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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하였다.
바울은 그가 행한 수고의 보수로 장래의 기쁨을 기대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굴욕을 문제삼지 않으신 것과 같은 기쁨, 곧 자기의 수고의 결실을 내다보는 기쁨이었다. 그는 데살로니가의 신자들에게 이와 같이 편지 하였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 20).
바울의 필생의 사업이 세상에 끼친 결과를 어느 누가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괴로움을 덜어 주고 슬픔을 위로하며, 악을 물리치고, 이기주의와 육욕을 버리고 고상한 생활을 하게 하며, 또 영생에 대한 희망으로 생애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모든 선한 감화 중에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가지고 아시아에서 유럽의 남부 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쏟은 숨은 노고에서 비롯된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복된 감화를 사람들에게 끼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생애인가? 그리고, 이런 평생 사업의 결과를 영원한 나라에서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또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제 3 장
크신 교사 예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제 1 절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교사

“예수를 … 생각하라”(히 12:2, 3)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하나님께서는 한 교사를 보내심으로 하늘의 가장 좋고 가장 큰 것을 사람에게 주셨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함께 앉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지성소에 계시던 분이 인간이 되셔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인류에게 나타내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다.
우리의 타락한 세계를 비추는, 하늘로부터 온 모든 빛은 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것이었다.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인류에게 선포한 모든 일꾼들에게 말씀하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셨다.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상한 사람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모든 훌륭한 미덕은 다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요셉의 순결과 덕행, 모세의 믿음과 유순과 인내, 엘리사의 확고 부동함, 다니엘의 고결함과 견고함, 바울의 열심과 자기희생,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비롯하여, 일찍이 이 세상에 생존했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지적·영적 능력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부터 나오는 빛줄기에 불과했다. 완전한 이상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 왔다.
이 이상을 사람이 도달해야 할 유일 무이의 참된 표준으로 나타내기 위해, 다시 말해 사람이 각각 어떤 인물이 될 수 있는지,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사람이 신성이 내재한 인성의 삶을 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 또 이 땅에서 어떻게 원칙들을 실천하고 하늘의 생애를 살아야 하는지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최대의 선물은 인간의 최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주어졌다. 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암흑이 가장 깊었을 때에 나타나셨다.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 있었다. 세상의 교육 제도 아래에서는 인간의 철학이 하늘의 계시를 대신하였다. 사람들은 하늘이 준 진리의 표준을 거부하고 스스로 만들어 낸 표준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서 스스로 붙인 불꽃 가운데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능력만을 의지하였으므로, 그들의 힘은 연약할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표준에도 도달할 수가 없었다. 참된 미덕의 부족이 외관과 헛말에 의해 보충되었다. 가식이 본질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때때로,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분을 지적해 주는 교사들이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바른 원칙들이 제시되었으며, 사람들의 생애가 그 능력을 실증해 주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지속적인 감명을 주지 못하였다. 죄악의 흐름을 일시 정지시켰을 뿐, 그 타락의 진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개혁자들은 암흑을 비추는 빛처럼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그 암흑을 몰아내지는 못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요 3:19)었다.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때는 인간성이 밑바닥에까지 다다르려는 순간이었다. 사회의 기반이 위태롭게 되었고, 생활은 허위와 허식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가지지 못했던 유대인들은 마음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파멸시키는 관습과 공론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가 사람이 만들어 낸 의식의 반복적인 진행으로 인해 결국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고 있었다. 전세계에 걸쳐, 모든 종교 제도가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이끄는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전설과 거짓말에 싫증이 난 나머지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 불신과 유물론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영생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현세만을 위하여 살고 있었다.
하나님을 인정치 않게 되자, 그들은 인류에 대한 관심도 없어졌다. 진실, 존경, 성실, 신뢰, 동정심 같은 것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심한 탐욕과 불타는 야심은 온 세상에 불신을 낳게 했다. 책임감, 약자에 대한 강자의 의무,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관념이 무슨 꿈 이야기나 전설처럼 외면당했다. 일반 민중은 짐을 나르는 짐승이나 야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 또는 징검다리처럼 취급되었다. 부와 권력, 안일과 방종이 최고의 행복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체력의 저하, 지능의 퇴화, 영성의 사멸 등이 시대적 특징으로 나타났다.사람들의 악한 정욕과 목적은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게 했으며, 급기야는 그분을 완전히 잊어버림으로 더욱 대담한 악을 행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죄를 선호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마치 그들 자신과 같은 속성을 가진 존재로 파악했다. 이러한 생각은 죄의 힘을 더욱 강화시켰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해석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과 같은 분으로 알았다. 다시 말해, 그분도 자신을 찬양할 목적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요구를 하시며, 또 그 이기적인 목적에 도움이 되는 자는 취하고 방해가 되는 자는 버리는 분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층 계급에 속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억압자들과 똑같으나 다만 그 능력에 있어서 억압자들보다 더 강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념을 기초로 각종의 종교 형태가 형성되었다. 그것들은 모두 강제와 착취의 제도였다. 예배자들은 그들이 목적하는 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확보하기 위해 예물과 의식으로 그분과 화친하려고 하였다. 마음과 양심에 아무런 감화도 끼칠 수 없는 그런 종교는 형식의 연속에 불과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금방 싫증이 나서, 거기에서 무슨 이익이라도 얻게 되는 것이 아닌 한 그것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악은 억제할 수 없을 만큼 성하였고, 반면에 선한 것에 대한 인식과 욕구는 점점 희박해져 갔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으며, 그들을 지배하는 악마의 힘에 감명 받았다. 전세계가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었다.
이제 인류에게는 한 가지 희망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 불화와 타락의 덩어리 속에 새 누룩을 넣는 것, 다시 말해 새 생명의 힘을 회복시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시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식을 다시 가지게 하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아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그릇된 교훈에 빠져 있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오셨다. 또, 당신의 율법의 성격을 밝힘과 동시에 당신의 품성을 통해 성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이려고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축적해 두셨던 영원한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곡해하도록 만든 모든 부당한 요구들을 일소하시면서 그 율법이 사랑의 율법, 곧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임을 강조하셨다. 그분은 이 율법의 원칙들을 순종할 때 인류는 행복을 누리게 되고, 동시에 그 사회도 안정을 가져 오게 된다고 말씀하셨다.하나님의 율법은 독단적인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것은 인류를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와 방벽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 율법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악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에는 사람에 대한 충성심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율법은 모든 인생들의 권리와 개성을 지켜 준다. 그것은 위에 있는 자가 압제하거나 아래에 있는 자가 불복종할 때 이를 방지한다. 그것은 현세에서는 물론 내세에서도 사람의 행복을 보증한다. 율법은 그것을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한다. 왜냐하면, 대개 그것은 영원히 존속될 원칙들을 나타내 보이는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원칙이 사람의 마음을 개심시키는 데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 줌으로써 그 가치를 실제로 증거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또한 이 원칙들을 전개시키고 적용시키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물의 가치가 그 외관으로 결정되었다. 종교의 내면적인 힘이 쇠하여짐에 따라 그 외면적인 허식이 성하게 되었다. 그 시대의 교육자들은 과장과 허세로 존경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예수님의 일생은 이 모든 것들과 매우 현저한 대조를 보였다. 그분의 일생은 사람들이 소위 인생의 요긴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실증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환경에서 탄생하여 시골 생활을 하셨다. 한 사람의 장인(匠人)으로 세상의 이름없는 근로자들처럼 미천한 생애를 사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과 환경 가운데서도 그 분께서는 하늘의 교육 계획을 따르셨다. 작은 일을 과장하고 큰 일을 경시하는 당시의 학교를 예수님은 찾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자료들을 통해 교육을 받으셨다. 유용한 일, 성경 공부, 천연계, 인생 경험, 다시말해 스스로 손을 내밀고 눈을 떠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충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교과서들을 통해 직접 배우신 것이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 2:40).
이렇게 준비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나아가셨다. 그분은 사람들과 접촉하시는 동안 끊임없이 상대에게 축복과 감화를 끼치고 그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셨는데, 그런 일은 세상에 일찍이 없던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자는 먼저 인간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동정, 신앙,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만 감동을 받고 향상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교사로서의 자격을 구비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찍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인간의 심령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여기에서, 제사장은 보통 교사의 임무를 겸하였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크신 교사를 뜻한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그리스도만이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과 유혹을 다 경험하셨다. 여인이 낳은 사람으로서 그분처럼 격렬한 유혹을 받고 세상의 죄와 고민의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분처럼 넓고 부드러운 동정을 가진 사람 또한 다시 없었다. 인간의 모든 경험을 맛보신 그리스도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유혹과 싸우는 사람들을 동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그 참 정상(情想)을 직접 경험하셨다.예수님께서는 남에게 가르치신 대로 직접 실천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요 15:10)켰노라는 말씀도 주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당신의 생활 가운데서 완전하게 실천되어 힘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은 바로 그분의 모습 그대로였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 자신의 인생 경험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 품성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분은 진리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곧 진리이셨다. 그분의 교훈을 유력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신실한 견책자이셨다. 그분처럼 악을 미워하고 두려움 없이 죄를 견책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스도의 존재 그 자체가 모든 신실치 못한 것과 비루한 것들에게 견책이 되었다. 그분의 순결한 빛이 발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추함과, 생애의 목적이 얼마나 비루하고 허위적인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끌어당겨 붙드셨다. 인류를 창조하신 그분께서는 인간의 가치를 이해하셨다. 그분은 악을 일컬어 당신이 축복하고 구원하시려고 한 사람들의 원수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비록 타락하기는 했으나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 특권을 다시 가질 수 있는 그분의 자녀의 모습을 보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그리스도께서는 타락과 고난 가운데 있는 인류를 보실 때에, 절망과 멸망밖에 볼 수 없는 그 곳에서 오히려 희망의 여지를 찾아내셨다. 그분께서는 구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향상될 기회가 있음을 인정하셨다. 시험을 받아 패배하고, 기가 꺾여 자포 자기한 영혼들을 예수님께서는 견책하는 대신에 축복으로 맞이하셨다.
산상 설교 가운데서 주신 축복들은 전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인사였다. 그분께서는 산상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든 군중을 보시는 순간, 당신이 지금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신 듯하였다. 그분은 빛의 세계의 친근한 인사 방법을 사용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입술에서는 마치 오래 닫혀 있던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이 축복의 말씀이 넘쳐 나왔다.야심적이고 자기 만족에 빠진 세상의 총아(寵兒)들에게서 눈을 떼시면서, 그분은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당신의 빛과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자라고 선언하셨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핍박을 받는 자들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시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하셨다. 그분은 사람이 당신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난외 주)”(시 90:17)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보셨다. 희망을 가지고 사람들을 보신 그리스도는 그 희망을 사람들의 마음에 불어넣어 주셨다. 신뢰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신 그리스도는 그들의 마음에 신뢰감을 넣어 주셨다. 그분께서는 사람의 참된 이상을 당신 자신의 생애에서 나타내시고,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희망과 신앙을 사람들의 마음에 깨우쳐 주셨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멸시받고 타락한 영혼도 스스로 사람인 것을 깨닫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관심을 끌 가치가 있음을 입증하려고 열망하였다. 거룩한 것들에 대하여 거의 죽은 듯이 무감각했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자극이 일깨워졌다. 절망 상태에 빠졌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애를 살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헌신의 띠로 사람들을 당신의 마음에 붙들어 매셨다. 또한, 그분은 같은 띠를 가지고 사람들 사이를 연결시키셨다. 그분에게 있어서 삶은 사랑과 봉사 그 자체였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희생하신 것은 십자가 위에서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행 10:38)실 때에 겪으신 매일의 경험은 바로 그분의 생활이었다. 이러한 생애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사셨다.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은밀한 곳에,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할 때에, 또 거기서 얼마 동안 살 때에는 그 행위가 고상한 결과를 나타내지만, 그 후에는 신앙이 쇠하여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그 평생사업이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생은 하나님과 더불어 끊임없는 교제로 유지된 변함없는 신뢰의 일생이었으며, 하늘과 땅에 대한 그분의 봉사는 실패하거나 실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한낱 사람으로서, 당신의 인성에 하늘의 권능이 더해져 인성과 신성이 결합될 때까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이 말은 혹 그리스도께서 물질적이거나 지식적인 면에 대해서만, 또는 이론적이거나 사색적인 것들만 가르치셨더라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만 있었더라면 여러 세기에 걸쳐 연구해야 할 비밀까지도 설명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분은 과학의 영역에서도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사람들의 연구와 발명에 자극이 될 만한 것을 암시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호기심을 만족케 하거나 이기적인 야심을 자극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닌, 품성의 발달에 요긴하고 하나님을 아는 능력을 크게 하며 선행의 힘을 더하는 그런 방면의 일을 다루셨다. 그분은 일상의 행위에 관련된 진리와, 사람을 영원한 것에 연결시키는 진리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 말씀 또는 그 하신 일에 관한 인간의 학설을 연구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섭리에 나타나 계신 그분을 바라보도록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무한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접촉하도록 하셨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눅 4:32). 사람의 사고력을 깨우치고, 분발력을 불러일으키고, 지·덕·체의 모든 능력을 고양시키는 말을 이처럼 능력 있게 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그리스도의 교훈은 그분의 동정심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에는 어떤 생활 환경도, 사람이 경험하는 그 어떤 위기도 논의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한 환경과 위기에 처할 때 그분의 가르침의 원칙들은 반드시 교훈을 준다.
교사 중의 교사이신 그분의 말씀은 그분과 동역하는 자들이 세상 끝날까지 간직하게 될 지침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는 현재도 미래도, 먼 것도 가까운 것도 다 한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전 인류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셨다. 그분의 심안(心眼)에는 사람의 노력과 업적, 시험과 싸움, 혼미와 위험 등의 모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분은 모든 마음, 모든 가정, 모든 기쁨과 즐거움, 희망을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전 인류를 위하여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인생의 초창기에 즐거움을 누리는 어린이에게, 열중하며 무엇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젊은이에게, 인생의 강장(强壯)한 시기에 책임과 노고의 무거운 짐을 진 장년들에게, 약하고 피로한 노인들에게, 요컨대 모든 세대와 모든 지역의 전 인류에게 그분의 기별이 전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훈 중에는 현세의 것과 내세의 것, 다시 말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지나가 버리는 일상의 사건들과 내세의 엄숙한 문제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사물을 영원한 것들의 다음 자리에 두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세상 사물의 중요성을 경시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하늘과 땅은 서로 연결된 것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것은 그로 하여금 일상 생활의 의무를 더욱 잘 이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에게는 목적이 없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아이들의 유희, 어른들의 수고, 인생의 즐거움과 염려와 고로 등 모든 것은 인류의 향상을 위해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 한 가지 목적에 사용되는 수단들이다.그리스도의 입술을 통하여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힘과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피조물들을 새로운 빛 앞에 서게 했다.
천연계에, 죄로 인하여 잃었던 빛의 광채가 다시 한 번 비치었다. 인생의 모든 현실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교훈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가능성이 나타났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셨으니, 이 세상은 그분의 사랑에 둘러싸였으며, 사람의 마음은 그분의 임재하심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늘이 사람들에게 내려왔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영원한 지식을 보여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았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 *
모든 교육의 중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 안에 있다. 구주께서는 오늘날의 교육 사업에 대하여 당신이 천 팔백 년 전*에 친히 이룩하신 사업에 대하여 하신 것과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계 1:17, 1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계 21:6)고.
이처럼 크신 교사에게서 하늘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교육을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떠나서 지혜로워지려 하고, 진리를 거절하면서도 진실하려고 하며, 빛이신 하나님을 떠나서 가르침을 구하려 하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나서 생존하려 하며, 생수의 근원이신 분을 떠나서 물을 담을 수 없는 깨어진 물통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더없이 우매한 짓이다.
보라, 그분은 아직도 우리를 부르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 38).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제 2 절
그리스도께서 쓰신 방법의 실례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 중에 가장 완전한 실례는 그분께서 처음으로 열 두 제자를 교육하신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들에게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질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에게 당신의 정신을 불어넣어 나중에 당신께서 세상을 떠나시더라도 남은 사업을 계승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누구보다도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제해 주시는 유리한 조건이 주어졌다. 이 개인적인 교제를 통하여, 그분께서는 이들 택함 받은 동역자들에게 당신에 대한 깊은 인상(印象)을 심어 주셨다. 그분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은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요일 1:2) 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교제, 곧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고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참된 교육 사업이 줄 수 있는 생명의 힘을 전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을 낳는 유일한 생명인 것이다.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교육하실 때에, 창세시에 세우신 교육 제도를 사용하셨다. 처음으로 택하신 열 두 제자와, 필요한 봉사를 위하여 때때로 그들과 관계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집에 있든지 식사를 하든지, 방에서나 밭에서나 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여행하고, 시련과 역경을 나누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분야에서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관여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때에 따라 제자들과 산허리에 함께 앉아 그들을 가르치셨다. 또 어떤 때에는 해변에서, 어부의 배 안에서, 혹은 길을 가면서도 가르치셨다. 그분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은 언제나 그분 주위를 둘러싸 내원(內圓)을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하여 그분 가까이 다가붙었다. 그들은 각 나라와 각 시대를 통하여 가르쳐야 할 진리를 깨닫고자 주의 깊이 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들은 평민 계급에서 택함을 받았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그들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랍비의 학문이나 관습에 대해서는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간난 신고(艱難辛苦)의 엄한 훈련을 통하여 단련되었다. 그들은 천부적인 재능과 교육을 받을 만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장차 구주의 사업을 위하여 교육을 받고 필요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졌던 것이다. 세상에는 숨은 능력, 곧 발휘되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도 있는 능력을 자각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그날그날 근실하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구주께서 당신의 동역자로 부르신 사람들은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보는 위대한 교육자에게서 삼 년 동안 교육을 받는 특전을 가졌던 것이다.이 최초의 제자들은 피차에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교사가 될 운명에 있었으나 서로 다른 성격을 나타내었다. 그 중에는 로마에 협조하여 일을 하다가 부름을 받은 세리 레위 마태, 로마 제국의 권위에 강하게 반발한 열심 당원 시몬, 충동적이며 자부심이 강하고 온정적인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교양과 재능은 있었지만 비열한 정신을 가졌던 유대 사람 가룟 유다, 충실하고 열성적이었으나 더디 믿은 빌립과 도마, 같이 뽑힌 형제 중에 과히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결점과 미덕이 모두 확실히 나타난 유력자 야고보와 유다, 아기처럼 순진하고 신뢰심을 가진 나다나엘, 대망과 애정을 가진 세베대의 아들들이 있었다.
이 제자들은 원래의 성격과 교육 정도, 그리고 생활 습관이 서로 전혀 달랐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일을 성공적으로 해 나가기 위해서 감정과 사상과 행동이 서로 일치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분께서는 그들을 당신 자신에게 일치시키고자 노력하셨다. 그들을 위한 그분의 고심은 하늘 아버지를 향한 그분의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1-23).
그리스도의 변화시키시는 능력
열 두 제자 중에서 네 사람이 각각 독자적인 입장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준비하는 중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일을 미리 아시고 이에 맞도록 그들을 교육하셨다. 검에 의해 급사할 운명의 야고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주를 따라다니며 일하고 박해를 받을 요한, 여러 세대에 걸쳐 장애가 되어 온 것들을 타파하고 이교의 세계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할 선구자 베드로, 형제들보다 더 훌륭한 봉사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가려고 했던 유다, 이 네 사람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관심의 목표가 되었으며 그분에게서 매우 자주 주의 깊은 교훈을 받은 자들이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곁에 있고자 노력했으며, 그들의 이 소원은 성취되었다. 열 두 제자 중에 이 세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가장 친밀하였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누구보다도 친밀해지고 싶었다. 실제로 그는 그런 관계를 향유하였다. 요단강 가에서 처음으로 모인 집회에서, 안드레는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즉시 그 형제를 부르러 달려갔으나, 요한은 조용히 앉아서 그리스도의 기이한 화제에 대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언제나 열심으로 구주를 따르고 그 말씀을 듣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요한이었지만, 그 품성에 결코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순하고 몽상적인 열심자는 아니었다. 그와 그의 형제는 “우뢰의 아들”(막 3:17)이라고 불리었다. 요한은 자부심이 강하고 야심적이며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거룩하신 교사께서는 요한의 이런 모든 성격의 이면에 있는 열렬하고 순진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이기주의를 견책하시고, 야심을 꺾으셨으며, 믿음을 시험하셨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심령이 사모하고 있는 성결의 아름다움 곧 당신께서 가지고 계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을 그에게 나타내셨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요한은 교제하기를 좋아하며 사랑과 동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곁에 앉아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곤 했다. 마치 꽃이 태양과 이슬을 받듯이,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빛과 생명을 받아 마셨다. 사랑과 숭경(崇敬)의 마음으로 구주를 바라보는 중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그분과 더불어 교제하는 일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 마침내 그의 품성에는 그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품성이 반영되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1-3).
연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으로
제자들의 경력을 보면 베드로보다 그리스도의 교육법을 잘 예시하고 있는 사람도 없다. 대담하고, 잘 다투고, 자신감이 넘치며, 지각이나 행동이 예민하고, 금방 복수하고 금방 용서하는 성질을 가진 베드로는 때때로 잘못을 거듭하여 견책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충정과 헌신도 다른 성질 못지 않게 강했다. 이 때문에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이 성급한 제자를 다루심으로 그의 자만을 견제하시고, 그에게 겸손과 순종과 신뢰를 가르치고자 노력하셨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그 교훈의 일부분뿐이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근절되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울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열어서 당신이 당하시는 시련과 고난을 보게 하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닫혀 있었다.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겁이 난 베드로는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간구하였다. 그가 한 이 말은 열 두 제자의 생각과 감정을 대표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위기가 점점 가까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다만 왕국의 영위(榮位)가 자신들에게 배정될 것을 기대하면서 자부심과 경쟁심으로 나날을 보냈다.베드로의 경험은 모든 제자들에게 교훈이 되었다. 자기를 의지하는 자에게 있어서 시련은 패배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라 할지라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한 죄의 확실한 결과는 어찌할 수 없으시다.
그러나, 파도가 베드로를 휩쓸어 버리려고 할 때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손길이 펴졌던 것처럼, 큰 물결이 그의 영혼을 횝쓸려고 하는 이 때에도 그분께서는 그를 구원하기 위해 사랑을 베푸셨다. 베드로는 파멸의 끝에 서서도 계속 교만한 말을 함으로써 점점 더 벼랑 쪽으로 나아갔다. 그에게는 “네가 …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눅 22:34)는 경고가 거듭 주어졌다. 그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 22:33)라고 맹세하듯 말했다. 이것은 그의 사랑하는 마음과 슬픈 심정을 고백하는 말이었다. 그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장은 진가가 나타나지 않지만 신속히 임할 암흑 가운데서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는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 32).
“내가 너를 위하여 …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시던 구주의 말씀이 베드로의 심령을 붙드는 지주가 된 것은 그가 재판정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말을 하고 연민과 사랑과 슬픔으로 가득한 그분의 눈길과 마주친 때였다. 그 순간 그는 구주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이 되살아나, 전에 그분께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던 동산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고민의 핏방울로 적셔졌던 잔디 위에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죄를 미리 아셨으나 그를 절망 가운데 버려 두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만일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눈길 대신에 견책하시는 눈길을 보내고, 그의 죄를 미리 말씀하실 때에도 희망의 말씀을 함께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를 두른 암흑이 얼마나 짙었겠는가! 후회로 고민하는 심령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겠는가! 고뇌와 자아 혐오 속에서, 무엇이 그로 하여금 유다가 갔던 길로부터 돌아서도록 붙들 수 있었던가?
당신의 제자가 그 고뇌를 경험하지 않게 할 수는 없으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홀로 그 괴로움 속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분의 사랑은 용기를 잃게 하거나 못본 체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사람은 그 자신도 죄가 많으면서 시험에 빠져 있는 자와 허물이 있는 자에 대해 관대하지 못한 태도를 갖는 경향이 있다. 남의 마음을 읽어 볼 수도, 또 그 마음속의 투쟁과 아픔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견책, 치유를 위한 타격, 희망을 속삭이는 경고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다.
재판정에서 예수님을 본 것도, 십자가 옆에 서 있던 것도, 그리고 열 두 제자 중에서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것도 요한이 아니었다.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보내신 기별 중에 언급된 이름도 요한이 아니고 베드로였다. 천사는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막 16:7)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과 만나셨을 때,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7)는 질문으로 세 번 거푸 시험을 받은 후에, 열 두 제자 중 하나로서의 지위가 회복되었다. 그는 할 일을 부여 받았다. 그는 주의 양을 먹여야 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개인적인 명령으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요 21:22)고 하셨다.
이제 베드로는 그 말씀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가운데 어린아이를 두시고 그같이 되라고 말씀하신 교훈을 그는 이제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연약함과 그리스도의 능력을 완전히 깨달은 베드로는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할 준비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는 주를 따라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이리하여, 한때 십자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던 제자가 희생과 수고의 경험을 마쳐 갈 즈음에는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전에는 주님을 부인했으나 지금은 그분께서 돌아가신 방법으로 죽는 것을 매우 큰 영광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베드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자비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적이었다. 크신 교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평생 동안 배워야 할 교훈이다.
사랑의 훈계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책망과 경고와 주의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과 그 형제들은 그분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많은 견책을 받았으나 그분과 함께 있기로 결심했다. 예수님 또한 제자들이 허물이 있었지만 내어 버리지 아니하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본래 약하고 허물이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시며, 그들이 만일 당신에게서 배우고 단련 받기를 원하면 당신의 사업을 하는 데 적합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지상 사업이 아주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으셨다.유다로 말미암아 반항적 요소가 제자들 사이에 들어왔다. 그는 예수님과 관계를 갖게 된 이후로 그분의 품성과 생애에 마음이 이끌렸다. 그는 자신의 변화를 진심으로 바랐으며,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이런 경험을 갖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이 소망이 그의 마음을 완전히 주도하지는 못했다. 그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그가 기대한 대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왕국을 건설하실 때에 얻을 이기적인 은전에 대한 희망이었다. 유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닌 하늘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 주권에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에 자기의 판단과 의견, 그리고 남을 비평하고 비난하는 경향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행동과 동기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의혹과 불만을 품었다. 그런데, 그의 의혹과 야심은 은연 중에 제자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제자들이 권력 다툼을 하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불만을 갖게 된 대부분의 원인은 유다에게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완고하게 할 뿐임을 아시고 유다와 직접 충돌하는 일을 피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자아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접촉함으로써 유다의 속 좁고 이기적인 생활을 고쳐 주고자 노력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훈에서, 유다의 자기 중심적인 야심을 근절할 원칙들을 보이셨다. 여러 번 교훈을 받은 유다는, 거기에 자기의 성격과 죄가 묘사되고 지적되어 있음을 알았으면서도 굴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비의 호소는 거부되고, 악의 충동이 최후의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유다는 은근한 견책에 화를 내었으며, 야심적인 꿈이 깨어진 데서 자포 자기하여, 자기의 심령을 탐욕의 악마에게 내어 맡기고 주를 배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즐거움과 영원한 빛을 버리고, 악을 행하기 위해 유월절의 다락방에서부터 희망이 없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나갔다.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요 6:64).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비의 호소와 사랑의 은사를 아끼지 아니하셨던 것이다.유다의 위험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당신께로 가까이 이끄셔서, 친히 택하시고 신뢰하는 제자들 가운데 두셨다. 매일 당신의 마음이 무거운 짐에 눌릴 때마다, 그분께서는 이 완고하고 의심 많고 깊은 생각에 빠져 드는 성미를 가진 자와 계속적으로 접촉하는 고통을 참으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의 지속적이고 비밀스럽고 음험한 반항심을 아시고 이를 제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없애 보려고 애쓰셨다. 이처럼, 위험에 빠진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방도가 다 강구되었던 것이다.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아 8:7, 6)

유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노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평생 동안 감화를 끼치는 교훈이 되었다. 애정과 인내의 모본은, 시련과 과실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취해야 할 태도를 항상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또한 다른 교훈도 주었다. 열 두 제자가 임명되었을 때에, 그들은 유다가 그들 중에 들어오기를 열망하였다. 그리고, 유다의 가입을 사도들의 단체에 큰 희망이 되는 사건으로 여겼다.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도 세상에 대한 견문이 넓었고, 응대 솜씨가 뛰어나고, 식별력과 실행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자격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그는 다른 제자들도 그 같은 생각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사업에 적용시키고자 한 방법은 세속적 원칙과 정책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인정과 영예를 확보하는 것, 곧 이 세상 왕국을 얻을 것을 기대하였다. 유다의 생애에 이런 욕망이 나타난 것은, 제자들이 그의 자대주의(自大主義)가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아희생주의, 곧 신령한 왕국주의와 서로 반대되는 것임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유다가 택한 운명에서 자아 중심 생활의 종말을 본 것이다.이 제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명은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조금씩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모본과 자아 희생의 교훈은 제자들의 품성을 형성해 갔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위대해지려는 그들의 희망을 무산시켰다. 베드로의 실패, 유다의 배신, 고민과 위기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버린 자신들의 과오로 그들의 자만심은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어, 그들이 가는 모든 길에 주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제자들은 이제 후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못할 것을 알고, 그분과 더불어 함께 여행하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던 기회가 얼마나 귀중한 것이었던가를 전에 없이 절감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에는, 말씀하실 당시에 즉시 그 참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교훈들을 회상하고 그 말씀을 다시 듣고자 열망하였다. 그리스도의 보증의 말씀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들 마음에 새롭게 새겨졌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또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그가 …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5, 13, 14).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감람산에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 하늘이 그분을 받아들일 때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그분의 작별의 약속을 들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여전히 동정하고 계심을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옆에 그들의 대표자요 중보자이신 분이 계심을 알았다. 그들은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고 하신 예수님의 허락을 반복하여 말하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기원을 드렸다.
그들은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고하는 큰 논증을 가지고 더욱 높이 믿음의 손을 폈다.
하늘 궁정으로 들림을 받은 거룩하신 분께서는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고, 지상에 있는 신자들에게 당신의 풍성하신 은덕을 나누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신 것은 제자들 위에 성령이 부어진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힘입어, 제자들은 성령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성령의 가르침 아래서 최후의 준비를 하고 필생의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무지하거나 교양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개개인의 집단도 아니요, 조화되지 않는 모순의 요소들이 모인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희망은 더 이상 세속적으로 위대한 것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그들의 생각은 그리스도로 가득하였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발전시키는 일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마음과 품성에 있어서 그들은 주와 같은 자들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행 4:13)을 알게 되었다.그 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은, 사람이 전에 전혀 본 일이 없는 기이한 것이었다. 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난하고 그분의 능력을 업신여기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제자임을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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