 것이다.
* *
목사의 아내가 항상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자신의 영혼을 잘 지키면, 그 남편의 짐을 덜어 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절약하고 사물을 잘 판단함으로써 가정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남편과 협력하여 자녀들에게 경제적인 습관을 길러 주며 극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제 43 장
가정에서의 목사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가르치는 자의 가정 생애에서 그가 평소에 가르치는 그 진리가 실제로 나타나기를 바라신다. 그 사람됨이 끼치는 감화는 그가 하는 말보다 훨씬 크다. 일상 생활에 나타내는 믿음은 뭇 사람들에게 유력한 증언이 될 것이다. 인내와 진실함과 사랑은 설교로써 감화시킬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 힘있는 감화를 줄 것이다.
목사의 의무는 광범위하여 가까이도 있고 멀리도 있다. 그러나 그의 첫째 의무는 자기 자녀에게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밖의 일에 너무 골몰함으로 자기의 자녀를 교훈하는 일에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혹 가정에 대한 의무를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에 있어서는 개인이나 사회의 안녕의 기초가 되는 것은 가정이다. 대개, 모든 인간의 행복과 및 교회의 성공은 가정의 감화에 달려 있다. 영원한 행복은 일상 생활의 의무를 정당히 이행함에 있다. 세상은 위대한 사상가보다는 오히려 가정에 축복이 되는 선한 사람을 더 요구하고 있다.
목사가 가정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가정 안에 있는 적은 사람들을 소홀히 한다는 핑계는 도저히 할 수 없다. 자기 가정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최후의 심판날에 하나님께서는 목사들에게 그들이 양육하여야 할 가족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고 심문하실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자녀들에게 대하여 하나님께 진 빚을 없이 하지 못한다.목사의 가정에는 화목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목사의 가정의 화목은 실제적으로 믿음을 증거하는 힘있는 설교가 될 것이다.
목사는 그의 아내와 더불어 가정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자녀들의 잘못을 제지하며 교정도 하고, 또한 충고하고 상의하며 지도하는 모든 일을 행함으로써 교회 사업에서 더욱 성공하게 되며, 가정 이외의 하나님의 사업을 성취하는 데 더 많은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가족이 하늘 가족의 일원이 되어 선을 행할 능력을 갖게 되고 그 감화가 널리 미치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녀들을 마음대로 하게 버려 두어 잘 교육하지 못하는 목사는 강단에서 행하는 그의 노력의 감화가 자녀들의 불미한 행위로 인하여 손상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가족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잘 다스려 어지러움과 다툼이 없도록 기도할 수 없다.
가정에서의 예의일상 생활의 사소한 문제에는 별반 주의를 하지 않는 폐단이 있다. 특히, 목사는 가정에서 말할 때에 친절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을 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의 종 된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가정에서 조잡함과 불친절함과 무례함을 나타내는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대의 신앙이 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그대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그대가 아무러 열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지라도 그대의 가정 생활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면 그대는 그대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강단에서 조잡하고 비꼬는 말이나 익살과 농담을 하는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의 대표자인 줄로 생각하지 말라. 그의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고, 대신 이기심과 자존심이 가득하여 거룩한 사물을 중히 여기지 아니함을 스스로 드러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과 함께 계시지 아니하시며 그런 목사는 현대 진리의 엄숙한 기별을 중대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어떤 때에는 목사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가장 등한시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와 같이 있는 때가 많지 못하여 자연히 자기 멋대로 놀고 즐기기 때문이다. 여러 아들들이 있는 목사는 결코 그들을 전적으로 어머니의 손에만 맡기지 말 것이다. 이것은 어머니에게 너무 과중한 짐이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그들과 함께 있어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로 악한 동무들과 사귀지 못하게 하고 유용한 일을 하도록 돌보아야 한다. 혹은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제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남편이 이런 것을 보거든,친히 더욱 짐을 많이 지고 자기의 아들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하여 전력할 것이다.
자녀를 둔 목사의 아내는 자기의 가정을 자기의 선교지로 알고 끈기 있는 정력과 다함이 없는 열심으로 자녀들을 위해 일하며 그 결과는 영원토록 있을 것을 알고 분투하여야 한다. 자기 자녀의 영혼이 불신자의 영혼만큼 귀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깊은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어머니 된 자는 가정 신앙의 힘과 그 탁월함을 세상에 나타내 보여야 할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는 결코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원칙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께서 그의 조력자이심을 자각하고 일할 것이다. 어떠한 것도 자기의 맡은 사명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밀접히 연합한 어머니의 감화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그러한 부인의 사랑의 봉사는 가정을 벧엘과 같이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함께 일하시며, 그의 생애에서 평범한 물을 변하여 하늘의 포도즙이 되게 하신다. 그리하여, 그의 자녀들은 점점 자라서, 현세와 내세에 있어서 그 어머니에게 복과 영광이 될 것이다.
제 44 장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고 하신 이 명령은 모든 목회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며, 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고 하신 것은 각 시대의 모든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청소년들의 영적 필요에 관심을 갖지 않음으로 주의 사업은 지금까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그러므로, 복음 교역자는 회중 가운데 있는 젊은 사람들과 친밀히 교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꺼려 하는 교역자가 적지 않다. 이렇듯 젊은이들을 등한히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 우리의 청년 남녀들 가운데는 우리의 신앙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자들이 많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를 보고 어찌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천연히 세월을 보낼 수 있겠는가? 만일, 그들이 경고를 듣지 못하고 죄에 빠져 죽으면, 그들을 경고하지 않은 파수군의 손에서 그들의 죄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어찌 우리의 젊은 사람들에 대한 일이 가장 고상한 선교 사업이 되지 않겠는가? 이 사업에는 가장 지혜스러운 재능과 가장 세심한 주의와, 또 하늘의 지혜를 얻기 위한 가장 열심 있는 기도가 필요하다. 청년은 사단이 특별히 공격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 속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친절과 동정은 청년들의 신뢰를 얻어, 그들을 원수의 허다한 올무에서 건져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청년들을 위하여는 일시적인 관심과 간혹 격려의 말을 해주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을 위하여 많이 참고 기도하며 신중하게 일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동정이 충만한 자만이 신앙에 대하여 부주의하고 무관심한 것같이 보이는 청년들의 마음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물론 모든 청년에게 다 같은 방법으로는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성미와 성격을 따라서 일하신다. 우리도 그와 연합하여 일하여야 한다. 우리가 때때로 겉으로 보고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청년들 가운데 장래에 일꾼이 될 만한 가장 훌륭한 인물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수고한 모든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하여간, 청년들을 취급하는 방법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데 필요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여야 한다.
아이들을 위한 설교
합당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자주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설교할 때마다 조금씩은 아이들을 위하여 하라.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종들은 아이들과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더욱 깊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와같이 하면, 우리가 상상한 이상으로 사단의 간교한 계교를 저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일,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잘 알면, 경건치 못한 것들을 막을 수 있는 장벽이 생겨,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 원수를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아이들과 청년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긴 연설을 피하여야 한다. 요령 있고 간단한 이야기가 기쁨을 주며 좋은 감화를 줄 것이다. 만일, 할 이야기가 많을 경우에는 짧게 여러번 하도록 말을 만들라. 짧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이 모든 교훈을 다 한꺼번에 주려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
긴 이야기는 젊은이의 정신을 피로하게 하며, 또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저들로 하여금 영적 교훈을 싫어하게 만들 우려도 있다. 마치 과식함으로 위가 약해지고 식욕이 감퇴되어 음식을 싫어하게 됨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교인들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 대한 교훈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여야 한다. 어린아이들을 딱딱하게 대하지 말고 부드럽게 지도하여 하늘로 인도하여야 한다.
청년들의 기분을 이해함
우리는 친히 청년들이 갖는 기분을 이해하여, 그들의 희로 애락과 패배와 승리감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슬퍼하는 죄인들에게서 멀러 떠나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타락한 인류의 연약함과 고난과 시험을 경험하기 위해 친히 이 땅에 강림하셨고 우리의 지위를 높이시기 위해 우리 인간의 낮은 지위에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청년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우리들도 그들과 같은 처지에 서서 그들을 돕지 않으면 안된다. 또, 젊은 제자들이 시험에 빠진 때에 선배들이 결코 엄하게 책망하거나 그들의 분투함에 대하여 냉담하게 대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자기도 유혹하는 자의 공격을 막기에 힘이 부족한 때가 많이 있음을 기억하며, 또 자기도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대하여 인내성 있게 대해 주기를 바람과 같이 어린 양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동정을 원하게끔 인간들을 만드셨다. 그런즉, 연약한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동정이 필요하랴! 비록 말 없이 동정의 눈으로 한 번 보기만 하여도 시험에 피곤한 아이들의 고통을 덜어 주며 힘을 줄 때가 많다.예수님께서는 방황하는 모든 자들을 향하여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잠 23:26),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렘 3:22)고 호소하신다.
청년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주님께서는 길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사 그들의 자백을 듣고 그들의 회개를 받으시고자 동정과 사랑으로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주께서는 마치 어머니가 자기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알아보고 웃음 짓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신다. 크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치시며, 우리가 고난과 시험을 당할 때에 어떠한 열심과 애정으로써 동정하여 주시는지를 깨닫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 103:13)신다. 혹, 그 어머니는 자기의 아들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는 한 영혼이라도 결코 잊지 아니하신다.
청년들로 교회 활동에 참여케 함
청년들이 하나님께 저희의 마음을 바친다고 해서 저희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저희에게 주의 사업에 관심을 두게 하고 주의 사업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그 일에 참여하기를 주님께서 바라고 계심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 일의 중대성을 말하고 청년들에게 그 사업에 참가하도록 권고하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아니하다. 그들에게 주를 위하여 어떻게 일할 것을 가르치며,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청년들을 훈련하고 양성해야 한다. 정숙하고 겸손하게 젊은 동료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도록 교육하라. 선교 사업의 각 방면을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청년들로 이에 참여하게 하며, 또 그들에게 이에 대한 교훈과 도움을 주라. 그리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그대는 선교회로 모였을 때에 긴 설교를 해야만 청년들이 흥미를 일으킬 수 있는 줄로 생각하지 말고 흥미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라. 청년들로 매주 그들이 구주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였으며
또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보게 하라. 이렇게 하면, 선교회는 결코 지루하고 무미 긴조한 집회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흥미 진진하여 출석하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조직이 잘되고 잘 훈련받은 청년들이 우리 교회에 필요하다. 청년들은 넘치는 정력으로써 큰 일을 성취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력을 그릇 사용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에게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자기 동료들에게까지 나쁜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지도자는 그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과 연합하도록 하고, 또 그들이 많은 유혹을 만나게 됨을 기억하도록 하라. 우리는 천성적으로 나쁜 특성을 타고나기 때문에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 유혹을 당하는지를 거의 알지 못한다.
내가 본 “선한 목자”라는 그림에는 우리 목자들이 어린 양무리를 얼마나 잘 보호하고 돌보아야 할 것인지가 잘 묘사되어 있었다. 그 그림을 보면, 목자는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하고 그 뒤에는 양떼들이 줄을 지어 따라간다. 목자는 연약한 어린 양을 팔에 안았으며 그 어미는 안심하고 목자의 곁에 따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사 40:11)신다고 하였다. 어린 양은 매일 양식을 주어 먹이게 하는 것 이외에도 잘 보호해 주어야 하며 항상 정성으로 돌보아 주어야 한다. 만일, 한 마리의 양이라도 길을 잃고 방황할 때에는 곧 찾아야 한다. 비록 단 한마리이지만 매우 귀중한 한 마리이며 , 그것은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기르는 목자가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자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사랑의 봉사를 잘 나타내고 있다.
목회 사업에 종사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문을 활짝 열고 시험 가운데 빠져 애쓰는 청년들을 받아들이라. 개인적으로 그들과 가까이 접촉하라. 죄악은 사면에서 그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들로 고상한 생애를 보냄에 도움이 될 만한 일에 취미를 갖게 하도록 힘쓰라. 스스로 그들을 멀리하지 말라. 그들을 가정에 초대하기도 하고 함께 가족 예배에 참여하도록 청하라.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 가는 길을 빛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만한 매력적인 길로 만들도록 요구하시고 계심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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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청년들을 교육하여, 청년들은 청년들이 인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들이 경험을 얻어, 더욱 넓은 범위에서 일할 수 있는 헌신적 일꾼이 될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아주 단순하고도 평이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가 있다. 세상에서 천재로 추앙받는 가장 뛰어난 지식인들도 하나님을 경애하는 자의 충심에서 나오는 단순한 말로 인하여 용기를 얻는 일이 많다. 꾸밈없이 단순하게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실한 말은 오랫동안 굳게 잠겨 있던 마음 문을 연다. ― 6T,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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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잘 알았으며, 이 지식은 그를 둘러있는 악한 영향과, 의무 앞에서 쾌락과 이기적 만족을 택하려는 유혹에서 그를 지켜 주는 방패가 되었다. 우리의 모든 자녀들에게 이러한 방패가 필요하다. 부모된 자나 그리스도의 대사가 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옳게 가르치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생각하여야 한다. ― 4T, 398.
제 45 장
병자를 위한 기도

복음의 본질은 회복 사업이며, 구주께서는 주의 종들이 병자와 소망이 없는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을 청하여 주의 능력을 의지케 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종은 주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통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통하여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믿음의 팔로 병든 자와 고난당하는 자들을 잡고 구주께로 인도하여야 한다. 주의 종들은 항상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자신의 생애로 하나님의 진리를 분명히 나타내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영혼과 육신의 고침을 바라는 자들을 복되게 하실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병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을 도와 믿음의 줄을 붙잡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이와 같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 곁에 항상 가까이 있어 돕는다. 병든 자를 보고 저희로 거룩한 사물을 바라보도록 노력하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의 대사들은 영원한 사업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병든 자에게 나아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주의 약속을 받아들임으로 얻은 소망으로 저들을 위로하면, 자기의 영적 경험은 더욱 풍성해지고 그 능력이 더하여질 것이다.계속적인 범죄의 결과로 질병 중에 고통하며 번민하는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자각을 받아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사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소서”하고 부르짖는다. 이 때야말로 목사가 강한 믿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고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용납하심을 바라는 자들은 반드시 구원함을 받고 평안함을 누리게 될 것을 그들에게 말할 좋은 기회이다.
이와 같이 온유와 사랑으로 희망의 기별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자는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주의 대언자인 것이다. 그가 적절한 위로의 말을 하고 침상에서 고통받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며,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그 사람이 마음에 감동을 받게 되며, 이와 같이 하여 인성이 신성과 접촉되는 것이다.
목사는 경험을 통하여,그리스도의 은혜와 위로의 힘이 건강과 평안함과 충만한 기쁨을 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피곤한 자와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사 평안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신령한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 임명을 받은 일꾼들의 주위에 구주께서 항상 사랑으로 보호하고 계심을 결코 잊지 말 것이다. 이를 기억하면, 믿음은 더욱 원기를 얻어, 더욱 열심으로 기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목사는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에게 건강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을 나누어 주며, 그리스도께서 병 고치신 이야기를 말하여 병자의 마음을 빛과 생명이 되시며 위로와 화평이 되시는 크신 의원이신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구주께서 항상 그들을 사랑하시므로, 결코 실망하지 말고 온전히 주님께 순복하기만 하면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가호를 누릴 수 있음을 그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귀한 약속을 주신 분은 우리의 가장 선하고 가장 진실한 친구이심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의지하도록 권고하라. 이와 같이 그들의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하려고 힘쓰는 때에, 병자가, 치료하는 방법을 잘 아시는 사랑과 동정이 많으신 주님을 생각함으로 평안함과 안정함을 갖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거룩한 의원이신 예수님께서 항상 병실에 함께 계시며 참으로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모든 기도 소리를 들으신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제자들도 옛날의 주의 제자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병든자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그 병이 나음을 입을 것이며,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약 5:15)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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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에 병든 자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라는 교훈이 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매우 엄숙한 것이므로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믿음으로 하여야 할 이런 기도가 다만 추측에만 지나지 않는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은 방탕한 생애의 결과로 병이 든다. 그런 자들은 자연의 법칙과 순결한 원칙을 따라 생활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과 의복과 노동에 있어서 건강 법칙을 무시하고 좋지 못한 어떤 습관으로 인하여 심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이 혹 다행히 건강을 누리게 되면 그들 중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의 법칙과 영적 법칙을 무시하는 행동을 조금도 고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병을 고쳐 주실 것이므로 건강상 좋지 못한 나쁜 습관을 계속하며 마음대로 식욕을 따라 방종하여도 무방한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이적으로써 이런 사람들의 건강을 회복케 하신다면 곧 죄를 권장하심이 될 것이다.사람들에게 건강을 해치는 악한 습관을 버리라고 가르치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치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가르치는 것은 헛수고이다.
자기의 기도가 들으시는 바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악한 행실을 끊어 버리고 선을 행하도록 힘써야 한다. 또, 그의 주위 환경을 청결하게 하고 생활 습관도 고쳐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연의 법칙과 영적 법칙에 어그러짐이 없는 생애를 하여야 한다.
죄의 고백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기도하여 주기를 바라는 자에게는 자연의 법칙이든지 또는 영적인 법칙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은 죄악인 것과, 또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죄를 고백하고 이를 버려야 할 것을 밝히 말해 주어야 한다.
성경에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약 5:16)라 하였다. 그러므로, 병 낫기 위하여 기도를 요청하는 자를 향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므로 당신의 생애의 비밀을 알 수 없고 그것을 당신 자신과 하나님께서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슨 후회하는 죄가 있으면 마땅히 고백하여야 합니다”라고 권고하여 주는 것이 좋을 듯하다.사사로운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고백하여야 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모든 죄는 다 하나님께 범한 것이므로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고백하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죄는 무리 앞에서 고백하고, 개인에게 대하여 잘못한 것은 그 당사자에게 사과하여 고쳐야 한다. 만일, 자기의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자로서 과거에 독설을 발하였거나, 가정과 교회와 또는 이웃에게 잘못하여 화목하지 못한 일이 있거나,
혹은 이간시키고 분쟁을 일으켰거나, 또는 무슨 좋지 못한 일을 행하여 다른 사람까지 그 죄에 빠지게 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 앞과 해를 당한 자들 앞에서 반드시 그 죄를 고백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였다.
과거의 모든 잘못을 다 시정한 후에 비로소, 우리는 성령의 지도 하심을 따라 고요한 믿음으로써 병자의 필요를 주님께 아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아시되 이름까지 아시며, 또 지구 상에 있는 한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 주신 것처럼 그와 같은 깊은 사랑으로써 각 사람들을 돌보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고 위대하시므로 병자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쁨을 누리도록 권장할 것이다. 근심과 걱정은 더욱 몸을 쇠약하게 하고 병을 얻게 한다.그러나, 누구든지 침울함과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가지면, 회복될 전망은 더욱 밝을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시 33:18)시는 연고이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환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롬 8:26)함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축복이 가장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므로, 우리의 기도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포함되어야 한다. “주여, 주께서는 마음의 모든 은밀한 것을 아시며 또 각 사람을 잘 아시나이다. 저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으니, 우리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 한들 주의 사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나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당신께 영광이 되며 또 병자에게 유익한 일일진대 예수의 이름으로 저희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그러나, 만일 저희가 고침을 받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라면,
당신의 은혜가 저희를 위로하고 또 저희와 함께 계셔 그 괴로움 중에서 도와 주시기를 비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시종(始終)을 아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 또, 사람의 모든 비밀을 다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환자에 대하여, 그가 살아나면 자기에게 당할 시험을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를 다 아시며, 그의 생애가 자기 자신과 세상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지 혹은 해가 될지도 아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으로 정성을 다해 기도할 때에라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하고 애원하시면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을 하셨은즉, 허물이 많고 불완전한 인간은 얼마나 더 그러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시종 여일하게 우리의 모든 소원을 전지 전능하신 하늘아버지께 맡기고 온전히 그를 믿고 신뢰하여야 한다. 우리의 원하는 바가 하나님의 뜻에 적합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을 우리가 명확히 아는 바이다. 그러나, 순종의 정신이 없이 우리의 요구만 내세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의 기도는 결코 명령적으로 하지 말고 애원하는 자세로 하여야 한다.사람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 거룩한 능력을 나타내시는 때가 있다. 그러나, 병자가 다 고침을 받는 것이 아니고 결국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요한은 밧모 섬에서 명령을 받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이 말씀을 보더라도, 병 나음을 받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믿음이 부족하여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기도가 속히 응답되기를 바라고, 응답이 더디거나 혹은 기대한 바대로 응답되지 않을 때에는 쉽게 낙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선하시므로 우리가 바라는 그 시간과 방법대로 응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것을 더욱 풍성히 이루어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의지함으로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도록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가 무엇임을 알고 그대로 이루어 주시도록 구하여야 한다. 우리의 희망과 주장을 다 버리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이런 경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주시는 바니,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믿음이, 성실하여 하나님의 말씀만 의거하는 믿음인지 또는 사정과 경우를 의지하는 확실치 못하고 변하기 쉬운 믿음인지를 나타낸다. 대개, 믿음은 활용함으로 그 힘이 더 하여진다.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바라고 사모하는 자에게 주신 귀한 언약이 성경에 있음을 기억하고, 어디까지든지 참고 견디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원칙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간간 있다. 사람들은 병 낫기를 기도하면 반드시 그 기도가 곧 응답되어야하는 줄로 생각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에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줄로 생각한다. 이 때문에, 질병으로 허약해진 자들에게 바르게 가르쳐, 신중히 행동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병자들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연 요법을 등한히 하지 말고, 혹 자기가 죽게 되는 경우에는 살아 있는 친구들에게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이다.임종시에 행할 이 일에 대하여 오해하는 자가 간혹 있다. 기도의 응답으로 병이 나을 줄로 생각하고,
어떤 이는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는 듯한 어떤 일을 행하기를 꺼려 한다. 그러나, 자기가 곧 죽게될 것을 깨달으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모든 일들을 정리하는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임종시에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려고 생각하는 격려와 훈계의 유언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 해서도 안 된다.
치료 기관
기도로써 병 낫기를 구하는 자는 또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치료기관을 이용하는 것을 등한히 하지 말 것이다. 고통을 없이 하며 건강을 회복케 하는 자연의 힘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러한 치료 기관을 이용하는 것이 결코 신앙을 부인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 협력하며 자신의 병을 고치기에 가장 적당한 상태에 있도록 하는 것을 어찌 신앙을 부인하는 행동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법칙을 알게 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 하셨다. 이 지식은 우리가 이용하며 활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을 고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편의와 시설을 활용하며 자연의 법칙을 따라 행하여야 한다. 우리가 환자의 병 낫기를 기도한 후는 이를 위하여 더욱 힘썼고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특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기관에 주의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할 것이다.치료 기관을 이용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말씀이 성경에 많이 있다. 이스라엘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는 왕이 반드시 죽으리라는 기별을 전하였다. 그러나, 왕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애원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15년을 더 살리라는 기별을 보내셨다. 이 때에,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히스기야는 곧 나을 것이었지만,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사 38:21)는 특별한 치료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은 소경의 눈을 고치실 때에 그 눈에 진흙을 바르셨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요 9:7)더라 하였다. 병이 낫는 것은 물론 크신 의원의 능력만으로도 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간단한 자연 요법을 이용하셨다. 주께서는 이로써 의약을 장려하시 것은 아니나 단순한 자연 요법을 이용하는 것을 승인하셨다.
환자를 위하여 기도한 후에, 어떤 결과가 생기든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말자. 혹 환자가 죽어 사별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하늘 아버지께서 쓴 잔을 우리 입술에 대어 주심을 기억하고 그 잔을 달게 받아야 한다. 또는, 건강이 회복될 경우에는 병 고침을 받은 자가 창조주께 새로운 의무를 부여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문둥병자 열 명이 고침을 받았으나, 예수님께 사례하러 온 자는 하나 뿐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누구든지 이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가 되지 말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제 46 장
교인들에게 인색하지 않도록 가르침

여기 저기에서 작은 집회소를 일으키는 교역자들은 새로 믿음 안에 들어온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개인적인 노력과 재정으로 주의 사업을 돕는 일에 조직적으로 일하는 것을 요구하지 아니하신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개,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 중에는 이 세상에서 매우 가난한 자들이 많다. 그러나, 가난을 핑계로 하여 저희가 받은 귀한 빛을 남에게 전하여야 할 의무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다고 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부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축복은 가난한 자들도 능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소유한 적은 재물이라도 신실히 사용하면, 하늘 창고에 쌓은 그들의 보물은 그 신실함을 따라 더욱 증가할 것이다. 예물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게 되는 것은 그 양에 있지 않고 그 바치는 동기에 있는 것이다.누구나 주님을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며 주님께서 자기를 번영하게 하신 축복을 따라 주님께 예물을 바쳐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수입이 많거나 적거나 간에 그 십분의 일을 당신의 것으로 요구하신다. 이를 거절하고 바치지 않는자는 하나님 앞에 도적질하는 자가 되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하고 번영하게 해주시기를 기대할 수 없다. 교회가 대부분 가난한 형제만으로 조직된 경우에라도 십일조 제도를 분명히 설명하고 기꺼이 그것을 택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재물이 무궁 무진하시며 그 모든 재물을 그의 뜻을 성취하는 데 사용하신다. 그리고, 십일조를 신실히 드리는 자를 보실 때에는 당신의 지혜로운 섭리로써
때때로 그 수입이 점점 증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다. 그러므로, 그에게 주신 대로, 적은 양이나마 하나님의 제정하신 바대로 다 실행하는 자는 많이 바치는 자와 같은 많은 보상을 받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자기의 재능을 기꺼이 사용하는 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받은 재능이 적다 하여 이를 사용하지 않는 자는 자기가 받은 재능 이상의 큰 손실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의 비유 중에 주님께 책망을 들은 자는 달란트 하나를 받고도 이를 사용하지 않고 땅속에 파묻어 놓았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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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십일조 제도는 그것이 아주 단순하고 공평하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누구든지 다 믿음과 용기로써 이를 실행해야 할 것이다. 이에는 단순함과 신뢰가 겸해 있으므로 그것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데 깊은 학문이 요구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이로 인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중대한 사업에 참여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으며 남녀 노소를 물론하고 다 주의 회계가 되어 주의 재물을 관리하는 일꾼이 될 수 있다. …
이 제도를 통하여 큰 사업을 완수하게 된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빠짐없이 다 이를 실행하면, 각 사람이 다 하나님의 신실하고 충성된 회계가 될 것이며, 마지막 경고의 기별을 세상에 전하는 큰 사업에 쓸 자금이 부족하지 않게 될 것이다. ― 3T, 388, 389.
제 47 장
복음의 유지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하는 일을 당신의 백성들의 노력과 그들의 자원하여 드리는 헌금으로써 하게 하셨다. 타락한 인류에게 은혜의 기별을 전하는 자들은 또 다른 임무를 가졌는데, 그것은 사람마다 저희 재산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유지하여야 할 의무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는 또 신자들에게, 그들의 수입의 일부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업에 거룩히 바쳐야 할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는 말과 실지 모본으로써 이것을 교훈하되 자기의 행동으로 인하여 그 교훈의 능력이 감하여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성경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놓은 것은 복음 사업을 위한 수입금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다. 자기를 위하여든지 남을 위하여든지 간에, 사적인 일에 하나님의 금고의 돈을 쓰는 것은 거룩한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특별히 하나님께 바친 금전을 하나님의 제단에서 취하여 다른 곳에 사용함으로 과오를 범하는 자들이 있다. 누구나 이 문제는 올바로 취급하여야 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가 궁경(窮境)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종교적인 일에 쓰기로 바쳐진 돈을 가져다가 자기 일에 쓰고 후일에 그것을 갚으리라는 생각으로 양심을 달래는 일이 없게 하라. 사적인 일에 주의 돈을 쓰는 것보다 수입에 따라 지출을 줄이고, 여러 가지 필요를 억제하고 분수에 알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십일조의 사용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어디에 쓸 것에 대하여 특별히 지시하셨다 그분은 자금 부족으로 인하여 당신의 사업이 지연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실수와 과오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명백히 지시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거룩히 구별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일 외에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일조를 자기가 가지고 마음대로 써도 상관없다고 생각지 말 것이다. 물론, 위급한 경우에라도 이를 사사로이 쓰는 것은 옳지 않으며, 비록 하나님의 일로 생각되는 일에라도 자기 생각대로 써서는 안 된다.
목사는 교훈과 모본들로써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거룩하게 생각하도록 가르칠 것이다. 또, 자기는 목사이니까 십일조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비록 자기가 받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일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목사는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나 그 외의 다른 헌금을, 정당히 쓰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쓰려는 어떤 경영에도 결코 찬성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재물은 다 하나님의 금고에 들여 그 지정하신 일에 쓰기 위하여 거룩하게 보관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청지기가 다 당신께서 제정하신 바를 엄중히 지키기를 바라신다. 저희는 인간적인 견지에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와 방법을 따라서 어떤 자선 행위를 하거나, 예물이나 기부를 하는 일로 주님의 계획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고치려고 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바에서 이탈하여 때때로 일어나는 일시적인 선한 충동을 따라 어떤 미봉책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정책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를 지지하기를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명백히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협력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고치려고 하지 말고 대신 이것을 실행하여야만 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출 27:20)게 하라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 그를 봉사함에 필요한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 항상 드려야 할 예물이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도 예배당은 하나님의 소유인 것과, 또 그것을 잘 관리하여야 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경비를 십일조로 써서는 안 된다.
나는 우리 신자들에 대하여 극히 명백한 기별을 받았다. 곧 저들이, 비록 목적은 좋다 할지라도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사업에 쓰지 않고 다른 여러 가지 목적에 사용함으로 과오를 범하고 있음을 저들에게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이와 같이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제도를 위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일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교육 사업을 위해 써도 관계없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문서 전도인들에게도 십일조로 봉급을 줘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합당히 써야 할 하나의 목적 곧 목회자들의 봉급을 지불하는 이외의 다른 일에 사용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현재, 밭에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 일꾼 백 명이 있어야 할 곳에 지금 다만 한 사람만이 있다.
엄숙한 의무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구별하신 거룩한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금고에 드려져 복음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써야 한다. 십일조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많은 도둑을 당하여 오셨다.
어떤 사람은 불만을 가지고 “본부에서 처리를 잘못하니 나는 이제부터 십일조를 바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혹 사무를 잘못 처리한다고 해서 그대가 하나님의 물건을 도둑질할 수 있겠는가? 만일, 마땅치 못한 일이 있으면, 정당하게 그 당사자를 찾아가서 명백하고 숨김 없이 그 일을 말하여 잘못을 시정하도록 요청할 것이며, 결코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신실치 못한 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
말라기 3장을 잘 읽고 하나님께서 십일조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알아보라. 만일, 우리 교회가 주의 말씀을 믿고 주의 창고에 십일조를 신실히 바친다면, 더욱 많은 일꾼이 목회 사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재정이 부족하다는 말이 없으면, 목회에 투신할 사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하나님의 금고는 반드시 풍성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이기적인 마음과 손으로 인하여 십일조를 바치지 않거나 다른 일에 사용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의 금고는 넉넉하여 질 것이다.십일조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는 주의 것이므로,이것에 손을 대고 이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하늘 금고를 잃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이외의 여러 다른 방면에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사업에 이 이상 더 방해되지 않도록 하라. 목회 이외의 여러 사업에 대하여도 방침을 마련하여 유지하게 하고, 결코 십일조로써 사용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으셨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여전히 전도 사업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새 선교지를 개척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목회자가 필요하며, 따라서 이에 대한 자금이 금고에 많이 있어야 한다.
목사는 엄숙한 책임을 지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이를 등한히 한다. 어떤 사람은 설교하기는 좋아하면서도 교회를 위하여 개인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책임, 특히 십일조를 정직히 드림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야 한다. 만일, 우리 목사들이 자기의 봉급을 정한 때에 받지 못한다면, 매우 섭섭히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꾼들에게 줄 양식이 하나님의 창고에 있어야 할것을 생각지 못하는가? 만일, 그들이 십일조를 신실히 드리도록 교인들에게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금고에는 주의 사업을 전진케 할 자금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양무리를 감독하는 자들은 신실히 그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 이 직분을 맡고도 그 일을 싫어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루면 신실한 일꾼이 못 된다. 그런 사람은 말라기서를 펴놓고,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신 주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9)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전하고 도를 가르치는 거룩한 직분에 참여한 자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저주를 받을 만한 행위를 계속하는 것을 보고도 신자들을 가르치고 경고하여야 할 의무를 등한히 할 수 있겠는가? 각 교인들마다 십일조를 신실히 바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 9T, 246-251.
제 48 장
음식물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중대한 책임을 지고, 특히 영적인 모든 문제들을 담당한 자들은 감각이 예민하고 지각이 빨라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음식에 절제해야 하며, 결코 식탁에 값진 음식이나 호화로운 음식물을 올려 놓지 않도록 할 것이다.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자들은 매일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때로는 그들이 생각을 빨리 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엄격히 절제하는 자가 아니면 하기 어렵다. 체력과 정신력을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마음이 강해진다. 심신이 너무 과로하지 않으면 새 기운이 계속 솟아난다. 그러나, 때때로 중대한 계획을 생각하여야 하고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사람들이 불합당한 식사로 인하여 그 사업에 나쁜 영향이 미치게 된다. 온전치 못한 위는 온전치 못한 정신을 낳는다. 또, 그것은 성급하고 가혹하고 부정한 행동을 하게 한다. 나쁜 식사 습관으로 생긴 병적 상태로 인하여, 세상에 축복이 되었을 많은 계획을 버리고 불의하고 압제적이며 심지어 잔인 무도한 일들이 감행되었다.
여기에, 주로 앉아서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자들을 위해 한 가지 제안이 있다. 정신적 용기가 있고 자제력이 강한 사람은 실행해 보라. 즉, 매 식사 때마다 단순한 음식 두세 종류만을 취하고 시장기를 면할 정도의 소량의 음식을 먹으라. 그리고, 매일 얼마씩 활동적인 운동을 하고 그 결과가 어떤가를 살펴보라. ― MH, 309, 310.
어떤 목사들은 그들의 식사 습관에 대해서 각별한 주의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끼니에 너무 많은 음식과 너무 여러 가지 음식물을 취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건강 개혁자라고 하지만 명목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들의 식사를 조절할 규칙을 세우지 않고 식간에도 과실이나 견과를 마구 먹음으로 소화기에 과중한 부담을 지운다.
이와 같이, 식사의 부주의로 인하여 감각이 마비되어, 행동이 나태해지며 졸립게 된다. 이기적인 식욕의 방종의 결과로 얼굴이 창백해진 목사들은 건강 개혁에 아무런 덕이 되지 못한다.
과로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 가끔 식사를 거르는 것이 훨씬 좋다. 그리하면, 스스로 체력을 회복할 기회를 주게 된다. 우리의 일꾼들은 설교를 하는 것보다 실지 모범을 보임으로 건강 개혁을 더 많이 옹호하게 될 것이다. 선의의 교우가 자기를 위하여 정성 들여 음식을 장만해 놓고 초대할 경우에는 원칙을 무시할 위험성이 대단히 많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맛있는 요리와 양념이 많이 든 음식과, 또 차나 커피를 거절함으로써, 그들은 참되고 진정한 건강 개혁자임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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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의 방종은 정신을 흐리게 하고 속박하며 거룩한 감정을 무디게 한다. 우리 목사들 중 어떤 이들은 부적절한 식사를 하며 육체적 운동을 하지 않으므로 자연히 정신적 및 도덕적 능력이 약화되다. 식사의 양이 많은 자들은 식욕을 전부 만족시키려고 하지 말고 극기하여 근육이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고 두뇌 활동을 자유스럽게 하도록 할 것이다. 과식은 신체 각 기관의 능력을 빼앗아 위장 활동을 하게 함으로 전신을 마비시킨다.
제 49 장
목사는 건강 개혁을 가르쳐야 함

우리 목사들은 건강 개혁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육체적 생명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아야 하며, 또한 정신과 영혼의 건강에 대하여 가질 바 그들의 태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인체에 대하여 무지하며 또 그것을 어떻게 돌봐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자가 너무도 많다. 사람들은 대단치 않은 다른 문제들을 이보다 더 중대시하여 공부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목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만일, 목사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위치를 취하면,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목사는 가정에서나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생명의 법칙에 순응하며 바른 원칙에 따른 건강적인 생애를 보낼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 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야기할 수 있고, 따라서 건강 개혁 사업으로 신자들을 점차 향상시키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빛을 따라 생애함으로 그러한 증언이 요구되는 자들에게 매우 귀중한 기별을 전할 수 있다.
만일, 목사들이 교회의 모든 활동과 건강 문제를 소개하는 일을 함께 하면, 귀한 축복과 많은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 신자들은 건강 개혁에 관하여 빛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때까지 이 일을 등한히 하여, 그들이 이기적인 방종을 버리기 전에 당연히 받아야 하고 가졌어야 할 그 빛을 받지 못한 까닭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의 죽게 되었다.우리 합회의 합회장들은 지금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올바르게 살아야 할 것을 깨달아야 한다. 목사와 교사는 저희가 받은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저들은 각 방면으로 일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도우실 것이며, 굳게 서서 자신의 방종을 억제하기 위하여 진리와 정의에서 흔들리지 않는 당신의 종들에게 능력을 주어 강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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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관하여 주의 말씀 가운데 주신 빛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이 그 빛에 주의하는지 보기 위하여 시험당하게 될 것이다. 각 교회와 가정마다 그리스도인의 절제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음식을 섭취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가 이 세상 역사의 종말에 살고 있으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신자들 가운데 일치 단결한 활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가르치는 이 위대한 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위대한 의원이신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지 않는 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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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사업과 의료 선교 사업은 항상 병행하여야 한다. 복음은 참된 건강 개혁의 원칙과 함께 묶여져야 되며, 그리스도교는 실제 생애에 적용되어야 한다. 또한, 열심 있고 철저한 개혁 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적인 참 신앙은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똑바로 나아가 진리를 사모하고, 이 매우 엄숙한 시대에 바른 생애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한다. 우리는 건강 개혁의 원칙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남녀들에게 이 원칙의 필요성을 알게 하고 이 원칙에 따라 생애하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힘 있는 데까지 모든 일을 다하여야 한다. ― 6T, 376-379.
제 50 장
건강 개혁의 원칙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목사와 의사 또는 신자들이 우리의 신앙을 잘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음식을 갑자기 변경하도록 촉구함으로써 그들에게 너무 조급한 시험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기를 바라신다. 일단 건강 개혁의 원칙을 제시한 후에, 주께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을 인도 하시도록 할 것이다. 그리하면, 그들이 듣고 믿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들이 건강한 생애에 대한 귀한 진리를 소개할 때에 사람들에게 편견을 일으키는 일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누구든지 어두운 무지의 길을 걷고 있는 자의 발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비록 선한 것을 찬양하는 일일지라도, 들으러 오는 자들로 발을 돌이키지 않도록, 너무 열광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절제의 원칙을 사람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방법으로 소개하라.
우리는 결코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일으키기 위하여 새 지방에서 종사하는 일꾼들은 음식 문제를 너무 내세움으로 인하여 곤란을 야기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기 쉬우므로, 너무 그 문제를 깊이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사람들을 뒤에서 몰지 말고 선두에 서서 인도하라.
진리가 들어가는 곳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이, 저희가 가꾸거나 혹은 그 고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물을 현명하게 이용하는 법을 유능한 교사들에게서 배우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하면, 생활이 부유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도 가르침을 받아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제 51 장
목사와 수공

바울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사업을 유지하는 합당한 방법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명백한 교훈을 조심성 있게 선명하며, 또 자신이 복음 전도자로서 생활 수단으로서의 세상적인 일에 대해서는 “일하지 아니할 권”(고전 9:6)이 있음을 주장하는 한편, 그가 문명의 대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때때로 수공으로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였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바울이 전도하면서 처음으로 생계를 위해 실지 노동을 한 곳은 데살로니가였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에게 누를 끼칠 수도 있었겠으나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살전 2:6, 9) 하였다. 다시 그는 두번째 편지에서, 그와 그의 동역자들이 저들과 함께 유하는 동안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3:8, 9)고 하였다.바울이 처음으로 고린도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그 곳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 매우 의심을 잘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해안에 있는 그리스 사람들은 장사에 매우 눈이 밝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약삭 빠른 상업을 해 왔으므로, 이득은 신성한 것이며 공정한 방법으로든지 부정한 방법으로든지 간에 어떤 방법으로라도 돈을 버는 것이 제일이라고 믿어 왔다.
이러한 그들의 특성을 잘 아는 바울은 그들에게 “바울은 자기가 부해지려고 복음을 전파한다”는 말을 일으킬 실마리를 조금도 주지 않았다. 그는 당연히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서 생활비를 요구할 수 있었으나, 그가 이득을 위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부당한 오해로 전도자로서의 그의 성공과 유능성이 손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이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였다. 바울은 그가 전하는 기별의 감화력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오해받을 만한 것은 모두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후에,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여 얼마 안 있어서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로부터 새로 온” 자였다. 이들은 바울과 업이 같았다.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명했기 때문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할 수 없이 고린도에 와서, 거기서 다시 장막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 때에, 바울이 그들에게 가서 알아본 결과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위에 있는 악한 감화에 물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자들임을 알고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행 18:2-4)하였다.
3년간 에베소 전 지역에서 적극적인 전도 활동을 수행하였던 오랜 전도 기간 동안, 바울은 다시 장막 만드는 일을 하였다. 사도는 고린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에 있을 때에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함께 있게 되어 기뻐하였으며, 그 두 부부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아시아로 돌아갈 때에도 그와 동행하였다.어떤 사람은 바울이 손으로 한 그 일을 반대하여, 그것은 복음 전도자가 하여야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인류 전도자인 바울이 그와 같이 전도하는 일과 수공업을 같이 하였을까? 그는 자기의 삯을 받을 만한 주의 일꾼이 아니었는가? 어느모로 보든지 좀더 나은 이득을 위하여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을 하필 장막 만드는 일에 소비하였을까?
그러나, 바울은 그와 같이 보낸 시간을 낭비로 생각지 아니하였다. 그는 아굴라와 함께 일하면서 위대한 교사이신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접촉하였으며, 기회 있는 대로 구주를 증거하며 도움이 필요되는 자를 도와 주었다. 그의 마음은 항상 신령한 지식을 사모하였다. 그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영적인 사물을 가르치며, 동시에 근면하고 철저한 모본을 보여 주었다. 그는 신속하고 능숙한 일꾼이었으며, 일에 부지런하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롬 12:11)었다. 사도는 그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다른 방법으로써는 도저히 접촉하기 어려운 일부의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바울은 그의 동료들에게, 기술의 재능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며, 하나님께서는 선물(기술)과 지혜를, 바르게 사용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부여해 주심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매일 수고롭게 일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을 가르쳤다. 심한 노동으로 굳어진 그의 손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그의 감동적인 호소의 감화를 조금도 손상함이 없었다. …
만일, 목사가 그리스도의 사업으로 인하여 고난과 궁핍을 당하게 되거든, 상상으로 바울이 애써 일하였던 공장을 찾아가 보라. 그리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 바울이 천막을 만들 때에 그가 의당 사도로서의 그의 수고로도 받을 수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음을 기억하라.노동은 축복이며 저주가 아니다. 나태한 정신은 경건을 파괴하며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한다. 썩은 연못은 마음을 불쾌하게 하나,
맑게 흐르는 시냇물은 온 땅에 기쁨과 건강이 널리 퍼지게 한다. 바울은 육체적 노동을 등한히 하는 자는 곧 신체가 허약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젊은 교역자들에게 친히 손으로 일하고 모든 근육을 운동시키면 몸이 튼튼해져서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당면할 여러 가지 노고와 궁핍을 능히 이겨 낼 수 있음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그는 만일 자신의 신체의 모든 조직을 적당히 운동시키지 않으면 그가 가르치는 말에 힘과 생기가 없어지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도 사업에 부름을 받은 자들은 누구나 다 자기와 및 자기 가족을 교회에 의탁하여 계속적으로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경험이 적은 자들이 거짓 아첨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소견 없는 충동으로 인해 자기가 힘써 노력하지 않아도 전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업의 확장을 위해서 드려진 재정을 다만 생활비를 얻기 위해서 설교하며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고 안일한 생활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낭비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재능을 목회 사업에 활용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데살로니가와 고린도, 에베소 및 기타 다른 지방에서 바울이 보여 준 모본을 보고 유익한 교훈을 받게 될 것이다. 바울은 능변가이며 특별한 사업을 위해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으나, 결코 일을 하지 않으려 하거나 그가 사랑하던 주의 사업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 싫어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편지하기를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전 4:11, 12)는다고 하였다.
가장 위대한 인간 교사 중의 한 분인 바울은 가장 고상한 의무뿐만 아니라 가장 천한 일도 기쁜 마음으로 하였다. 그는 주님의 봉사 사업을 할 때에라도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꺼리지 않고 천막 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렇더라도, 항상 그는 복음을 방해하는 원수의 반대를 물리쳤으며, 또 영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특별한 기회를 이용할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의 세상 직업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바울의 열심과 근면은 나태하고 안일한 생각을 견책한다. ― AA, 346-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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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사들 중에는 신체의 모든 기관을 균형 되게 운동시키지 않음으로 어떤 기관은 너무 사용하여 낡게 하는 한편 또 어떤 기관은 너무 사용하지 않아서 허약하게 만드는 자들이 있다. 만일, 전적으로 한 기관이나 조직만을 사용하면, 가장 많이 사용한 부분이 과용되어 매우 쇠약하게 된다.
정신의 각 기능이 다르고 근육마다 그 역할이 다르다. 그러므로 육체를 적당히 발전시키고 건강한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평등하게 전부 운동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인체의 모든 기관은 각각 그 맡은 역할이 있다. 기계의 모든 바퀴가 힘차게 활동하며 작용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신체의 기능은 서로 상호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적당히 발달하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기능이 전부 작용하여야 한다. ― 3T, 310.
제 52 장
건강을 보존할 의무

나는, 연약한 많은 목사들과 병상에 누워 있는 많은 사람들, 또 그렇게 일찍 이 세상 생애를 마치는 많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사업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 그 사업에 온 정성을 다하였던 사람들을 볼 때 심히 마음 아프다. 그들에게 더 괴로왔던 것은 질병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생각이 아니요, 그들이 귀중히 생각하던 그 사업을 더 할 수 없게 되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고통이나 슬픔을 주고자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질병과 사망의 창조자가 아니시요 오직 생명의 근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사는 것을 원하시며,살기 위해서 그들이 생명과 건강의 법칙을 준행하기를 바라신다.
현대 진리를 받고 깨끗함을 받은 자들은 진리를 저희 생애와 품성에 나타내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다. 저희는 영혼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빛을 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힘쓴다. 참된 파수군이 귀중한 진리의 씨를 가지고 나가 울며 기도로써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릴 때에, 그 수고의 부담이 그에게 지워지게 된다. 그는 무거운 부담을 계속해서 짐으로 지쳐 쓰러지게 된다. 언제나 말에는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그러므로, 때때로 옛것과 새것의 새로운 공급을 하나님의 말씀의 창고로부터 받을 필요가 있다. 주의 말씀은 청중들에게 생명과 힘을 주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기운이 쇠잔하여 그 노력에 새로움과 생기가 도무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연구 활동이나 설교 등 끊임없이 정신 노동을 하는 자는 휴식과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흔히는 열심 있는 학생들이 항상 무리하게 두뇌를 사용하며, 육체적 운동을 등한히 함으로 결국 신체의 기력이 쇠약해져서 정신적인 노력에도 제한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하여, 학생이 지혜롭게 행하였더라면 능히 할 수 있었을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만일, 목사들이 지혜롭게 일하며 심신을 적당히 운동시켰다면, 그들은 그렇게 쉽게 병으로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의 모든 일꾼들이 매일 밖에서 두서너 시간 일할 수 있는 처지에 있고 또 그렇게 하여도 신체에 지장이 없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많은 유익이 될 것이며 그 부르심의 의무를 성과 있게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완전히 휴식할 시간이 없다 할지라도, 손으로 일하면서 계획하고 기도할 수 있으며 심신에 새 힘을 얻어 다시 자기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목사들은 합회에 보고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매일 무엇인가 반드시 해야 하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 그들의 노력과 활동은 능률이 없고 무기력하다. 그들은 어려운 과업에서 완전히 떠나 얼마 동안 휴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매일의 육체적 운동을 대신할 수는 없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이 시간을 내어 정원을 가꾸며 이렇게 함으로 원만한 신체 기능을 갖게 하는 데 필요한 운동을 갖게 된다면, 예배 집회를 지도하는 것과 다름없는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주의 종들이 그들의 육체를 남용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불건강하고 사업에 무능한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소화 불량이다. 소화력이 약해지면 두뇌가 활동을 잘 못 하게 된다. 대개 사람들이 한 번에 여러 가지 음식을 너무 조급하게 먹음으로 위에 전쟁을 일으키며, 이로 인하여 머리를 혼잡하게 한다. 건강에 해로운 음식이나 건강에 유익한 음식일지라도 이를 과식하는 것은 다 같이 해로우므로 피하여야 한다.
건강의 법칙을 무시하고 줄곧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하여, 어두운 그림자가 마음을 뒤덮게 된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습관에 대해서 유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건강 문제에 대하여 주신 빛을 소홀히 여기면, 어떻게 그 거룩한 지식으로 인해 존경을 받을수 있겠는가?
형제들이여, 지금 그대들은 이러한 이기적인 방종의 행위를 돌이켜야 하지 않겠는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4-27).
영양이 부족한 식사그러나, 결코 영양이 부족한 음식을 먹고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스스로 무엇을 먹으며 또 신체의 영양에 가장 유익한 음식이 무엇인지를 배워서 이성과 양심이 지시하는 바대로 행하라. 식사하는 시간에는 모든 근심 걱정을 버리고, 급히 먹지 말고 천천히 즐거운 마음으로 먹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
식사 후에 금방 정신 노동을 하지 말며, 적당한 운동을 알맞게 하고, 잠시 동안 위가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주의 사업의 모든 분야에서 건강한 힘과 건강한 상태로 일하려면 이 문제에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의 사업의 평판이나 능률은 주로 일꾼들의 육체적 건강 상태에 달려 있다. 대개 협의회나 다른 회의를 가질 때마다 회중들의 소화 불량 때문에 오는 우울한 상태로 인하여 좋지 못한 기풍을 조성해 왔다. 또, 대개의 설교에는 그 목사의 소화 불량으로 인하여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난다.
건강은 헤아릴 수 없는 큰 축복이며, 그것은 우리가 아는 이상으로 신앙과 양심에도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또, 건강은 사람의 능력과도 크게 상관된다. 그러므로, 목사는 양떼를 지키는 신실한 목자가 되려면 온 힘을 다하여 가능한 한 최선의 봉사를 할 수 있는 건강 상태를 반드시 보전해야 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 교역자들은 생명과 건강의 법칙에 대하여 아는 지식을 따라 행하여야 한다. 이 문제들에 관한 성경의 위대한 저자들의 말씀을 보고 그대의 이성이 진리라고 가리키는 그 진리의 말씀을 엄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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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건강 개혁의 실제적 감화로 말미암아 육체적, 정신적 및 도덕적인 타락으로부터 구원함을 받게 될 것을 주께서 나에게 보이셨다. 또, 건강에 대한 강연회가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한 인쇄물이 증가할 것이다. 사람들이 건강 개혁의 원칙을 좋게 받아들일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점점 향상하여 이 시대를 위한 특별한 진리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 6T, 378, 379.
제 53 장
과로에서 오는 위험

사도들이 처음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 구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막 6:31) 하셨다. 그들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정열을 다 기울여 일하였으므로 그들의 체력과 정신력이 다 소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쉬어야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한 말씀을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역자들에게도 분명히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다. 그분은 곤하고 지친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돌보는 일을 할 때에라도 항상 고된 과업에 얽매여 지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자신의 건강을 소홀히 하게 되고, 따라서 정신과 체력이 과로하여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극기하여야 하며 때로는 많은 희생을 하여야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건강 법칙을 공부하여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잘 보존할 수 있도록 이지를 사용하기를 바라신다.예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실 수 있었고 또 제자들에게 이적을 행할 능력을 주실 수 있었으나 피곤한 당신의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시골에 가서 편히 쉬라고 명하셨다.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에게 쉬지 말고 계속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 9:38)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미 각자의 역량에 따라 각각 일을 맡겨 주셨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영혼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수고도 하지 않는 반면에 소수의 사람들만이 무거운 책임을 지고 수고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자기의 건강을 소홀히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든지 너무 지쳐서 앞으로 더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기까지 일하지 말 것이며, 또 이틀에 할 일을 당일에 몰아치려고 하지 말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지혜롭고 조심성 있게 일한 사람이나 저희의 체력과 정신력을 다 소모하여 긴급할 때에 사용할 힘이 없게 된 자나 그들이 행한 일에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은 세계적인 사업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의 티끌만한 능력과 역량까지도 다 요구한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밭에 곡식이 익어 추수하게 된 것을 보고 저희 힘을 과도하게 사용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저들이 자기의 최선을 다한 이후에는, 참으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할 사람은 적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라고 말할 것이다.
음식의 부절제, 노동의 부절제, 또 이 외의 거의 모든 일에 부절제를 하는 일이 도처에 있다. 일정한 시간에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 모든 지력을 다하며, 쉬어야 되겠다고 생각되는 때에 쉬지 않고 계속 일하는 자는 결코 이익을 보는 자가 아니다. 그들은 앞으로 사용할 힘을 지금 다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모하게 다 소모한 힘이 막상 그 힘이 요구될 때에는 힘이 부족함으로 실패하고 만다. 육체의 힘은 다 없어지고 정신적 힘도 사용할 수가 없다. 이제 긴급한 시기는 이르렀으나, 그들이 가진 힘은 다 없어졌다.날마다 그 날에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내일에 할 일을 오늘 미리 몰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동정이 많으시므로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또, 그분은 우리 육체의 건강을 상실하게 하거나 혹은 정신적인 능력을 약화시킬 어떠한 행동도 취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극도로 피로하여지며 신경이 쇠약해지기까지 고된 심한 일을 하는 것은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일꾼들은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하신 주의 명령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음으로 많은 귀중한 생명이 희생당하였다.그러나, 그들이 미리 휴양하여야 할 것을 깨달았더라면 오늘날 생존하여 국내에 주의 사업을 진척시켰을 것이다. 이들은 추수할 밭이 광대하고 일꾼이 매우 부족한 것을 보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육체의 요구가 이에 저항하여 신음할지라도 이에 별로 주의하지 않고 오히려 일을 배가하여 힘써 일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무덤에 뉘어 의인을 일으켜 죽지 않을 몸으로 입히시기 위하여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까지 편히 쉬게 하신 것이다.
목회자가 무거운 근심과 걱정에 억눌려 심신이 과로해졌을 때에는 자신의 이기적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일의 보다 나은 일을 하기 위한 준비로서 잠깐 동안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야 한다. 우리의 앞길에는 늘 졸지 않는 원수가 있어서, 언제나 우리의 모든 약점을 이용해서 시험하고자 노리고 있다. 정신이 과로해지고 신체가 쇠약해지면, 원수는 그에게 가장 혹독한 시험을 가한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자기의 힘을 조심 있게 절약하여 노고로 몸이 피로해졌을 때에는 한적한 곳에 가서 예수님과 교통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체질상으로 본래 피로를 느끼는 자들이나 또는 남보다 자기가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쉴 필요가 없다. 자기의 몸을 아끼며 자기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아득한 사람들을 언제나 볼 수 있다. 그들은 아주 크고 무거운 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그 짐을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그들이 일하는 것은 매우 적은 결과를 가져 올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은혜스러운 말씀을 하신 것은 주의 사업에 피곤하여진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며, 항상 자기 몸을 아끼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구주께서는 자기를 잊어 버리고 자기의 역량을 다해서 일하며 또 그 이상 더 일할 수 없을까 하고 걱정하며 열심으로 자기의 능력 이상으로 일하며 수고하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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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서는 세상의 습관이나 행습에 일치하지 아니하는 생애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얻는 중에 각 사람은 개인적인 경험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명하신다. 여기에서만 참된 쉼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효과적인 준비이다. 서성대는 군중과 인생의 격렬한 활동으로 인한 긴장 속에서 이와 같이 소생함을 받은 영혼은 빛과 화평의 분위기로 둘리울 것이다. 그 생애는 향기를 내뿜을 것이며, 사람의 심령을 감동시킬 하늘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 시대의 소망 2권,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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