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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첫째 원칙

제 1 절
참된 교육의 근원과 그 목적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잠 9:10; 욥 22:21)

교육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그 범위가 너무 좁고 그 정도가 낮다. 우리는 더욱 넓은 식견과 보다 높은 목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참된 교육은 어떤 연구 과정을 이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생활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참된 교육은 전인 교육(全人敎育)이어야 하며 평생 교육(平生敎育)이어야 한다. 즉, 지(知), 덕(德), 체(體)의 능력이 일생 동안에 걸쳐서 균형지고 원만하게 발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교육이란, 이 세상에서 봉사함으로 얻어지는 기쁨과, 내세에 있어서의 더욱 넓은 범위의 봉사로 말미암아 얻어질 보다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학생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근원은 무한하신 분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성경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골 2:3)으며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욥 12:13)해 있다.세상에는 지금까지 위대한 교사들이 많이 나왔다. 그들은 높은 지능을 가지고 광범위한 연구에 종사하면서 사상과 지식의 매우 넓은 분야를 개척해 왔다. 이런 사람들은 저희 민족의 인도자와 은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뛰어난 분이 계신다. 우리는 유사 이래 지금까지 있어 온 세상의 모든 교사들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런데, 빛이신 그분께서는 그들보다 먼저 계셨다. 태양계의 달과 별들이 모두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는 것처럼, 세상의 위대한 사상가들도 저희 가르침이 진실된 한 의의 태양이신 분의 빛을 반사하는 것이다. 섬광처럼 빛나는 사상과 번뜩이는 지성은 그 하나하나가 세상의 빛 되신 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근년에 들어와 “고등 교육”의 성격과 중요성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참된 “고등 교육”은 “지혜와 권능”(욥 12:13)을 가지시고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잠 2:6) 내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모든 참된 지식과 진정한 발달의 근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다. 물질계나 정신계나 영계를 막론하고, 죄의 폐해가 미치지 않은 곳이면 어디에나 이 지식이 나타나 있다. 어떤 방면의 연구에 종사하든지 진리에 도달하려는 진실된 목적을 가지고 힘쓸 때에, 우리는 만물 가운데서, 또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놀라운 지능 그 자체이신 분을 만나게 된다.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만나고, 유한한 자와 무한하신 분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이 지·덕·체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이러한 교제에서 최고의 교육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는 계발(啓發)의 방법이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욥 22:21)라는 말씀은 사람에 대한 그분의 기별이다. 이 말씀에 제시된 방법들이 인류의 부조(父祖)들을 교육하실 때 사용하신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죄없는 영광 가운데 있을 때에 아담을 거룩한 동산에 두시고 이렇게 교육하셨다.교육 사업이 함축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본성(本性)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악에 대한 지식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생긴 사람의 상태 변화와, 또한 이런 상태에 빠진 인류를 교육시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계속하여 달성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담이 창조주의 손으로 지음을 받았을 때 그의 육체와 지능과 영성(靈性)은 하나님을 매우 닮아 있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창 1:27)고, 사람이 오래 살면 살수록 더욱 완전히 창조주의 형상을 나타내어 그분의 영광을 보다 충분히 반영하게 하려고 목적하신 것이다. 사람의 모든 재능은 발달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 능력과 활력은 끊임없이 증진하게 되어 있었다. 재능의 활용 범위는 광대하였고, 연구를 위해 펼쳐진 분야는 놀라웠다. 눈에 보이는 우주의 신비, 곧 “지혜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욥 37:16)들은 사람의 연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창조주와 대면하여 마음을 열어 놓고 교제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큰 특권이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변치 아니하였더라면, 그 모든 특권이 영구히 사람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무궁한 시대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새로운 지식의 보화를 얻고, 행복의 새 샘을 찾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힘에 대하여 더욱 더 밝은 개념(槪念)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창조함을 받은 목적을 보다 완전히 성취함으로써 창조주의 영광을 더욱 잘 나타낼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러한 특권을 잃어버렸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고 일그러져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의 체력은 약해지고, 지적 능력은 떨어지고, 영적 통찰력은 어두워졌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류는 소망 없이 버려지지 않았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구원의 경륜이 세워지고, 생명에 대한 유예(猶豫)의 은혜가 주어지게 되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도록 사람에게서 창조주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
다시 말해 지·덕·체의 발달을 증진시켜 사람으로 하여금 창조되던 당시의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구속 사업이다. 이것은 또 교육의 목적인 동시에 인생의 위대한 목적이기도 하다.
창조와 구속의 기초인 사랑은 또한 참된 교육의 기초가 된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생활의 지침으로 주신 율법 가운데 명백히 나타나 있다. 크고 첫째가 되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눅 10:27)라는 것이다.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무한하신 자,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의 모든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지·덕·체를 균형지게 발달시켜 하나님의 형상이 전인적으로 회복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과 마찬가지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사랑의 율법은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을 위해 몸과 마음과 목숨을 다하는 헌신적인 봉사를 하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봉사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도 큰 축복을 가져다 준다. 이타적인 정신은 모든 참된 발달의 기초이다. 이타적인 봉사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재능이 최대한으로 계발된다. 이러한 일이 계속될 때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 마음에 하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 하늘에 적합한 자가 되는 것이다.이미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참된 지식의 원천이 되시므로 교육의 첫째 목적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그분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더불어 직접 교제함으로 지식을 얻었으며, 그분께서 하시는 일들을 통하여 그분에 대해 배웠다. 모든 피조물들은 처음에 완전할 당시에는 하나님의 사상을 그대로 표현했다.
아담과 하와가 볼 때 천연계는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분을 배우는 길이 끊어지게 되었으며, 또 그분의 일을 통하여 배우는 길도 대부분 막히고 말았다. 땅은 범죄 때문에 훼손되고 더러워져서 창조주의 영광을 희미하게 반영할 따름이다. 물론, 하나님의 실물 교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연계라는 거대한 책의 매 페이지마다에서 지금도 그분의 솜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천연계는 여전히 그것을 창조하신 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나타내는 것들은 부분적이며 불완전하다. 게다가, 타락한 상태에 있는 연약한 사람의 지력과 통찰력으로는 하나님의 실상을 바로 알고 해석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그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계시가 필요하다.
성경은 진리의 완전한 표준이며, 교육은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이라고 할 만한 가치 있는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나 있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여야 한다.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모든 인류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유사한 능력을 부여 받았다. 이 능력을 계발시키는 사람들이 책임을 맡고, 사업을 지도하며, 다른 이들에게 감화를 끼친다. 참된 교육은 이 능력을 계발시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청년들로 하여금 단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반영하는 자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자가 되도록 훈련을 시킨다는 뜻이다. 학생들이 공부할 때, 사람이 말하고 기록해 놓은 것만 연구하게 하지 말고 진리의 원천, 천연계와 계시 속에 펼쳐져 있는 광범위한 연구 분야로 그들의 방향을 돌리게 하자. 이들로 하여금 사람의 본분과 운명에 대한 중요한 사실들을 깊이 생각하게 하자. 그리하면, 그들의 마음이 넓어지고 강하게 될 것이다.
교육 기관은, 교육을 받았으나 여전히 약한 사람들 대신에, 생각하고 행하는 일에 있어서 의지력이 있는 사람들, 환경에 지배 받기보다는 이를 지배하는 사람들, 넓은 마음과 바른 식별력과 신념에 대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배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은 단순한 지적 훈련과 육체적 훈련 이상의 것을 마련해 준다. 품성을 단련시켜 진실과 정직이 이기적인 욕망이나 세속적인 야심에 의해 희생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또 정신을 강하게 하여 악에 대항하도록 만든다. 모든 동기와 욕구가 파괴를 일삼는 정복욕으로 변하는 대신에 의와 위대한 원칙들과 일치하게 된다. 하나님의 품성의 완전함을 간직하게 될 때 마음은 새로워지고,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창조함을 받게 된다.
이보다 더 고상한 교육이 어디 있으며, 어떤 교육이 이와 버금가는 가치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와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욥 28:15-18).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이상은 사람의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보다도 더 높다. 경건 곧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가지는 것이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학생들 앞에는 끊임없는 진보의 길이 열려 있다. 학생에게는 이루어야 할 목표, 도달해야 할 표준이 있으며, 이 목표와 표준은 선하고 순결하고 고상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학생은 참된 지식의 각 분야에 있어서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멀리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하늘이 땅보다 더 높은 것같이 단순히 이기적이며 속된 관심사보다는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나눠 주고 인간의 품성이 그분의 품성을 따라 꼴지어지도록 하는 일에 거룩한 뜻을 좇아 협력하는 사람은 귀하고 고상한 사업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이상(理想)에 도달하려는 강한 욕구를 가질 때, 그는 하늘처럼 높고 우주처럼 넓은 교육, 현세에서 끝나지 않고 내세에서까지 계속될 교육, 성공적인 학생에게 이 땅의 예비 학교에서보다 높은 단계의 하늘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보장해 주는 교육을 펴게 될 것이다.
제 2 절
에덴의 학교

“지혜를 얻은 …
자는 복이 있나니”(잠 3:13)

이 세상의 시작과 함께 세워진 교육 제도는 그 후의 모든 시대를 통해 인류의 교육을 위한 모형이 되어야 했다. 그 원칙을 실제로 보여 주는 하나의 시범학교가 우리 시조의 보금자리였던 에덴에 설립되었다. 에덴 동산은 교실이었고 천연계는 교과서였다. 창조주께서 친히 교사가 되셨으며 인류의 시조는 학생이 되어 배웠다.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높은 품위에 합당한 자질을 부여 받았다. 인자하고 균형진 모습, 완전하고 아름다운 용모, 행복과 희망과 건강미로 가득 찬 얼굴 빛으로 그들은 외견상 그들의 창조주와 거의 비슷하였다. 이러한 유사점들은 아담과 하와의 육체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지성(知性)과 영성(靈性)의 모든 면에서도 창조주의 영광이 반영되고 있었다.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히 2:7) 지음을 받고 높은 지적, 영적 은사를 부여받은 아담과 하와는 눈에 보이는 우주의 경이를 인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도덕적 책임과 의무도 헤아릴 수 있었다.“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8, 9). 이처럼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죄의 흔적이 전혀 없는 아름다운 천연계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친히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때때로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로부터 권면과 교훈을 들었다. 때로는 서늘한 때에 동산을 거닐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영원하신 분과 대면하여 교제하였다. 아담과 하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렘 29:11)이었다.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에게 최상의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에덴 동산을 돌볼 책임, 곧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창 2:15)는 일이 주어졌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풍족히 공급하실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게을러지도록 버려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축복으로서 그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몸을 튼튼하게 하고 마음을 넓히며 품성을 계발하도록 하셨다.
아담과 하와 앞에 생생한 실물 교훈들을 펼쳐 놓고 있는 천연계는 교과서로서, 교훈과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나뭇잎, 산의 돌덩이, 하늘의 반짝이는 별, 땅과 하늘과 바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성호(聖號)가 기록되어 있었다. 에덴의 거주자인 아담과 하와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 곧 나뭇잎, 꽃, 수목은 물론 물에 사는 큰 동물들로부터 햇빛에 비취는 티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존재의 신비를 배웠다. 하늘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질서 있게 운행되는 무수한 별들, “구름의 평평하게 뜬 것”(욥 37:16)들, 빛과 소리와 밤과 낮의 신비들, 이 모든 것들이 지구의 첫 학교 학생들이 연구할 대상이었다.
천연계의 법칙과 생태는 물론, 영적 세계를 지배하는 진리의 위대한 원칙들까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에 의해 그들 앞에 밝히 제시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 가운데서 그들의 지적, 영적 능력이 발달되었으며, 그들은 이에 따른 자신들의 경건한 생활이 가져다 주는 최고의 기쁨을 맛보았다.
에덴 동산이 창조주의 손에서 지음을 받을 당시에는 그것뿐만 아니라 온 땅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완전한 창조를 훼손시킬 죄의 흔적이나 죽음의 그늘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합 3:3)였다.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욥 38:7). 그리하여, 땅은 “인자와 진실이 많은”(출 34:6) 하나님의 표상이 되기에 적합하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연구하기에 알맞은 대상이 되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지구 전체가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 보여 주는 모본이었다. 따라서, 그분의 목적은 사람들이 그 수가 늘어남에 따라 세우게 될 다른 가정과 학교도 당신께서 주셨던 것과 같은 것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하신 일을 배우는 가정과 학교로 가득 차게 되고, 이곳 학생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세세토록 반사하기에 더욱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제 3 절
선악에 대한 지식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롬 1:21)

우리의 시조는 죄가 없고 정결하게 지음을 받았으나 악을 행할 가능성이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창조하실 때 그들에게서 당신의 요구를 거부하는 능력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품성의 발달이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의 봉사도 자원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택의 능력 곧 순종하든지 또는 순종하기를 거절하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축복을 온전히 받게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과 충성에 대해 시험을 받아야 했다.
에덴 동산 가운데에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었다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9-17) 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악을 알지 않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선(善)에 대한 지식은 제한 없이 흡족히 저희에게 제공되었다. 그러나, 악에 대한 지식 곧 죄와 그 결과, 고통과 염려, 실망과 비탄, 아픔과 죽음 등은 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타내지 아니하셨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복을 바라시지만, 사단은 사람의 파멸을 바랐다.
하와는 금단의 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모하게 그 나무에 가까이 감으로써 유혹하는 원수를 만나게 되었다. 하와가 이같은 흥미와 호기심을 일으킨 기회를 틈타, 사단은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그분의 지혜와 자비를 의심하고 불신하는 마음이 일게 하였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고 하자 유혹자 사단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 5)고 대답하였다.
사단은 선과 악이 섞인 지식이 축복이 되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에게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유익을 주시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과실을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것이 지혜와 능력을 주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더 훌륭하게 향상하고 더 큰 축복을 찾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 했다고 역설하였다. 사단은 자기도 금단의 열매를 먹고 말하는 능력을 얻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처럼 그들도 그 열매를 먹게 되면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를 것이고 더욱 넓은 지식의 분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단은 자기가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 큰 유익을 얻었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늘로부터 쫓겨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은 숨겼다. 겉보기에는 진리 같으면서도 사실은 그 속에 거짓이 숨겨져 있었지만, 하와는 꾀임에 빠져 홀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 기만을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탐내고 그분의 교훈을 의심하였으며, 지식의 근본이 되는 신앙을 내어 버렸다.
하와가 볼 때에 그 나무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으므로, 그는 “그 실과를 따먹“었다(창 3:6). 그 과실은 맛이 좋았기 때문에 하와는 그것을 먹는 순간 활력이 생기면서 자신이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범죄한 하와는 자기 남편을 유혹하였고, 드디어 “그도 먹은지라”(창 3:6).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같이 되어 선악을 알”(창 3:5)게 되리라고 한 원수 사단의 말대로 그들의 눈은 밝아졌다. 그러나, 그 밝음이란 얼마나 슬픈 것이었던가!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얻은 것은 악에 대한 지식 곧 죄의 저주가 전부였다. 과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독소가 없었다. 죄는 식욕의 방종 때문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시조를 죄인으로 만들고 이 세상에 악에 관한 지식을 가져 온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 그분의 말씀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분의 권위에 대한 도전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모든 종류의 거짓과 오류의 문이 열린 것이다.
진리이시고 명철의 주재(主宰)이신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기만자의 말을 들음으로써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선과 악이 뒤섞임으로 사람의 마음은 혼란해지고, 그의 지적 능력과 영적 능력은 마비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처럼 제한 없이 부어 주신 행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아담과 하와는 악의 지식을 선택하였으므로, 상실한 지위를 회복하려면 스스로 초래한 불리한 조건 아래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제 더 이상 에덴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에덴이 완전한 상태에서 그들이 꼭 배워야 할 교훈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비감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주위 환경과 작별하고, 죄로 저주를 받은 이 세상으로 살 곳을 찾아 떠났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19).
비록 땅이 죄의 저주로 말미암아 훼손을 받았을지라도 천연계는 아직도 사람이 하나님을 배우는 교과서가 되기에 족하였다. 천연계는 이제 좋은 것만 나타낼 수 없게 되었다. 어느 곳에나 악이 있었고, 땅도, 바다도, 그리고 하늘도 이미 악으로 오염되어 더럽혀져 가고 있었다. 전에는 하나님의 품성 곧 선에 대한 지식만이 쓰여져 있던 곳에, 이제는 사단의 품성인 악에 대한 지식도 함께 쓰여져 있게 되었다.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섞여 있는 천연계에서, 사람은 죄의 결과에 대하여 끊임없는 경고를 받아야만 하였다.
시드는 꽃과 지는 나뭇잎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는 쇠하는 첫 징조를 목격하였다. 모든 생물은 결국 죽고 말 것이라는 엄숙한 사실이 그들의 마음에 분명히 떠올랐다. 심지어는 그들의 생명이 달려 있는 공기까지 죽음의 씨를 품고 있었다.그들은 그들의 잃어버린 통치권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아담은 그보다 못한 피조물들 가운데서 왕이었으며, 그가 하나님께 충성하는 동안 천연계 전체는 그의 통치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가 범죄하게 되자 이 통치권은 박탈되었다. 아담이 스스로 물들게 된 반역의 정신은 동물계에도 점점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짐승의 성질, 삼림의 나무들, 들의 풀들, 심지어는 사람이 호흡하는 공기까지도 악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오는 슬픈 교훈을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택한 죄의 참혹한 결과 가운데 그대로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하신, 사단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은 구속(救贖)을 암시하고 있었다. 인류의 첫 조상이 듣는 가운데 공표된 이 선언은 그들에게 구속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가시와 엉겅퀴, 수고와 슬픔, 그리고 죽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흙에 대해 듣기 전에 먼저 희망을 가지게 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사단에게 굴복함으로 잃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천연계 또한 우리에게 이러한 암시를 준다. 비록 죄로 인해 훼손되긴 했지만 그것은 창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구속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땅은 비록 쇠퇴의 명확한 징조들을 통해 저주를 증거하고 있지만 아직도 생명력을 보여주는 증표들로 부요하고 아름답다. 나무들은 그 잎이 떨어질지라도 청청한 신록의 옷을 다시 입고, 꽃은 시들어도 다시 아름다운 새 모습으로 피어난다. 창조의 능력을 나타내는 천연계 전체는 우리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엡 4:24) 다시 창조될 수 있다는 분명한 보증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리하여, 천연계의 삼라 만상과 그 운행은 죄로 인해 받은 우리의 큰 손실을 매우 분명히 깨닫게 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희망을 전해 주는 기별자가 되기도 한다.
악이 미치는 곳은 어디에서나, 당신의 자녀들에게 죄의 결과를 통해 그 성질을 보도록 명령하시고, 그들에게 악을 버리도록 경고하시며, 또 유익을 얻도록 초청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제 4 절
교육과 구속의 관계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경륜이 없었다면, 하나님과의 영원한 이별, 끝없는 밤의 암흑이 바로 사람의 운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주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다시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으며, 또한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다. 그러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쳐다볼 수 있고 교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었다(고후 4:6; 5:1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그리스도의 삶과, 우리의 구속을 위한 대가로 지불된 그분의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의 약속과 보증이 되며, 지혜의 보고를 다시 여는 열쇠가 된다. 이 둘은 에덴의 천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하나님의 품성을 더 명백하게, 더 훌륭하게 보여 주는 것들이다.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사람에게 열어 놓으시는 때에, 그분께서 나눠 주시는 생명은 사람으로 그 마음을 하늘을 향해 열게 한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부터 떠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심령으로부터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희망과 또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다 소멸시켜 버린다. 이 모든 악의 역사(役事)를 허사로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마비된 영혼의 능력, 어두워진 마음, 그리고 변질된 의지를 활기 있게 하고 회복시키는 능력을 가지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우주의 보고를 열어 놓으시며, 그 보물을 분별하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리스도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요 1:9)이시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얻는 것처럼 모든 심령이 하늘의 거룩한 진리의 빛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각 사람의 마음속에는 지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영적인 능력 곧 옳은 것에 대한 분별력과 선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지선(至善)의 원칙들에 대항하는 힘이 우리 속에 있다. 이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결과가 모든 사람의 일상 경험 가운데서 나타나는 성악(性惡)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에는 악을 행하려는 성향 곧 인간이 자신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이러한 힘에 대항하여 싸우며, 진심으로 유일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힘으로부터이다. 그 힘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일은 이 힘과 더불어 협력하는 것이다. 모든 교육적인 노력에 있어서 이러한 협력이 최고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참된 교사는 반쯤 들이는 노력에 만족하지 않는다. 참된 교사는 학생들을 그들이 능히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표준보다 낮은 표준으로 지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그의 학생들에게 기능적인 지식만을 가르쳐서 단지 능률적인 회계원, 우수한 기술자, 또는 성공적인 상인이 되게 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의 포부는 학생들에게 진리, 순종, 명예, 성실, 그리고 순결의 원칙들 즉 그들로 하여금 사회의 안녕과 복리 증진을 위한 적극적인 요체가 되게 하는 원칙들을 불어넣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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