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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준비를 갖춘 무수한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이 일에 헌신해야 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꾼으로 부르심에 응하였으나, 그 수효는 더욱 증가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 교육자들은 이런 일꾼들에게 동정과 협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이 일꾼의 대오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의 지도 아래서 준비하는 청소년들을 격려하고 도와 주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이보다 더 큰 유익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분야의 사업은 없다. 전도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조력자이다. 그들은 천사들의 협력자들이요, 아니 그보다도 그들은 천사들이 사명을 완수하게 하는 사람의 통로인 것이다. 천사들은 그들의 소리를 통하여 말하고 그들의 손을 통하여 일한다. 그리하여, 일꾼들은 천사들과 협력함으로 그들의 교육과 경험에 유익을 얻는다. 교육의 방법으로서, 어떤 “대학의 과목”이 이와 필적할 수 있겠는가!
올바르게 훈련된 우리 청소년 일꾼의 군대가 준비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사셔서 멀지 않아 오실 구세주의 기별이 얼마나 속히 전세계에 전파될 것인가! 얼마나 속히 우리 자녀들에게 죄의 해와 고통을 가진 이세상의 소유 대신에 그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시 37:29),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사 33:24),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사 65:19) 라고 한 그 곳을 유업으로 받게 할 것인가!

제 8 장
조교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제 1 절
준 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아이의 첫번째 교사는 어머니이다. 가장 감수성이 강하고 가장 빨리 성장하는 시기의 교육은 대부분 어머니의 손에 맡겨진다.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그 아이의 품성을 선악간에 꼴 짓는 기회가 주어진다. 어머니는 이 기회의 가치를 이해하고, 다른 어떤 교사보다도 이 기회를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도록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교육처럼 경시되고 있는 것도 없다. 어머니는 아이의 교육상 가장 유력하고 광범위한 감화력을 가진 사람인데도, 그 어머니를 도와 주는 조직적 뒷받침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어린아이의 보호를 맡은 사람들이 그 아이의 육체적 요구에 대하여 무지한 경우가 너무 많다. 그들은 건강 법칙과 발육의 원칙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아이의 지적 영적 성장을 돌보는 일에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혹, 그들은 사무를 처리하고 사교계에서 각광을 받는 일에는 적격자일는지 모른다. 또는, 문학이나 과학에는 훌륭한 학식을 가졌을는지도 모르지만, 아이를 교육하는 데는 거의 지식이 없다. 인류의 대부분이 유년시절에 죽거나, 성인이 되어서도 무거운 부담 속에서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많은 것은, 주로 이 방면의 지식이 부족하여, 특히 유년 시절의 신체 발육을 등한히 했기 때문인 것이다.
아이의 유년 시절은 물론 후년의 교육도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부모는 이를 위하여 주의 깊고 용의 주도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 각자가 아버지나 어머니의 책임을 지고자 하기 전에 남녀의 신체 발육 법칙, 즉 생리, 건강법, 태교(胎敎)와 유전 법칙, 위생, 의복, 운동, 질병의 치료 등에 대하여 알아야 하며, 또한 지적 발달과 도덕적 훈련 법칙에 대해서도 지식이 있어야 한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교육 활동을 중시하시고, 장차 어머니가 될 사람에게 당신의 사자를 보내셔서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삿 13:12)라는 질문에 대답하게 하시고, 허락하신 자녀의 교육에 대한 지시를 그 아버지에게도 주셨다.
부모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않고 그 거룩한 책임을 위하여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교육으로 달성되어야 할 모든 것들은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사에게 예비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되면서도, 어떤 준비를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청소년 교육에 따르는 책임을 인식할 때, 교사는 과학이나 문학 방면을 가르치는 데에만 만족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교사는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그는 힘뿐만 아니라 마음의 넓이를 가지고, 온 정신과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사람의 마음을 만드시고 그 법칙을 제정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요구를
완전히 이해하고 발달을 유도하실 수 있다. 그분께서 주신 교육의 원칙은 유일하고 안전한 지침이다. 이 원칙들을 깨닫고 받아들여서 자신의 일생을 주관하게 하는 것이 모든 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인 것이다.
실지 생활의 경험은 필수 불가결한 요건이다. 규율, 용의 주도, 시간 엄수, 자제심, 명랑함, 평정한 성향, 희생심, 청렴, 예의 바름 등은 다 자격으로 갖추어야 할 사항들이다.
청소년들 주위에는 저열한 성품을 가진 자들과 허위가 매우 많으므로, 교사는 항상 말과 태도와 동작에 고상하고 진실한 품성을 나타내야 한다. 어린이들은 하는 체하는 것이나 어떤 약점이나 결점을 재빨리 눈치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는 원칙을 자신의 품성에 먼저 나타내는 것만이 그들에게서 존경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가 학생들과 날마다의 교제에서 이를 실행한다면, 그들에게 영속적인 좋은 감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교사로서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자격들 중에, 체력은 그 비중이 매우 크다. 건강이 좋으면 좋을수록 그의 일은 더 잘 될 것이다.
교사는 여러 가지 책임으로 매우 피로하게 되므로, 활력과 청신한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요구된다. 흔히, 교사는 심신이 피곤해져서 급기야 의욕을 잃어 가고 냉정해지고 조급해짐을 거의 면하기 어렵다. 이런 기분에 저항하며 그 원인을 피하는 것이 교사의 의무이다. 그는 순결하고 부드럽고 믿을 만하고 동정적인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교사가 언제나 견실하고 침착하고 쾌활하려면 두뇌와 신경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사의 업무란 양(量)보다도 질(質)이 중요한 것이므로, 과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한다든지, 자기의 본업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책임을 맡는다든지, 원기를 회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소모하는 오락이나 사교적 환락에 빠지는 일들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실외의 운동, 특히 유용한 노동은 심신의 휴양에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서, 교사가 모본을 보이면 학생들은 노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교사는 각 방면에서 건강 원칙을 주의 깊게 준수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모본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음식, 의복, 노동, 휴양 등 모든 일에서 절제를 지켜야 한다.
건강한 육체와 올바른 품성에 높은 학문적 소양이 결합되어야 한다. 교사가 참된 지식을 많이 가질수록 그의 일은 더욱 잘 될 것이다. 교실은 표면적으로 일을 하는 곳이 아니다. 천박한 지식에 만족하는 교사는 높은 수준의 능력에도 달할 수 없다.
교사의 가치는 실지로 가진 지식의 분량보다도 오히려 그가 목표하는 기준 여하에 달렸다. 참된 교사는 둔한 사고나 게으른 마음이나 되는 대로 하는 기억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적으로 더 높은 학문과 더 좋은 방법을 구한다. 그의 생애는 언제나 향상되고 있다. 이런 교사가 하는 일에는 신선한 생기를 주는 능력이 있어서, 학생들을 깨우치고 고무하는 것이다.교사는 교육에 적합한 소질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교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지혜와 기지를 가져야 한다.
어떤 과학적 지식을 가졌더라도, 또는 다른 방면에서 아무리 훌륭한 자격을 가졌더라도, 교사가 학생의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없다면, 그 노력은 헛된 것이다.
교사는 선을 행할 모든 기회를 신속하게 식별해서 활용하고, 열성과 참된 품격이 결합되어 자제할 수 있고, “가르치기를 잘하며”, 사상을 고취시키고 활력을 일으키며, 용기와 생명을 나눠 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교사는 교육 받을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하여 이상적인 높은 학문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사람의 성격을 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를 활용할 결심을 가지며, 열심히 또 인내성 있게 자원하여 일할 마음을 가진다면, 그는 학생들의 요구를 이해하고, 동정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으로 그들을 고무하여 자기가 인도하려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교사의 지도 아래 모여드는 청소년들은 각각 성질, 습관, 훈련 등이 전혀 다른 개체들이다. 개중에는 일정한 목적이나 고정된 사상을 갖지 않은 학생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과 가능성을 자각해야 한다. 가정에서 올바르게 훈육을 받은 아이는 드물다. 어떤 아이들은 가족들에게서 총애를 받아 왔다. 그들이 받아 온 훈련은 피상적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기호를 따르고 책임과 의무를 피하는 것이 용납되었으므로, 굳은 마음, 인내성, 극기 등에 결함이 있다. 이런 학생들은 모든 훈련을 불필요한 속박으로 여긴다. 그 중에는 견책을 받고 낙심하는 학생도 있다. 독단적인 속박과 엄격함은 그들의 완고함과 반항심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만일, 이런 기형의 인격들이 고쳐져서 새로 형성되어야 할 것이라면, 그 일은 대개 교사가 해야 한다. 이 일을 잘 수행하려면, 교사는 학생들의 결점과 잘못의 원인을 알아낼 만한 통찰력과 이해심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교사는 또한 기지와 숙련, 인내와 견고한 의지로 모든 학생들의 요구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우유 부단하고 안일에 빠진 학생에게는 격려와 도움으로 노력을 자극하고, 낙심한 학생에게는 동정과 이해를 보여 주어, 자신감을 갖고 노력하도록 고무하여야 한다.
교사들은 학생들과 충분한 교제를 갖지 못하는 수가 많다. 교사는 동정심과 온유함을 너무 적게 나타내면서, 위엄을 가지고 엄격한 판단을 하는 수가 너무 많다. 교사는 확고하고 결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강제적이라든지 독재적이어서는 안 된다. 가혹하고 비판적이며 너무 학생들과 거리를 둔다거나 냉담하게 대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좋은 감화를 끼칠 길을 막는 일이다.
어떤 사정이 있어도, 교사는 편견적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애교 있고 매력 있는 학생은 사랑하면서, 정작 격려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에게는 비판적으로, 참을성 없이, 또는 인정머리 없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자신이 교육에 대하여 전혀 오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결점이 많은 학생을 대하는 중에 교사의 인격은 시험을 받고, 그가 그 자리에 있을 만한가의 자격 유무를 나타낸다.
* * 인간의 심령을 인도하는 자의 책임은 중대한 것이다. 신실한 부모는 어버이로서의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자녀의 생활에는 아주 어릴 때부터 최후의 날까지 그 마음과 부모의 마음을 붙들어 매는 일종의 줄이 있으므로 부모의 행동, 말, 용모 등은 자녀에게 계속적으로 선악간의 꼴을 지어 주는 것이다.
교사는 이 책임을 나눠 지는 자로서 언제나 그 거룩한 책임을 인식하고, 교육의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사는 일상의 의무를 수행하고 자기의 고용주를 기쁘게 하며, 학교의 명예를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학생 각 개인의 최고 유익, 그들이 지게 될 인생의 의무, 필요한 봉사와 해야 할 준비 등을 배려해야 한다. 교사가 날마다 하는 일은 그의 학생들에게, 또한 그 학생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그 영향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넓고 깊게 파급될 것이다. 모든 말과 행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그 큰 날에, 교사는 반드시 자기가 한 일의 결과를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교사가 이 일을 깨닫는다면, 하루의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이 자기의 보호로부터 떠날 때에도 자기 일을 끝냈다는 느낌은 갖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들 청소년 곁을 떠나지 않는다.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성공을 위한 가장 고상한 표준에 도달하게 하는 방법은 교사의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인 것이다.
교사가 자신의 의무와 특권을 인식한다면 진보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할 것이며, 그 길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가장 우수한 표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이라도 아끼지 않을 것이며, 학생들이 장차 되고자 하는 표준들에 교사 자신이 먼저 도달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 * 교사로서 책임감이 강할수록, 자기 자신의 진보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할수록 자신의 결점들이 더욱 많이 보여지게 되어, 그는 아프게 후회하곤 한다.
교육의 중대성과, 그 곤란한 문제들과 그 가능성들을 볼 때에, 교사는 그 마음으로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하고 자주 부르짖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교사들이여, 힘과 지도에 대한 필요-사람에게서는 공급받을 수 없는 필요를 느낀다면, 나는 위대하신 모사인 히나님의 허락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 3:8)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렘 33:3),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대들의 사업을 위한 최고의 준비 사항으로, 나는 크신 교사 예수님의 말씀과 생활과 방법을 제시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에 그대들의 참된 이상이 있다. 거룩하신 교사 예수님의 영이 그대들의 마음과 생애를 소유할 때까지 이 이상을 주목하고 마음에 두라.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학생들을 인도하는 데에 갖게 될 우리 힘의 비결이다. 예수님을 반영하라.
제 2 절
협 력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 4:25)

사람의 품성을 형성하는 데에 가정의 감화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없다. 교사는 부모의 일을 도울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 어린이들의 복리를 위한 모든 일에 교사와 부모는 협력해야 한다.
협력하는 일은 우선 가정에서 부모 자신들 사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부모는 자녀 교육에 공동 책임을 가지고 행동을 같이하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 부모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서로를 붙들어 주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자녀들이 하나님과 원칙에 신실하게 하여 그들 자신에게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신실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교육된 어린이들은 학교에 가도 소란이나 문제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교사에게 도움을 주고 다른 학생들의 모본과 격려가 될 것이다.
자녀를 이렇게 교육하는 부모는 교사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책임을 진 교사들을 할 수 있는 대로 지지하고 존경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도 유익하고 학교의 요구에도 정당하게 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많은 부모들이 실패한다. 부모들의 경솔하고 근거 없는 비판으로 인해, 충실하고 희생적인 교사의 감화력이 거의 소멸되는 수가 많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마음대로 하도록 조장시켜 놓고, 자신들이 소홀히 했던 점을 교정하는 어려운 일은 교사에게 맡겨 버린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자신의 행위로 교사의 일을 거의 절망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학교에 대한 부모의 비판과 비난은 아이들의 불복종을 조장하고 나쁜 습관을 굳어지게 한다.
만일, 교사가 하는 일에 비판이나 충고를 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개인적으로 해야 한다. 그것이 효과가 없으면, 학교 운영 책임자에게 그 사정을 문의한다. 아이들의 복리에 큰 책임을 진 교사에 대하여 아이들의 존경심을 약하게 하는 언행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아이의 품성이나 특이한 체질, 허약한 점 등에 대한 부모의 정확한 지식을 교사에게 가르쳐 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부모들이 이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많은 부모들은 교사의 능력을 알아본다든지 교사에게 협력하는 일 등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부모가 교사를 별로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교사가 부모를 알려고 하는 노력은 더욱 필요하다. 교사는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해서, 그들의 환경과 그 영향에 대한 것을 알아보아야 한다. 학생들의 가정과 생활을 직접 접해 봄으로, 교사는 학생과의 유대감을 튼튼히 할 수 있고, 학생들의 다양한 성격들을 잘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교사가 가정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 일석 이조의 효과가 날 것이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자녀들의 생활에 좋은 감화를 줄 기회를 잃고 있다. 교사는 이런 부모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무와 특권에 대하여 각성케 할 수가 있다. 교사는 또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자녀들을 훌륭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매우 고심하는 부모들도 만날 것이다. 교사는 이런 부모들을 도울 수 있으며, 서로 충고함으로 같이 격려를 받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청소년들의 가정 교육에 있어서, 협력의 원칙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그 가치가 크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들이 가정이라는 견실한 단체의 일원이라는 관념을 갖게 해야 한다. 작은 아이일지라도 일상적인 일을 돕도록 훈련시키고, 부모는 그 도움을 필요로 하며 또 그 도움에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나이가 든 아이들은 부모의 조수가 되어야 하고, 의논에 참여하며 그 책임과 짐을 분담해야 한다. 부모들이 시간을 들여 자녀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신뢰와 참여를 기뻐한다는 것을 보여 주면, 아이들은 신속히 반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모의 부담은 가벼워지고, 아이들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실질적 훈련을 받게 될 뿐 아니라, 가족들의 유대감도 튼튼해지고 품성의 기초도 깊어질 것이다.협력은 교실 안의 정신이 되고 학교 생활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의 협력을 얻는 교사는 질서를 유지하는 데 말할 수 없는 도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예배 시간에도 교실에서 마음이 들떠 소란하게 굴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은 교사와 협력하는 중에 그 과도한 정열을 유용하게 쏟을 길을 찾을 것이다. 연장자는 연소자를,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도와 주게 하라. 그리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한,
자기가 남보다 우수한 일을 하도록 시키라. 이것이 자부심을 갖게 하고, 유익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게 할 것이다.
* *
성경이 가르치는 협력에 대하여 배우는 것은 자녀들이나 부모, 교사에게 유익한 일이다. 그 많은 실례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성막의 건설-품성을 건설하는 데 대한 실물 교훈인데, 여기에 백성들은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출 35:21) 협력하였다. 예루살렘 성이 돌아온 포로들에 의해 빈궁과 곤란과 위험 중에서도 재건되고, 그 큰 사업이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느 4:6)함으로 잘 완성되었던 사실을 보라. 예수님께서 이적으로 많은 군중을 먹이신 때에 제자들이 감당한 역할을 생각하라. 음식은 그리스도의 손에서 불어났으나, 제자들은 그 떡을 받아다가 기다리는 무리들에게나 누어 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 4:25). 그러므로, 각 사람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벧전 4:10)해야 한다.
옛날,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을, 오늘날 품성을 건설하는 자들은 더욱 가치 있는 표어로 받아들이자.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담대하라”(사 41:6).
제 3 절
훈 련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아이가 먼저 배워야 할 한 가지는 순종의 공과이다. 아이가 충분히 도리를 분별할 만큼 나이를 먹기 전에도 순종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는 노력으로 이 습관이 굳어지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가 자라나서 권위와의 충돌로 인해 생기게 되는 부모와 교사에 대한 많은 거리감과 분노, 또는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일체의 권위에 반항하는 일 등은 대체로 방지될 것이다.
훈련의 목적은 아이가 자신을 관리할 수 있도록 훈도하는 데 있다. 아이는 독립심과 자제력을 배워야 한다. 아이가 사물을 이해하게 되면, 즉시 그 이성을 순종의 편으로 가담하게 한다. 아이를 대하는 모든 태도에서, 순종하는 것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도록 한다. 모든 사물은 규칙아래 있고, 그 규칙을 순종치 아니하면 결국은 불행과 고난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아이들이 깨닫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실 때에는 우리를 손해와 실패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사랑으로 불복종의 결과를 경고하시는 것이다.부모와 교사는 하나님의 대표자이며 그들이 하나님과 일치하는 행동을 보이면서 가정과 학교의 규칙은 바로 하나님의 규칙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이 깨닫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부모와 교사에게 순종하듯이 부모와 교사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교사와 부모들은 아이들의 발달이 부당한 간섭으로 인해 방해 받지 않도록 지도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너무 간섭하는 것은 방임하는 것과 같이 유해한 것이다. 아이의 “의지를 억압”하려는 것은 무서운 잘못이다. 사람의 마음은 각각 다르게 되어 있다. 혹 강제로 표면적인 복종은 시킬 수 있을지라도, 그 결과는 아이들의 반항심을 더욱 거세게 하는 것이다. 설령 부모나 교사가 아이를 자기의 의사대로 만들 수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가 아이에게 유해하다는 점에는 다름이 없다. 지혜가 생길 나이에 이른 사람을 훈련하는 일은 말을 못하는 동물을 훈련하는 것과 달라야 한다. 동물은 오로지 그 주인에게 순종하는 일만을 배운다. 동물에게 있어서는 그 주인이 마음이요 판단력이요 의사인 것이다. 어떤 때에는 이 방식을 아이들의 훈련에 사용하는데, 이렇게 되면 아이는 기계 인형과 다름이 없게 된다. 사고, 양심, 의지 등은 다른 사람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라도 이렇게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사람의 개성을 약화시키거나 소멸시키는 자는 그 결과적인 불행을 책임져야 한다. 권위 아래 있을 때에 아이들은 마치 잘 훈련된 병정들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섭만 그치면 힘과 견고한 의지가 부족한 성품이 드러나고 만다. 자제력을 배운 적이 없는 청소년들은 부모나 교사의 간섭 이외에는 어떤 속박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부모나 교사의 간섭이 없게 되면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방종에 흘러, 필경에는 몸을 망치는 일이 허다하다.학생에 따라서는 다른 학생보다 의지가 약한 경우도 있으므로. 교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순종하기 쉬운 요구를 해야 한다.
의지는 지도하여 길러 주어야 하는 것으로서, 이를 무시하거나 굴복시킬 것이 아니다. 의지의 힘을 저축하도록 한다. 그것이 인생의 싸움에 필요한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참된 의지력을 이해해야 한다. 이 선물에 포함된 책임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야 한다. 의지는 사람의 성질에 있어서 지배하는 힘이요, 결정하고 선택하는 능력이다. 이성을 가진 사람은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경험에서 “너희 섬길자를 오늘날 택하라”(수 24:15)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람은 하나님 의지의 편에 자기의 의지를 순종 시킬 수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힘에 결합시켜, 어떤 경우에라도 악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모든 청년과 아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실한 품성을 형성하고 유익한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가르침으로 아이들의 자제력을 훈련시키는 부모와 교사는 가장 유용하고 항구적인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표면만을 보는 사람은 그 일을 최상의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또 아이의 마음과 의지를 절대적인 권위 아래 눌려 있게 하는 것처럼 당장에 높이 평가 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그 우수한 교육법의 성과는 후일에 가서 나타날 것이다.현명한 교육자는 학생들을 대할 때 신뢰감과 명예심을 나타내는 일에 노력해야 한다. 신뢰받고 있다는 느낌은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아이들일지라도 대부분은 높은 명예심을 갖고 있고, 신뢰와 존경을 받고 싶어한다. 이것은 또한 그들의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들어가거나 나가거나 언제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지 말라. 미심쩍게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의 기를 꺾고, 도리어 방어하려는 해악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무슨 나쁜 짓을 하지 않았나 하고 언제나 감시하는 대신, 교사는 학생들과 접촉하여, 그들이 멋모르고 저지른 행동들을 분별하여 더 이상 나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잘 계몽해야 한다. 청소년들은 자신이 신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면 대개는 자기가 그 신뢰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와 같은 원칙으로, 명령하는 것보다는 부탁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부탁받은 학생은 자신이 올바른 원칙에 충실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의 순종은 강제적인 것이 아닌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교실을 관리하는 규칙은 되도록이면 학교 전체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라야 한다. 거기에서 행하는 모든 원칙은 학생들 앞에서 그 공정성을 확신케 한 연후에 시행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학생들은 자기들이 협력하여 만든 규칙들이 준수되는 여부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규칙은 수효를 적게 하고 심사 숙고한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한번 결정된 것은 그대로 이행하여야 한다. 변경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 사람의 마음은 이를 승인하고 순응하게 되지만, 자행 자지(自行自止)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지면 요구하고 희망하고 반신 반의하는 마음을 품어 불온과 조급성과 불복종의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하나님의 통치에는 악과의 타협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야 한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불복종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아이의 행복을 원하는 부모나 교사는, 아이들이 권위를 무시하고 순종치 않으려고 핑계를 대고 교활한 수단으로 고집스런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려는 것에 타협해서는 안 된다. 나쁜 행위를 좋게 취급하거나, 비위를 맞추거나, 물건을 가지고 마음을 사서 말을 듣도록 하거나, 교환 조건을 수락하는 일 등은 사랑이 아니라 감상이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잠 14:9)긴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죄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죄가 사람에게 끼치는 힘은 무서운 것이다.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잠 5:22). 아이들이 나쁜 습관에 사로잡히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그들에게 최악의 해를 끼치는 것이다.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유를 원한다. 이 측량할 수 없이 큰 축복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데서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해하여야 한다. 율법이야말로 참된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이 타락하고 쾌락의 노예가 되는 것을 지적해 내어 이를 금하고, 율법을 좇는 자를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
시인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시 119:45, 24)라고 하였다.
악을 시정하는 데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허물을 찾거나 견책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견책으로 시정하려 하면 올바르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나빠지게 된다. 사람들, 특히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들에게 무정하게 비판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본인의 노력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 시들게 하는 바람 앞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어떤 특별한 결점으로 견책만 받은 아이는 그 결점을 아무리 노력해도 고칠 수 없는 고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리하여, 그 실망과 낙담을 흔히 무관심과 대담한 척하는 허세로 감추려고 한다.책망의 참된 목적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기의 과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시정하려는 의사를 가질 때라야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이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에는, 용서와 능력의 근원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본인에게 자존심을 갖게 하고, 용기와 희망을 북돋울 것이다.
이 일은 사람에게 맡겨진 가장 훌륭하고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 일에는 탁월하고 교묘한 지혜와 섬세한 감수성, 인간성에 대한 지식과 하늘이 주는 믿음과 인내, 또한 자원하여 일하고 주목하며 기다려야 할 것 등이 요구된다. 이 일이야말로 어떤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일인 것이다.
남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아이나 청년들을 감정적으로 대하면 분노를 일으킬 뿐이다. 부모나 교사들이 참을 수 없어 지혜롭지 못한 말이 입에서 나갈 위험이 있을 때에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다. 침묵에는 기이한 능력이 있다.
교사는 냉정한 마음이나 고집스러운 성질을 가진 학생들을 만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을 대하는 중에, 교사는 자기 자신도 옛적에는 훈련을 필요로 하는 아이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령이나 교육이나 경험에 있어서 더 높은 위치에 있는 현재에도 흔히 잘못을 저지르고, 자비와 관용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청소년들을 훈련시킬 때, 교사는 그 학생들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악으로 향하는 경향을 가진 인간들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은 무엇이든지를 다 배워야 할 아이들로서, 그 중에는 어떤 것에 대하여는 특별히 깨우치기를 힘들어 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잘하지 못하는 학생을 교사는 참을성 있게 지도해야 하며, 더디 아는 것을 책망하지 말고 항상 격려해 주어야 한다.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인 학생에게는 매우 유순하게 대해야 한다. 교사는 자기 자신도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곤란과 싸우고 있는 학생에게 끊임없는 동정심과 인내를 보여 주어야 한다.“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청소년들의 교육에 책임 있는 사람들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하나님 가족의 어린이들이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은혜를 이을 자들이다. 아무리 머리가 둔하고 나이가 어리고 매일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법칙은 신성히 준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법칙을 아는 교사는 되도록이면 학생의 과실과 결점을 공개하는 일을 피할 것이다. 교사는 다른 학생들 앞에서 견책이나 처벌을 하지 말아야 하며, 학생이 개심하도록 자기의 모든 노력을 다할 때까지는 그를 퇴학시켜야 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학생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는 동시에 권위에 반항하고 이를 무시하며 학교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의 영향이 다른 학생들에게까지 오염되는 것이 분명할 때에는 퇴학 처분도 필요하다. 불명예스러운 퇴학 처분이 공개됨으로 완전히 자포 자기가 되어 파멸에 이르는 학생이 많이 있다. 부득이 제명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라도, 대개는 이를 공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부모와 의논하고 협력하여, 교사가 개인적으로 학생의 퇴학을 취급하도록 해야 한다.청년들에게 특별히 위험한 이 시대의 유혹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이 유혹의 조류에 흘러 떠내려가기는 쉬우나, 거슬러 올라가기에는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유혹에 시험 당하는 모든 청소년들을 위하여 학교는 “도피성”이 되어야 하며, 이곳에서 그들의 우둔한 행위는 참을성 있고 현명하게 취급되어져야 한다. 책임을 자각하는 교사라면 제멋대로이고 불순종하는 학생들을 잘 지도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나 그들 마음과 생활에서 끊어 버려야 한다. 사랑과 친절, 인내와 자제는 언제나 이런 교사의 언행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정의는 자비와 긍휼을 포함한다.
견책이 필요할 때에는, 말을 너무 크게 하지 말고 낮은 목소리로 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부드럽게 그 잘못한 점을 보여 주고, 개심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참된 교사는, 실수할 바에는 차라리 가혹한 쪽보다는 자비를 베푸는 쪽에서 실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야 한다.
개심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청소년들의 마음은 표면에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완고하지는 않다. 절망적인 사람도 현명한 훈육으로 개심되는 수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친절한 대접 앞에서 가장 빨리 마음이 녹는다. 교사는 유혹당하고 있는 학생에게서 신뢰를 얻도록 하고, 그 학생의 미점(美點)을 인정해 주어 발달시킴으로 학생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교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늘로부터 오신 교사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죄과를 모두 참으신다. 그분의 사랑은 냉각되지 않고, 그들을 구하려는 그분의 노력은 중단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과실을 범한 자, 반항하는 자, 심지어는 배교한 자에게까지도 몇 번이라도 다시 받아들이시기 위하여 손을 펴고 기다리신다. 그 분께서는 난폭한 취급을 받고 있는 무력한 아이를 보시고 마음 상해 하신다. 고통받고 있는 인간들의 부르짖음은 그분의 귀에 결코 헛되이 울리지 않는다. 그분의 눈에는 누구나가 다 소중하지만, 난폭하고 우울하고 고집스러운 아이는 더욱 예수님의 사랑과 동정심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대개, 예수님께서는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찾아보신다. 가장 유혹에 빠지기 쉽고 가장 과실을 범하기 쉬운 자일수록 그분의 강한 염려의 대상이 된다.부모와 교사들은, 고민하고 고통받고 시험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신 예수님의 속성을 품어야 한다.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히 5:2).
예수님께서 우리를 과분하게 대접하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남을 잘 대접해야 한다. 부모든 교사든 예수님께서 쓰신 것과 같지 않은 방법을 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생애의 훈련
사람은 누구나 가정이나 학교에서 받는 훈련 이외에도 생애의 엄격한 훈련에 당면하게 된다. 청소년들이 명백히 배워야 할 공과는 이것에 현명히 대처하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일하고 계신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율법을 항상 지켜 왔다면 고난이라는 것을 결코 모르고 지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결과로 인해 인간의 생애에 고난과 번민과 무거운 짐이 지워진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런 번뇌와 무거운 짐에 용감히 대처하도록 가르쳐 줌으로 그들의 일생에 유익을 끼쳐 줄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동정해야 하지만, 아이들이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하고 고무시키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 세상이 연병장이 아니고 싸움터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훌륭한 군인처럼 어려움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장부같이 강건하고 침착해야 한다. 세상의 인정이나 보상을 받지 않을지라도 자원하여 책임을 지고, 난관을 헤쳐 나가고, 해야 할 일을 하는 데에서 품성의 참된 가치를 찾을 수 있음을 청년들이 배우게 한다.시련에 대처하는 옳은 길은 거기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 때는 물론이요 장성한 후에도 모든 훈련에 적용된다. 아이의 유년 시절의 교육을 게을리한 결과로 나쁜 경향이 굳어지면 후년의 교육은 더욱 곤란하고 훈련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타고난 욕망과 경향을 말살하는 일은 하등한 본성에 고통이 아닐 수 없으나, 이 고통은 더욱 높은 기쁨 가운데서 잊어버려야 한다.
모든 과실, 모든 결점, 모든 곤란을 정복할 때마다, 그것은 더욱 좋고 더욱 높은 일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보람있는 일생을 보낸 많은 사람들이 이룩한 성공은 다 이런 경험을 통하여 된 것이다.

“위인이 도달하여 보존하는 높이는
단걸음에 달한 것이 아니니
동무들이 자는 동안에 저희는 꾸준히
수고하여 발길을 위로 달림이라

정복하여 발 아래 둔 모든 일로,
습득한 좋고 유익한 일들로,
교만을 물리치고 정욕을 죽임으로,
또한 시시로 오는 모든 악을 정복함으로 우리는 서리라

일시에 생기고 끝마치는
일상사, 평범한 일들이,
환희와 불만이,
모두 다 우리가 오를 계단이라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이기적인 욕망과 본능을 부인함으로, 가치 없는 일시적인 것과 귀중하고 영구적인 것을 바꾸어 받는 것이다. 이것은 희생이 아니고 굉장한 이익이다.“더 좋은 것”이란 교육의 표어로서, 모든 참된 생활 방법의 원칙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당신께서 그 대신에 더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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