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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편
설교단에 선 목회자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고후 6:3)

제 28 장
말씀을 전파하라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 2).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의 의무가 직접적이고도 힘있는 이 성경 말씀 가운데 명시되어 있다. 목사는 “말씀을 전파”할 것이요, 결코 사람의 사상이나 전설, 또는 사람의 마음을 격동케 하며 흥분시키는 우스운 우화라든가 혹은 감상적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높이지 말고, 하나님의 앞에 서듯, 멸망하여 가는 세상 앞에 서서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목사가 성경 말씀을 설명할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진지하고 성실하게 말하고 결코 경솔한 태도를 보이거나 억지로 해석하는 일이 없이 청중들에게 현재와 영원한 행복에 관한 큰 문제를 깨닫도록 하여야 한다.교역을 하는 형제들이여! 그대들이 회중 앞에 설 때, 아무쪼록 긴요하고 교훈이 될 만한 사실들만을 말하라. 실지로 생활에 응용해야 할 실제적이고도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라.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골 1:14)은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을 소개하며,
듣는 무리로 하여금 진리의 능력을 깨닫게 하도록 힘쓰라.
목회자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신앙의 기초로서 예언의 확실한 말씀을 소개하여야 한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수록된 예언들을 깊이 연구하고, 이와 아울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은 모든 사람들이 주의하여야 할 중대한 성경 말씀임을 강조하기 의해 나에게 여러번 제시되었다. 우리는 지금 거기에 기록된 예언들이 전부 성취되어 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그러므로, 목사와 교사들은 자기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 예언들을 자세히 설명할 것이며, 사소한 문제들에 대한 토론을 그치고 영혼의 운명을 좌우할 위대한 진리들을 소개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 전파자들은 안식일에 관한 빛을 소개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재림하실 날이 임박한 것을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하여야 한다. 세상에 경고하여야 할 마지막 기별은 사람들로 하나님께서 중히 여기시는 율법의 중요성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분명하게 소개하여 아무도 그것을 듣고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여야 할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였노라고 핑계하는 범법자가 없도록 할 것이다.나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거룩히 구별하신 증거들을 찾아 무리 앞에서 낭독하고 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직 진리를 듣지 못한 자들에게,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도외시하는 자는 누구나 반드시 그 보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 각 시대를 통하여, 안식일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는 시금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출 31:17)이라 하셨다.
거룩한 사물에 있어서의 수단
이제 복음은 도처에서 반대를 받는다. 지금처럼 악한 무리들의 세력이 강한 때는 아직까지 없었다. 이제 악의 영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대항하기 위해서 인간들과 힘을 합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경보다 사람의 유전과 거짓 이야기를, 하나님의 계시보다 이론과 과학을, 성령의 지도보다 인간의 재간을, 성령의 가르침보다 형식과 의식을, 경건의 본질적인 능력보다 더욱 귀하게 여긴다. 여러 가지 서글픈 죄악들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생겼다. 불신의 조류는 신속히 번져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구 동성으로,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우리는 반대한다”고 외친다. 이 때에, 하나님의 목자들은 나팔 소리처럼 소리를 높여 백성들의 죄악을 고하여야 한다. 통속적인 평범한 설교는 영속적인 감화를 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하고 예리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까닭에, 사람들은 마음에 자극을 받지 못한다.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들도 솔직히 자기의 의견을 토로하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필요가 무엇인가라고 말할 사람이 많다. 무엇 때문에 침례 요한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라고 과도한 책망을 하였을까? 헤롯에게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사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헤로디아의 노를 살 필요가 무엇인가? 그가 그와 같이 솔직하게 타인의 과오를 지적하기 때문에 도리어 자기의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헤로디아의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는 될 수 없었는가?” 이런 생각을 가질 사람이 많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수단이 성실성의 자리를 대신할 때까지 설득한다. 그리하여, 죄는 책망을 받지 않은 채 방치된다. 그러니, 교회 안에 언제 다시 나단이 다윗을 향하여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고 한 것처럼 바른 견책의 소리가 들릴 것인가? 만일, 이 말이 자주 들리면, 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의 기별을 전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저들의 욕망 곧 진리를 굽게 하며 하나님께서 평안하다고 하시지 않은 평안을 부르짖는 그런 욕망과 사랑을 버리고 회개하기 전에는 저들의 노력의 열매 없음을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은 그 사업과 그 부르심의 신성함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임명하심을 받은 전도자로서 실로 책임이 매우 중대한 지위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서 활동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를 격려하며 순종치 않는 자를 경고하여야 한다. 세속적인 수단은 목자들에게 아무 쓸 데가 없다. 결코 예수님께서 명하신 길에서 이탈하지 말고 믿음으로 전진하며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목사는 지상의 모든 권세 있는 자보다 더욱 위대하신 분이 명하신 말씀을 말할 것이요 결코 자기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그들이 전하는 기별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단이나 엘리야나 요한과 같이 자기에게 미칠 결과를 생각지 않고 아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며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일이 있더라도 담대히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신다.
예리한 화살과 같음그리스도의 말씀은 예리한 화살과 같이 청중들의 마음을 쏘아 꿰뚫었다. 청중이 많거나 적거나 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사람의 마음은 감동되어 구원으로 인도되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땅에 떨어짐이 없이 일언 일구가 듣는 사람에게 새로운 책임을 깨닫게 하였다. 그런즉, 오늘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성실히 마지막 기별을 세상에 전하는 전도자는 그 노력이 헛될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비록 아무도 진리의 화살을 볼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화살이 과녁을 맞춰 듣는 사람의 마음을 뚫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화살에 맞는 사람의 신음 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진리는 조용히 그 마음을 뚫고 들어간다.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날에 당신의 충성된 목사들이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구속받은 자들과 함께 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지 못하고 전도함으로 오는 손실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느 집회를 막론하고 거의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면서도 망설이는 자들이 있다. 결심하는 자들은 있으나, 목사가 기별을 전하는 데 열의와 능력이 없고, 또한 갈팡질팡하고 있는 자들에게 노골적인 호소를 하지 못하는 예가 너무나 많다.
도덕이 땅에 떨어진 오늘날에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딱딱한 이론만으로는 부족하다. 목사는 반드시 하나님과 산 연합을 가지고 자기가 전하는 바를 먼저 자신이 믿고 설교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산 진리는 죄인들을 떨게 하며 그 입에서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는 온전히 주님의 편에 서기로 결심하였다”라고 부르짖게 할 것이다.하나님의 사자는 더욱 큰 빛과 능력을 얻으려는 노력을 결코 그치지 말아야 한다.
낙담과 흑암 가운데서라도 성경을 깊이 깨닫고 어떠한 선물에 있어서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결의를 가지고 항상 힘쓰고 기도하며 또 소망을 가져야 한다. 한 영혼이라도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영혼이 있는 한, 힘을 다하여 새 용기로써 전진하고 노력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고 말씀하셨고, 또 의의 면류관이 승리자에게 약속되었으며,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중재하고 계시니, 그리스도의 종 된 목사들은 견고한 믿음과, 지치지 않는 원기와 희망을 가지고 활동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중임을 맡은 자는 말로써 듣는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설교의 목적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있지 않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설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거나 두뇌로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설교로써 지성에 호소하며 지식을 나누어 줘야 함은 물론이지만, 그 이상의 일을 하여야 한다. 목사의 설교가 실효를 거두려면 반드시 그 청중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야 한다. 설교에 하잘것없는 우스운 이야기를 섞지 말고, 반드시 그 영혼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또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깨닫도록 힘써야 한다. 목사는 회중 앞에 설 때에, 그 회중 가운데 의심으로 고통하며 희망을 잃고 거의 자포자기한 자들과, 항상 시험을 만나 사단과 악전 고투하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악과 투쟁하는 이 사람들에게 원기를 북돋우어 줄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할 것이다.
제 29 장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줌

우리 목회자들의 전도 대상인 사람들은 대부분 성경 진리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를 전혀 알지 못하므로, 실제적 믿음에 관하여 아무리 단순한 교훈을 줄지라도 저들에게는 새로운 계시가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전도할 때에, 목사는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려는 사고 방식을 버리고, 굶주린 영혼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주라. 듣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하지 못하는 설교는 결코 하지 말라.
사람들이 시급히 요구하는 것은 현재의 시련과 긴급한 필요 사항에 대한 도움이다. 목사는 시적인 묘사와 기발한 표현으로써 자기의 높은 식견을 드러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감각을 즐겁게 하고 상상력을 풍부하게 할 뿐이며, 일상 생애와 매일의 필요에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런 목사는 그의 진기한 웅변으로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여 길렀다고 생각하며, 또 듣는 자들도 진리를 저런 아름다운 말로써 묘사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멋있는 표현에 의해 일시적으로 일어난 황홀한 상태의 시종을 살펴보면, 다소의 진리는 소개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런 설교는 날마다의 생애의 투쟁에 승리할 수 있도록 듣는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지는 못하였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웅변을 설교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자는 듣는 자로 그 웅변에 정신을 빼앗겨 진짜 필요한 진리는 잊어버리게 한다. 그러므로, 감흥이 사라지고 나면,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도 마음 속에 남지 않으며 아무 소득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목사의 웅변을 칭찬할지 모르나, 마음 가운데는 결심하고자 하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들은 설교에 대하여 비평하기를 마치 연극을 비평하듯 하며, 목사에 대하여는 배우를 비평하듯이 한다. 다시 이런 설교를 듣기 위해 올지라도 역시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하고, 또 굶주림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가게 될 것이다.
미사 여구나 무의미한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아니하다. 목사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중대한 진리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도록 설교 해야 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보통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지 말라. 그들이 혹 그 말을 깨닫는다 할지라도 아무런 도움도 유익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주신 단순한 교훈을 가르치며, 예수님의 희생과 극기의 생애를 이야기하라. 예수님의 겸손하심과 죽으심, 그의 부활과 승천 및 하늘 법정에서 죄인을 위해 중재하심을 이야기하라. 어느 집회이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영혼들이 있다. 이들에게 진리를 깨우쳐 주며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동시에 그들의 주의를 중대한 문제로 향하게 하라.대개 사람들은 오류를 옹호하고 있으나, 그대는 다만 진리만을 옹호하라. 하나님의 우리 안에 있는 양무리에게 푸른 초장이 될 문제들을 소개할 것이며, 청중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메마른 광야로 인도하여 전도하기 이전의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라.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소개하되 율법과 복음이 요구하는 바를 분명히 가르치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소개하고,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다 구원하시는 주의 능력을 말하라. 우리 구원의 대장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하시되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애원자로서가 아니라 승리의 기념물을 차지할 권리를 가지신 개선자로서 중보하신다.
예수님은 실로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자를 그의 공로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라.
목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않는다면, 진리는 인간의 장식품으로 가리워지게 될 것이다. 목사는 결코 웅변적인 설교로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사람을 가르쳐 옳은 길로 인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를 죄인의 유일한 소망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 아름다운 연설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나 또는 부적당한 예화는 죄인을 회개시키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마치 재미있는 노래를 듣는 것과 같이 듣는다. 죄인에게 들려주어야 할 기별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일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한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훌륭한 증언이나 웅변적인 연설이나 혹은 깊은 논리 때문이 아니요 복음의 단순함과 생명의 양식에 주린 자에게 배불림이 되기 때문이다.
복음 전도를 효과 있게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그리스도께서 목사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면,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듣는 자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성령은 피지배자가 아니요 지배하는 능력이시다. 그는 진리로 마음을 비추게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말하는 목사의 모든 설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영혼을 거룩한 분위기로 감싸시며, 아직 회개치 아니한 자에게 경고하며 세상 죄를 지신 그리스도를 가르치시는 이는 곧 성령이시다.
제 30 장
그리스도를 전파함

설교하는 목사들이 예수님에 대하여는 별로 말하지 않고 율법에 대해서 많이 설교한다는 비평을 자주 듣는다. 물론, 이것이 사실은 아니나, 그럴 경우도 있지 않은가? 믿음의 참 경험이 없고 아직 그리스도의 의를 받지 못한 자가 강단 위에 선 일이 없는가? 대개의 우리 목사들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증적인 설교를 하고, 구세주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드린 제물은 가인의 제물과 다름이 없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 그 소산 자체는 하나님 보시기에 열납될 수가 있었고 또 참으로 귀한 소산이었으나, 거기에는 제물이 지닌 효능 곧 그리스도의 피를 대표하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피가 함유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빼놓은 설교는 이와 마찬가지여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며, 따라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일으키지 못한다.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선봉이 되어야 한다. 세 천사의 기별 가운데는 안식일 진리를 소개하여야 할 사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기별 속에 있는 다른 진리들과 함께 이 안식일 진리를 전하되, 주목하여야 할 가장 위대한 중심 인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긍휼과 진리가 서로 사귀고 공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는 곳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죄인으로 하여금 반드시 갈바리의 십자가를 쳐다보도록 인도하여야 하며, 죄인은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으로써
구세주의 공로를 의지하며, 그의 자비하심을 믿고 그 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의 보고(寶庫)가 교회와 세상 사람들의 앞에 열려졌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은 얼마나 놀랍고도 심오한 사랑인가! 율법의 엄중함만을 깨닫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큰 손실을 입고 있는가!
비록 진리라 할지라도 냉랭하고 맥없이 소개될 때에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지 못하는데,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목사들과 교역자들이 예수님을 율법과 관련시켜 소개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종사하는 어떤 교역자는 죄인을 책망하기는 급히하고 인류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은 뒤에 감추어 버린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진상-곧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를 영접하기 위하여 애타게 기다리시며, 그에게 노염을 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환영할 잔치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시는 하늘 아버지의 참 모습을 죄인들에게 분명히 알게 하라. 아,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주님의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논리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더 깊고 더 높고 더 순결하고 더 영광스러운 일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의 논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천지의 주재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므로 마땅히 모든 찬송과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환히 비추시는 빛을 흐리게 하는 예가 많다.
전연 논증적인 설교만 함으로 과오를 범하는 목사들이 있다. 진리의 이론을 듣고 그 확실한 증거를 봄으로 감명을 받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소개하면 그 뿌린씨가 자라나 결실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갈바리의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생전에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설교인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가 버린 귀한 기회는 이제는 영원히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만일 진리의 이론과 함께 그리스도와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의 사랑을 전하였다면, 이들이 주의 앞으로 인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로 나가는 길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나가는 길을 찾기를 갈망하고 있다. 마지막 은혜의 기별을 전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죄인의 피난처로 소개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회개나 믿음에 대하여는 설교할 필요가 없는 줄로 생각하고 있는 목사들이 있다. 그런 문제는 사람들이 다 잘 알므로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기 위해서는 좀 색다른 문제를 소개하여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경류에 대해서 무지하다. 무엇보다, 이 중대한 문제를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진리가 하나하나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하나로 완전히 일치한 것을 보이기 위하여 교리적 설교가 긴요하긴 하나, 어떤 설교에도 복음의 기초인 그리스도와 또 그 십자가를 빼놓지 말아야 한다.
목사가 실제적 믿음을 더 강조해서 말하면, 감동함을 받는 사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흔히 새 전도 지방에 전도를 시작할 때 주로 교리적인 설교를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동요하며,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능력을 깨닫고 그 튼튼한 반석 위에 서기를 갈망한다. 바로 이 때야말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어야 할 필요를 저희 마음 속 깊이 새길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때이다. 만일, 이런 실제적인 일을 이루지 못하고 전도회를 마치면, 큰 손해를 보게 된다.
때로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다만 진리의 확실한 증거로 인해서 믿기로 결심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에게 먼저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여 말하기 전에는 목사의 할 일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설교할 때마다 목사는, 사람들에게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호소해야 한다. 오늘날 성행하고 있는 죄악과 방종을 견책하고 실제적인 경건한 생애를 보낼 것을 명하여야 한다. 참된 목회자는 그가 말하는 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깨닫는고로 그가 구원하고자 하는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감추지 못한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우리 동역자들에게, 그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강력한 말을 구사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가장 높이 발달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승천하신 그리스도, 재림하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마음이 온유하고 기쁨으로 충만되어 사람들에게 사랑과 열심으로 이 진리를 소개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목사 자신은 숨기어지고 그리스도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
사람을 가르치는 그대들이여! 예수님을 높이 들라. 설교할 때나 찬미할 때나 기도할 때에, 예수님을 높이 들라. 온 힘을 다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며 길을 찾지 못한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을 제시하라. 부활하신 구세주를 높이 들고, 귀 있는 모든 자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엡 5:2)신 그리스도께로 나오라고 외치라. 모든 설교의 중심과 모든 찬미의 제목은 다 구원에 귀착하고, 기도할 때에도 항상 이것을 생각하라. 설교할 때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신 그리스도 대신에 아무것도 더하지 말고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며, 예수님이 회개하는 자의 희망이요 믿는 자의 요새이신 것을 소개하라. 번민하고 낙담한 자에게 화평의 도를 가르치고, 주의 완전하심과 주의 은혜를 밝히 보이라.
* *
어두움에서 광명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이르게 하는 길은 오직 하나 있으니, 그것은 곧 믿음의 길이다. 이 길은 캄캄하거나 희미한 길이 아닌 동시에 유한한 인간의 길이 아니며, 또한 통행세를 내고서 지나가야 하는 인간이 만든 길과는 같지 않다. 이 길은 자기의 고행이나 노력으로는 도저히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은 완전 무결하여 사람이 여기에 더 손댈 수 없다. 이 길은 아무리 완고한 죄인이라도 참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다 받아들일 만큼 넓으나, 죄에 대하여는 조금이라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좁다. 이것은 주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이다.
제 31 장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로 인함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귀한 생각인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 마귀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충분히 받아들이면 자기의 힘이 무력하여질 것을 알므로 이 진리가 명백히 소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지배하여 의심과 불신과 어두움을 경험하게 하면, 사단은 그들을 시험에 빠뜨려 정복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믿음을 장려하여야 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자기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을 믿는 자들은 시험에 빠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일에서 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믿음이 점점 더 굳세어져서 드디어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실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7)이라 말한 것과 같이 깨끗해져야 한다.만일, 우리가 세 천사의 기별이 지니고 있는 정신과 능력을 받고자 한다면, 반드시 율법과 복음을 함께 소개하여야 할 것이다.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땅에 속한 한 세력이 불순종의 자식들을 동요시켜서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라는 진리를 유린하는 한편, 위에 속한 한 능력은 충성되고 율법을 높이며 예수님을 온전한 구주로 받드는 자의 마음에 역사한다
.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면 거짓 교리와 거짓 사상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잃어버리게 되며, 따라서 그 믿음은 능력과 생명이 없어질 것이다.
목사는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교회와 새 전도 지방에 소개하여, 듣는 자로 지적인 믿음을 가지게 하고, 그리스도가 저희의 구원이시며 의(義)이심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인류의 유일한 소망으로 믿는 믿음을 방해하려고 계책을 꾸민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고 아벨이 어린 양을 드린 것과 같이, 하늘 아버지 앞에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나아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인의 제물은 그리스도가 없는 제물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 우리가 전해야 할 기별은 하나님의 율법뿐만 아니라 예수의 믿음이다. 이제 한 밝은 빛이 우리의 앞길을 비추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하게 한다. 우리는 모든 빛을 받아 그리로 행하여, 심판하실 때에 정죄함을 받을 것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진리를 분명히 깨달을수록 우리의 의무와 책임은 더욱 중대하여진다. 빛은 흑암 속에 감취어 있는 오류를 지적하여 고쳐 준다. 빛이 이를 때에는, 사람의 생애와 성품이 그 빛과 일치하기 위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전에 마음이 캄캄할 때에는 죄됨을 알지 못하고 범한 것이라도, 이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미 많은 빛이 주어졌으므로, 사람들은 개선되고 향상되고 정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빛을 받기 전보다 더 악해지고 완고해질 것이다.
제 32 장
어떤 전도자에게 보내는 권면

사랑하는 형제에게
… 나는 이 기별을 주님께로부터 받아 그대에게 전한다. 먼저 말을 온순하게 하고 행동을 고상하게 하라. 그대는 너무 엄격하여 전제적이며 말도 과격한 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깊이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대를 향하여, 깨어 기도하며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고 하신다. 과격한 말은 주님을 슬프게 하며, 분별없는 말은 해를 끼친다. 나는 그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할수 있는 대로 말을 부드럽게 하며, 그대의 언어에 깊이 주의하여 말에나 행동에 과격함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라. 그대의 모든 언행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게 하고, 결코 그대의 좋지 않은 천성 때문에 그대가 하는 사업에 해를 끼치지 않게 하라. 그대는 시험당하는 자들을 도와 힘을 주어야 할 신분이므로, 과격한 말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도록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양무리들을 위하여, 또 그대가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셨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로 인해서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말 것이다. 진실로 그리스도의 종들에게는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이 나타나야 한다.교만하고 성급한 말은 그리스도께서 교역자들에게 맡겨 주신 신성한 사업과 조화되지 않는다. 그대가 매일 예수님을 쳐다보고 예수님의 모본을 배우는 생애를 하면, 조화되는 건전한 품성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항상 온유한 말을 하고, 남을 비난하고 꾸짖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말라. 크신 교사 예수님을 본받으라. 친절과 동정의 말은 양약과 같아서, 절망 가운데서 신음하는 영혼을 치유해 준다.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를 실행하는 것은 아픔을 진통시키고 치유하는 힘을 갖게 한다.
과격한 말은 자신이나 어떤 누구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한다.
형제여! 그대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인내와 선하심을 나타내어야 한다. 공중 앞에 서서 말할 때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약 3:17)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좇아 말하도록 하라. 항상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그대가 때때로 발하기 쉬운 과격한 언사를 억제하라. 그대의 말은 그대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거룩하여 질 수 있다. 설혹 다른 형제의 행동이 그대가 생각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결코 과격한 태도로 대하지 말라. 이제까지 그대의 가혹한 언사가 하나님을 근심케 하였다.
그대의 생각을 주님의 뜻에 복종케 하여야 할 것이다. 이 일에는 주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그대는 복음을 전파하는 목사이며 그대의 정신과 행위를 다른 사람들이 모방하는 까닭에, 오직 순결하고 깨끗한 말만 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항상 아이들을 사랑하며 친절히 대하라. …
그대가 만일 그대의 사업에 자아를 개입시키지 않을 결심을 가진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이상에 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정신과 행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 힘과 위로와 용기를 받게 될 것이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여지는 것은 그대의 특권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거듭나고자 하는 그대의 노력에 협력하여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대와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 안에 거하시려고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그러므로, 그대는 구주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내며, 굽은 곳을 곧게 하기 위하여 지혜와 능력으로 일할 수 있다.
1908 년 8월 22일 미국 캘리로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제 33 장
실제적인 몇 가지 제의

형식에 매인 설교 ― 어떤 목사들은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주의 지도하심을 받을 여지가 없도록 세세하게 준비한다. 즉, 조목조목을 판에 박은 듯이 일일이 다 정해 놓고 도무지 거기에서 변동할 수 없는 것 같이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만일 그 모양으로 나가면, 필경 목사들은 마음이 편협해지며 영적인 생기와 활력이 결핍하여 마치 우로가 내리지 않는 길보아 산들과 같을 것이다.
만일, 목사가 이미 준비해 온 설교에서 조금도 변동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설교문을 낭독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단조롭고 틀에 박힌 설교에서는 성령의 활력을 거의 깨달을 수 없고, 또한 이런 설교를 늘 계속하면 마침내 목사의 역량과 재능이 손실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일꾼들이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나이까?”라고 물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주의 깊이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함을 주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마음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그들이 하늘에서 새로이 받은 진리를 백성들에게 전하여 줄 수가 있을 것이며, 성령께서는 모인 무리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적절한 생각들을 그들에게 부여해 주실 것이다.
* *경외심. ― 나는 어떤 목사들이 마치 세상의 위인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에 대해서 평범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사실상, 목사들이 예수님을 저들과 같은 사람인양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러한 거룩한 문제를 그렇게 경솔하게 말함을 들을 때마다 나는 몹시 마음이 아프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의 교사일지라도 저희의 그리스도관은 지극히 비열하며 그리스도를 친히 잘 알지도 못하고 있다. 저희의 사상은 매우 유치하므로 구세주가 어떤 분이심을 분명히 깨닫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심을 밝히 알고 또 그분의 사업을 익히 아는 사람은 자만하거나 자고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능력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겸손해지며, 자기를 의지하는 생각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의지하여 사업에 필요한 힘을 구한다. 평소에 그리스도와 그 풍족한 공로를 묵상하는 자는 믿음이 더하여지고, 영적 분별력이 강해지며, 주와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두터워지고 또한 간절히 기도함으로 기도의 성과를 얻게 된다.
합당치 않은 예화. ― 목사가 설교할 때에 합당치 않은 예화를 사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힘써 전한 진리의 감화력을 감소시키는 결과가 된다. 청중들을 웃기며 또는 조금이라도 경박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예화나 이야기는 마땅히 가혹한 힐책을 받아야 한다. 진리는 반드시 고상하고 엄정한 말로 소개하고 그 설명과 예증도 또한 그러하여야 한다.
* *
주의를 끄는 방법. ― 목사는 흔히 사람들이 꽉 차서 더워진 방에서 설교하는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청중들이 졸음이 와서 감각이 둔하여지며 진리를 듣긴 들어도 거의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에, 그들에게 설교하는 대신에 대화식으로 묻기도 하면서 가르치면, 청중들이 마음에 활기를 띠게 될 것이며, 따라서 전하는 말을 더욱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 *
회중이 적을 때. ― 설교를 들을 자가 적을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말라. 비록 듣는 자가 두세 사람뿐일지라도 그 중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함께하는 자가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께서 그 한 영혼을 위하여 그대에게 기별을 맡기셨는지도 알 수 없으며, 그가 회개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그릇이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대는 도무지 알지 못할지라도, 그대가 일한 결과는 천 배가 될 것이다.
다만 빈 자리를 보고 그대의 믿음과 용기를 잃지 말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를 전하시기 위하여 무엇을 하시는지를 생각하라. 그대는 결코 실패함이 없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대 앞에 수천 인의 청중이 있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열성을 다하여 믿음과 관심을 가지고 말하라.
어떤 비 오는 날 아침, 한 목사가 설교하러 나가 보니 들을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한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열성을 다해 그를 향하여 진지하게 설교하였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후에 선교사가 되어, 그 노력의 결과로 수 천 명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게 되었다.
* *간단한 설교. ― 이 시대의 기별을 전할 때에, 길고 복잡한 설교를 하지 말고 간단하게 그 요점을 들어 말하여야 한다.
긴 설교는 말하는 사람도 힘들 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도 피로하게 한다. 참으로 그 기별의 중대함을 아는 설교자라면 몸이 무리하지 않도록 하며, 또 사람들이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이 말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하여 한 번 말했다고 해서 그 말한 것을 청중이 다 기억하고 있으려니 하고 생각지 말라. 문제들을 너무 빨리 다루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명백하고 단순한 말로 간단하게 교훈하되 그것을 자주 되풀이하라. 긴 설교보다 짧은 설교가 훨씬 더 잘 기억 된다. 설교하는 우리 목사들은 청중들 가운데 그 설교하는 문제를 처음 듣는 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요점을 재삼 반복하여 말할 필요가 있다.
* *
단도직입적으로. ― 설교하는 사람들의 대개가 자기의 부족함과 서론을 이야기하는 데 저들의 시간과 정력을 다 허비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부족함을 사과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 거의 반 시간을 보낸다. 이와 같이 하여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리고, 정작 본 문제에 들어가 청중들에게 진리의 요점들을 깨닫게 하려고하나 이미 사람들은 피곤하여져서 그 말씀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다.
목사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일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하나님께로부터 기별을 받아 가진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시작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정표처럼 중요한 진리의 요점들을 분명하게 나타내 주어야 한다.실상 중요치 않은 점과, 또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을 힘들여 설명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나, 긴요한 점들은 할 수 있는 대로 힘있고 명백하게 설명하고 증명하여야 한다.
* *
집중. ― 어떤 사람들은 어떤 한 가지 문제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습관이 있다.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외하고 한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좋은 일이나, 한 생각에만 온 힘을 쏟는 자는 다른 점에 대하여는 불완전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일은 보통 대화할 때에도 상대방에게 지루함과 싫증을 느끼게 한다. 이런 사람은 글도 역시 자유스럽고 평이하지 못하다. 저들은 공중 앞에서 연설할 때에, 말하고자 하는 문제에만 정신을 두고 점점 그 문제에 깊이 빠져 들어간다. 그들이 그 일에 매우 열중할 때에는 지식이 있고 빛을 가진 것처런 보이지만, 실상 그 말을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사람이 뿌린 진리의 씨는 땅에 너무 깊이 묻혀 연한 싹이 땅위에 나오지 못할 우려가 있다. 비록 매우 평이하고 분명하며 지극히 중요하고 뚜렷한 진리도 여러 난해한 말들로 인하여 모호해질 수 있다.
* *
단순함. ― 논증도 경우에 따라서는 유익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풀이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훈하실 때에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명백하게 설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길고 어려운 말을 하지 않으시고 보통 사람에게 적합한 쉬운 말로 가르치셨다. 또한, 청중이 깨달을 수 있는 이상의 깊은 문제는 말씀하지 아니하셨다.
목사는 진리를 명백하고 단순하게 소개하여야 한다. 청중들 중에는 회개의 계단을 잘 설명해 주어야 할 사람이 많다. 세상에는 아직 이 점을 알지 못하고 있는 자가 상상 외로 많다. 대학을 나온 학자들, 웅변가, 유능한 정치가 또는 사회적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서도, 다른 일에는 저들의 온 정력을 다 기울이면서도 가장 중대한 문제를 등한히 여기는 자가 적지 않다. 그런데, 설교자들은 흔히 이런 사람들이 회중 가운데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유식한 설교를 하는 데만 정신을 기울이고 실상 그리스도는 나타내지 않는다. 그는 죄가 불법임을 말하지 않으며, 구원의 계획을 분명히 설교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중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저희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을 소개하여야 할 것이다.
* *
부흥. ― 하나님께서 인간 기구들을 통해 일하실 때 곧 사람이 위에서 능력을 받아 활동할 때에, 사단은 그 부하를 통하여 “광신”이라고 부르짖게 하고 또 사람들에게 극단에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게 한다. 그들의 이 같은 부르짖음에 대하여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위조 화폐가 있다고 해서 참 화폐의 가치가 저락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 부흥과 거짓 회개가 있다고 하여 모든 부흥을 전부 다 의심해서는 안 된다. 바리새 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눅 15:2)였다고 그분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과 같은 태도를 우리는 취하지 말아야 한다.그리스도의 생애는 영혼을 회개시키는 당신의 사업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도록 충분히 가르치고 있다. 천사는 죄인의 구원을 크게 기뻐하나,
때때로 사람은 이것을 믿지 않고 이를 가리켜 광신이라 하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자들을 향하여 맹목적 열성을 가진 자라고 비난한다.
* *
안식일 예배. ― 안식일 예배를 지도할 책임을 맡은 사람은 청중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흥미를 가지게 할까 하고 깊이 연구하여야 한다. 언제나 설교를 너무 길게 함으로 예배에 참석한 자들이 그리스도께 죄를 자복할 기회까지 빼앗아서는 안 된다. 설교는 간단히 하며 사람들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도록 하는 것이 좋다 감사의 예물은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성도가 모이는 집회에는 어느 곳에서나 거룩한 천사들이 성도들의 간증과 찬미와 기도로써 여호와를 찬양하는 소리를 듣는다.
기도회나 간증회는 반드시 특별한 도움을 주며 또 격려를 주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런 집회에 참석함을 특권으로 여기며, 간증회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자들은 누구나 말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간증하는 말은 간단하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할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길게 간증하여 20-30분이나 되는 긴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경건의 정신을 상하게 하는 것이 없으며, 이것은 그 집회의 영적 감화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제 34 장
목사의 태도와 복장

목사는 강단 위에 설 때에 그의 태도와 행동, 어법, 복장 여하에 따라서 청중에게 좋은 감화를 주기도 하고 혹은 나쁜 감화를 주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예의와 태도를 세련되게 하며 높으신 부르심에 합당한 정숙한 위엄을 지녀야 한다. 그의 태도에는 근엄함과 경건한 위력이 있고 그 위에 온유와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조잡함과 야비함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용납할 수 없거든, 하물며 거룩한 사업에 어찌 이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목사의 태도는 전하는 진리와 일치해야 하며, 그가 말하는 모든 말은 진지하고 잘 선정된 것이어야 한다.
목사가 강단 위에서 배우와 같이 단순히 효과만을 위한 태도와 말을 하는 것은 전혀 용납될 수 없다. 목사는 배우가 아니요 진리의 교사이다. 경망하고 조잡스런 행동은 전하는 진리를 더욱 힘있게 하는 것이 아니요 반대로 정당한 견해와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한다.그리스도에게서 배운 목회자는 그 일의 영향이 영구히 지속될 중대한 사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사자임을 항상 자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이나 혹은 자신의 학식 또는 재능을 자랑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만 죄인들을 회개시키며 저들에게 말과 행실로써,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소개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는 말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친히 능력과 권세를 받은 것을 자각하고 말하며, 그의 설교는 열의와 열성이 있고 또한 설득력이 있어 죄인들로 그리스도 안에 안전히 피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의복도 크게 고려하여야 할 문제이다. 목사는 자기의 신분에 적합한 의복을 입어야 한다. 어떤 목사는 이 점에 실패한다. 어떤 경우에는 옷차림이 도무지 품위가 없고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장이 단정치 못하다.
그 손으로 세계를 움직이시며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주의 거룩한 직분을 이행하는 자들의 의복 때문에 영화를 받으시거나 혹은 수치를 당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 봉사에 대한 모든 일에 특별한 지시를 주셨으며, 그 때에 또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섬길 자의 의복을 특별히 지정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시기를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출 28:2)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의복과 태도는 그 모든 점에 있어서 보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예배의 신성함 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정결함에 대한 관념을 깊게 하였다.
제사장은 신을 신고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것은 신에 묻은 흙이나 먼지가 성소를 더럽힐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성전 안뜰에서 신을 벗었으며, 또 성막 안에서와 번제단에서 봉사하기 전에 손발을 반드시 씻어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는 반드시 모든 더러운 것을 제거해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의복에 주의하지 않는 목회자의 감화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며, 이런 목회자는 자기가 종사하고 있는 사업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고 일반 사업과 동일시하는 듯한 인상을 청중들에게 남겨 준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예모 있고 고상한 복장을 갖추어야 할 것은 가르치지 아니하고 자신이 타인들에게 의복에 태만하고 단정치 못한 모본을 보임으로 오히려 이를 속히 모방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이 그 태도와 복장으로 진리의 원칙과 그 직분의 신성함을 유감없이 드러내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들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모본을 보일 것이다.
* *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소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또 선택할 권한이 있다. 행동의 자유가 허락되었으므로,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은혜로 순종하는 생애를 보낼 수도 있고 혹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화를 자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거룩하고 영원한 진리를 받든지 거역하든지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나타내 보이시고, 사람은 진리를 받느냐 혹은 거역하느냐 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 짓고 있다. 그런즉, 매사에 후회할 것이 없도록 행동함이 매우 중요하며, 특히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대사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제 35 장
공중 기도

공중 앞에서 기도를 할 때에는 간결하고도 요령 있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긴 기도로써 예배 시간을 지루하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지루한 예배나 긴 기도를 강요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마 6:5)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 두고 흔히 밖을 출입하다가 그 시간이 되면 길거리나 시장이거나 또는 사람의 왕래가 심한 번잡한 거리이거나 간에 어느 곳이건 그가 있는 자리에 서서 큰소리로 형식적인 기도를 되풀이하곤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영예만을 구하기 위해서 드리는 이러한 예배를 예수님께서는 엄하게 꾸짖으셨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공중 기도를 반대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친히 제자들과 무리와 함께 기도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공중 기도는 반드시 짧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깊이 넣어 주셨다.
대개, 공중 기도는 몇 분 정도면 족하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지도하심을 받아 특별한 방법으로 기도할 때도 있다. 곧 마음이 심히 괴롭고 번민이 되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야곱과 같이 정신적으로 씨름을 하되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나타나기까지 그치지 않으려는 때가 있다. 이런 때에는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장황한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한다기보다는 하나님께 강연을 한다고 함이 옳겠다.
이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의 기도를 드림이 더 나을 것이다. 긴 기도는 듣는 자들을 피로케하며, 그 다음의 설교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
공중 기도를 길게 함은 대부분 은밀한 기도를 등한히 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한 주일 동안 그 의무에 등한히 한 것을 모아 가지고 그 태만한 죄를 용서받고 양심을 편안케 하려는 생각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흔히, 이런 기도는 다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저하시킨다.
목사는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반드시 은밀한 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교제하여야 한다. 그는 그 은밀한 방에서 하나님 앞에 그의 목마른 심령을 내어 놓고 은혜의 이슬을 받아 신선함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영혼들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자각하여, 회중 앞에 나오면 반드시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치 않고서는 무리들을 돌려보내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는 그 무리를 다시 만날 기회가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청중들을 감화시킬수 있는 힘있는 호소를 할 것이며, 따라서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에게 구변을 주며 때에 적당한 교훈을 힘있게 말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기도에 있어서의 경건
기도할 때에 마치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별다른 태도를 취하지 않고 보통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겸손한 표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을 필요치 않은 경우에 또는 경건치 않은 태도로써 기도 가운데 남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지극히 거룩하고 엄숙한 말이므로 반드시 경외심을 가지고 엄숙한 음조로 말하기 전에는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공중 집회에서든지 혹은 가족 예배나 또는 은밀한 방에서든지 간에, 어렵고 과장된 말로 기도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특히 공중 앞에서 기도드리는 자는 쉬운 말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이 다 그 말을 잘 이해하고 그 기도에 함께 연합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하늘에 상달하고 땅에서 응답되는 기도는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믿음의 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필요한 것을 아시며 우리가 빌기 전에 우리의 소원이 무엇임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의혹과 시련으로 더불어 고전 분투하는 영혼을 아시며 기도하는 자의 성실함을 아시므로, 그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고 애통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사 66:2)리라 하셨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하시므로 반드시 응답하실 것을 믿고 기도드리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단순하게 필요한 바를 주께 고하고, 두터운 믿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시기를 기다려, 회중으로 하여금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받는 방법을 배운 것을 깨닫게 할 것이다. 그리하면, 회중들도 분발하여 그 집회 가운데 주님께서 임하여 계심을 믿고 주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마음 문을 열어 놓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의 성실함을 더욱 신임하고 귀를 기울여 우리의 말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우리의 기도에는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여야 한다. 우리가 구주의 사랑을 더욱 깊게 또한 더욱 넓게 깨닫고자 하면, 반드시 더욱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감동적인 설교와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이제, 만물의 종말이 가까왔다. 우리가 만일 여호와를 전심으로 찾아야 할 것을 자각한다면 여호와를 찾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교사와 우리 교회에서 봉사하는 목사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 그리하면, 저희의 기도에는 열성이 충만하고, 그 구하는 바가 반드시 상달되고, 또 말씀을 힘있게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할 때의 태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에는 공중의 앞에서든지 혹은 은밀한 방에서든지 주님 앞에 무릎을 늘 꿇고 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의 모본이신 예수님께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눅 22:41)였으며 그분의 제자들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고 기록되었다(행 9:40; 20:36; 21:5). 바울은 말하기를,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엡 3:14, 15)라고 하였고,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려고 “무릎을 꿇”(스 9:5)었다. 다니엘은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단 6:10)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심은 하나님의 무한히 위대하심을 깨닫고 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인식함으로 생겨난다. 각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 곳에 임재하고 계심을 마음 속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는 하나님께서 그 곳에 임하여 계시므로 거룩하다. 또한, 태도가 경건하면 경외심이 더욱 깊어진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가리켜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 111:9)라고 하였고, 천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얼굴을 가리운다. 그런즉, 타락하고 죄 많은 우리 인간이 여호와의 이름을 말할때에 얼마나, 경건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취하여야 하겠는가!노소를 물론하고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임하여 계시는 곳을 어떻게 여겨야 할 것인지 아래의 성경 말씀을 신중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하셨다. 또 야곱은 천사가 사다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이상을 본 후에 큰 소리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6, 17)라고 하였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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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앞에서 길고도 설교적인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으실 뿐만 아니라 합당하지도 않다. 뜨거운 믿음으로 드리는 간단한 기도는 듣는 자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나, 기도가 길면 듣는 자가 지루하여 말 끝마다 이제나 그칠까 하고 초조히 기다리게 된다. 만일, 목사가 그의 믿음으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하신 약속을 굳게 붙잡을 때까지 은밀한 방에서 하나님과 기도의 씨름을 하면, 공중 앞에서 드리는 그의 기도에는 언제나 요령이 있을 것이며, 또 열성과 믿음으로써 자기와 듣는 자가 모두 은혜를 받도록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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